---

개발의 역사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8척의 항공모함(이하 항모)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중에 호위항모로 지정된 CVE-1 롱아일랜드는 항공기 수송용으로 사용되었기에 해전 투입이 어려웠다. 대서양에서 작전을 펼치는 CV-4 레인저, CV-7 와스프는 정규항모로 구분되나 크기가 작아 실질적으로는 경항모로 취급되었다. 미국 최초의 항모였던 AV-3 랭글리는 전쟁 직전에 수상기모함으로 바뀐 상태여서 8척에 포함되지 않는다.

때문에 태평양에서 함대 간 대결에 동원할 수 있는 항모는 5척뿐이었다. 이중 CV-2 렉싱턴, CV-5 요크타운, CV-8 호넷이 1942년에 연이어 벌어진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차례대로 격침되었다. CV-2 새러토가와 CV-6 엔터프라이즈만 남았지만 이들도 수차례의 격전을 치르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열심히 싸웠음에도 여전히 일본에 근소하게 열세인 상황이었다.

다행이라면 일본이 그동안 상실한 베테랑 조종사 보충에 애를 먹으면서 1942년을 끝으로 항모 함대 간 정면 대결을 지양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다만 미국이 그러한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이처럼 암울하던 12월 31일에 취역한 정규항모 CV-9 에식스와 곧이어 이듬해 1월 14일에 실전 배치된 경항모 CVL-22 인디펜던스는 가히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가장 필요할 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전쟁 전부터 건조 중이던 에식스와 달리 인디펜던스는 조속한 획득을 위해 급하게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선체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그러한 의도대로 번개 같은 속도로 탄생한 인디펜던스급 경항모는 종횡무진 활약하며 일본군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1943년 여름을 기점으로 미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고마웠던 인디펜던스급의 흠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배수량이 같은 시기에 제작된 에식스급의 절반 수준이지만 함재기 운용 능력이 30퍼센트에 불과했다. 내부 공간도 비슷한 크기였던 레인저나 와스프와 비교한다면 유달리 작았다. 방어력이 취약한 데다 황천에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만큼 내파성도 좋지 않았다. 새롭게 선체를 설계한 것이 아니라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제한에 맞춰 탄생한 경순양함을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벌어진 문제였다.

이에 미국은 인디펜던스급 획득을 9척으로 종결하고 후속해서 새로운 경항모 획득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당시 건조와 배치가 속속 진행 중이던 에식스급만으로도 충분히 일본을 압도할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급 자체가 워낙 급박한 시기에 탄생한 한시적 목적의 항모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굳이 전쟁 자원을 이리저리 나누어가면서 후속 함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군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고 경항모도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는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사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개발 기간 단축을 위해 인디펜던스급처럼 기존 선체를 기반으로 설계가 이루어졌다. 이때 베이스로 선택된 것이 1943년 3월부터 취역에 들어간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이었다. 해군 군축 조약을 벗어나서 설계된 함이라 만재 배수량이 17,000톤에 이르렀고 기골도 튼튼했다.

다만 고속으로 항해하며 함대를 호위해야 하는 볼티모어급의 공급이 우선이었던 데다 항모의 배치가 시급한 상황도 아니었기에 1944년에서야 초도함 건조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 탄생한 경항모가 사이판급(Saipan class)이다. 하지만 종전 후에야 취역이 이루어졌고 대대적인 군축과 더불어 미국의 항모 정책이 정규항모로 단일화되면서 사이판급은 미 해군이 운용한 마지막 경항모로 남게 되었다.

---

특징

사이판급은 전작보다 배수량이 4,000톤 정도 늘어나고 그만큼 비행갑판이 커지면서 함재기를 보다 여유롭게 운용할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급의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내부 공간이 보다 효율적으로 설계되면서 격납고, 탄약고 등의 위치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또한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 오던 방어력, 내파성 등도 개선이 되었고 방어용 대공 화기도 보다 촘촘하게 배치되었다.

사이판급의 19,000톤 만재 배수량은 전쟁 전에 취역한 와스프와 동일한 수준이다. 아무리 와스프가 구형 항모라고 해도 서류상으로 정규항모 취급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이판급의 크기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체가 순양함 기반이어서 함재기 운용 능력은 덩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지는 편이다. 대신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빠른 속도인 최고 33노트로 운항이 가능하다.

---

운용 현황

사이판급은 전작인 인디펜던스급과 비교하면 월등히 성능이 향상된 뛰어난 경항모였으나 단 2척을 끝으로 양산이 종료되었다. 최초 획득 여부를 놓고서 많은 의견이 오갔고 막상 건조가 결정된 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착공이 후 순위로 밀렸던 데다 1944년을 넘어 일선에 대량 공급된 에식스급이 함대 간 대결에 투입되고 그 외 역할은 호위항모들이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경항모는 전시라는 상황 하에서 정규항모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급하게 탄생한 임시 대타였다. 따라서 정규항모가 충분하면 경항모가 필요 없다. 거기에다 취역 직후 본격적인 제트 시대가 도래하며 에식스급도 작다는 소리가 나오자 사이판급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헬기 항모 등으로 짧게 운용되었고 이후 통신함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거대한 전쟁 중에 만들어졌음에도 의미 있는 활약은 남기지 못했다.

---

변형 및 파생형

CVL-48 Saipan

건조 1944년 7월 10일
진수 1945년 7월 8일
취역 1946년 7월 14일
퇴역 1957년 10월 3일

CVL-49 Wright

건조 1944년 8월 21일
진수 1945년 9월 1일
취역 1947년 2월 9일
퇴역 1956년 3월 15일

---

제원

경하 배수량: 14,500톤
만재 배수량: 19,000톤
전장: 208.83m
선폭: 35m
흘수: 8.5m
추진기관: 스팀 터빈(89MW)
              4×프로펠러
속력: 33노트
무장: 42×40mm 보포스 대공포
        16×20mm 쌍열 기관포
함재기: 평균 42기 탑재

---

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