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6.2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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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백과]

M60 기관총의 개발사

냉전시대를 지켜온 미국의 경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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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0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미군 경기관총의 기원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미군은 30-03 구경의 맥심 기관총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삼각대와 탄약, 그리고 냉각수를 제외하고도 총 자체의 무게가 28kg에 이르러 도저히 보병이 휴대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 오치키스 기관총의 설계를 채용한 베넷-머시(Benét-Mercié) 기관총을 M1909 자동소총으로 채용하여 경기관총으로 활용했다. .30-06탄에 30발을 휴대하는 베넷-머시 기관총은 가벼운 무게로 보병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작동이 복잡하고 신뢰성이 높지 않았다.

오치키스 기관총에 바탕한 미 육군의 베넷-머시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대전에 참전을 결정하자,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관총이었다. 미 육군 소령이었던 아이잭 루이스(Issac Newton Lewis)가 새로운 기관총을 1911년부터 선보였지만, 미군은 이를 채용하지 않았다. 루이스 기관총은 오히려 영국 등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편 미군의 참전을 즈음하여 전설의 총기 개발자 존 브라우닝은 2가지 기관총을 내놓았다. 바로 수냉식의 M1917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인 브라우닝 자동소총(BAR, Browning Automatic Rifle)이 그 주인공이었다. 특히 BAR은 군 관계자와 정치인들 앞에서도 시연을 보이면서 호평받았지만, 예산이 없어 처음에 미군은 3정을 구매했을 뿐이었다.
미 해병대는 1차대전 당시 쇼사 기관총을 채용했으나 실전의 신뢰성은 최악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그러나 1차대전으로 미군은 다양한 기관총을 활용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급한대로 M1915 쇼사 기관총을 채용했지만, 역시 주력은 M1917 중기관총이었다. M1917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3개 제작사를 통하여 무려 4,300여 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막상 전선에 지급이 늦어지면서 M1917은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기관총의 해답을 찾지 못한 미군

1차대전 직후 BAR는 M1918A2로 제식 채용되어 분대지원화기로 애용되었다. M1917은 항공기에도 장착할 수 있도록 수냉식에서 공냉식인 M1919 기관총으로 바뀌면서 더욱 간소하게 되었으며, 전차에도 장착되기 시작했다. M1919는 1차대전의 참전 기회는 놓쳤지만, M1919A4 경기관총으로 1935년 미 육군에 채용되어 2차대전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M1919A4는 너무도 크고 무거워서 1인이 운용하는 경기관총으로 분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차대전이 갑자기 시작되자 미군은 신형경기관총 대신 M1919A6을 일선에 지급했다. <출처: Public Domain>
1939년 미 육군 병기국(US Army Ordnance Department)은 새로운 경기관총의 개발을 결정했다. 새로운 경기관총은 중량 10kg 이하에 길이 91.4cm(36 인치) 이하일 것을 요구했으며, 자동과 반자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새로운 기관총은 5분 동안 100발을 5번 연속적으로 사격할 수 있을 것을 요구했다. 병기국의 요구에 따라 5~6개의 신형 기관총이 개발되었지만, 1941년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을 결정하면서 새로운 총기의 개발은 지연되었다. 결국 미군은 기존의 M1919A4를 1인용 경기관총으로 개량한 M1919A6를 개발하여 1943년 실전배치를 결정했다.
MG 34 <출처: Public Domain>
이렇게 미국이 경기관총의 대안을 찾아 헤매는 사이 나치 독일은 MG 34와 MG 42 경기관총을 배치하여 연합국에 비하여 상당한 화력 우위를 확보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와 컴팩트한 프로파일로 보병 1명이 운용하기 쉬웠으며, 총열도 신속교체가 가능하여 안정적인 연발사격이 가능했다. MG 34는 우수한 총기였지만, 절삭방식으로 생산할 뿐만 아니라 격발기구가 복잡하게 만들어져 양산과 정비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개량된 MG42부터는 더욱 경량화되고 간단한 설계를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레스 가공 등을 통하여 양산능력을 향상시켰다. MG 42는 분당 1,200발의 엄청난 연사능력으로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연합군을 압도했다.
독일군의 MG 42는 분당 1,200발의 엄청난 연사능력으로 연합군을 압도했다. <출처: Public Domain>


MG 42와 FG 42의 교훈

미 육군 병기국은 전선에서 입수한 MG 42 기관총을 바탕으로 1943년 2월 처음으로 MG 42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병기국은 신속총열교환방식이나 벨트급탄방식이야말로 경기관총에서 최적의 작동방식이라고 판단하고,미군의 30 구경 M2 탄환을 발사하도록  MG 42 기관총을 개조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의 새기노 조향기어 생산부서(Saginaw Steering Gear Division)가 MG 42 2정을 개량하여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개량된 기관총은 T24로 불렸으며, 1943년 10월부터 애버딘 시험평가장에서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MG 42를 미군 .30-06 탄환용으로 개조한 T24 시제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그러나 T24의 시험평가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탄환이 바뀌면서 총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개발자들이 수정을 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명백했다. 애초의 시험절차에 따라 100발 탄띠의 발사를 마쳤지만 2~3발의 점사를 연속하는 방식으로 겨우 시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시험은 중단되었는데, 모두 1,583발을 발사한 가운데 무려 51번의 작동불량이 기록되었다. 미군의 30-06탄은 독일의 7.92mm탄에 비하여 탄피가 너무 길어 탄피배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일부 부품도 새로운 탄에 맞게 개량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결국 T24 개발계획은 중단되었다.
FG 42로 사격중인 팔슈름예거 부대원 <출처: Public Domain>
한편 MG 42 이외에도 독일의 공수부대 팔슈룸예거가 사용하던 FG 42 기관총 또한 미군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FG 42는 가스직결방식에 독특하게도 총기의 왼편에 탄창을 삽입하는 방식을 채용했다. 독일이 단기간내에 FG 42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M1941 존슨 기관총이나 루이스 기관총의 영향이었으나, FG 42는 기존의 총기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 육군 병기국의 연구개발책임자였던 스터들러(René R. Studler) 대령은 1946년 미국이 전쟁 중에 노획했던 FG 42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3정을 골라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FG 42의 우수한 성능을 확인한 스터들러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기관총을 개발할 것을 결정했다.
경기관총과 자동소총의 경계선에서 존재하던 FG 42 <출처: Public Domain>


T44 시제기관총의 등장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지상군 장비위원회의 덕분이었다. 미 육군은 1945년 지상군 장비 위원회를 구성하여 전후  무기체계의 개발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점검하였다. 점검대상에는 기관총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위원회는 미래의 기관총은 중량 9kg을 한계로 분당 600~1,200발의 연사율에 유효사거리는 1,000야드(914m)에 이르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요구조건에 맞는 총기를 찾는 과정에서 스터들러의 연구팀이 찾아낸 것이 FG 42였다.

BAR를 분대지원화기로 운용하던 미군은 미래에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경기관총이 필요했다. <출처: Public Domain>
스터들러의 결단에 따라 FG 42은 새로운 기관총의 원형이 되었지만, 20발 탄창 급탄방식을 그대로 채용할 수는 없었다. 병기국은 MG 42의 벨트 급탄방식을 채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FG 42와 MG 42에 바탕한 새로운 기관총의 개발이 결정되었다. 병기국은 1946년 6월 브릿지 툴 & 다이 웍스의 개발부서에 FG 42의 개량을 의뢰했으며, 이에 따라 T44 경기관총이 개발되었다. T24의 악몽을 기억하던 병기국은 탄종을 미군의 30-06탄으로 바꾸는 대신 7.92mm 마우저탄을 그대로 사용했다. T44의 개발은 성공적이어서 기존의 총기처럼 견착사격이 가능했으며 연사시에도 송탄불량이 거의 없이 안정적인 성능을 자랑했다.
T44 시제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한편 1946년 전쟁부(War Department, 국방부의 전신)에서도 장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후 미래의 무기체계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했다. 목표는 미래의 적에 대하여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장비위원회는 1946년 5월 지상군 장비위원회보다 더욱 높은 사양의 기관총을 요구했다. 최대 사거리는 1,800야드(약 1.6km)로 늘어났으며, 신속교체형 총열, 분리형 급탄기구, 소염기, 양각대와 삼각대 등을 추가하도록 했고, 실전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경량화를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T44의 성능은 더욱 개량될 필요가 있었다.
T44의 좌측에 장착된 급탄장치 <출처: Public Domain>


T52 시제기관총으로 진화

T44의 후속개량작업은 역시 브릿지 툴&다이 웍스에서 담당했다. 새로운 총기는 T52로 불렸다. T52에서는 급탄이 좌측으로 이뤄지던 T44를 개량하여 상부로 급탄방식을 바꿨으며, 노리쇠가 아니라 가스활대에 러그를 장착하여 급탄하도록 했다. 또한 총열을 신속히 교체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잠금장치는 총몸이 아니라 총열에 장착되었다. 사용탄환은 T65E1(추후 NATO 7.62x51mm)로 T55 링크로 연결되었는데, T55 링크는 독일의 MG 42에서 사용된 링크를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T52는 병기국의 요구를 충족했지만 실전에 충분한 것은 아니어서 추가적인 개량형들이 제작되었다.


T52(위)와 T52E1(아래) 시제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개량형인 T52E1은 가스작동방식이 개량되었는데, 발사시 추진가스가 가스활대를 밀어낼 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가스는 총열 아래 앞부분에 위치한 가스실린더로 들어가 작은 배출구로 빠져나감으로써 적정한 압력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가스실린더는 쉽게 오염될 수 있으므로, 총열뭉치와 일체로 하여 동시에 교환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잠금장치는 다시 총몸으로 바뀌었으며 노리쇠를 후퇴상태로 두면 잠금이 풀리도록 고안되었는데, 이 설계는 이후의 개량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T52E3(위)와 T52E4(아래) 시제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그러나 시험평가에서 T52E1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개량형인 T52E2가 1950년 5월에 제작되었다. T52E2는 작동방식이 가스직결식으로 바뀌어 FG 42와 유사한 구조로 바뀌었으며, 방아쇠 기구 등 여러가지 측면이 FG 42와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T52E2도 역시 충분한 성능이 확보되지 못함에 따라 1953년 초에는 T52E3가 개발되었다. T52E3는 또다시 가스작동식으로 환원됐으며, 강화총열을 채용하였다. 총열의 결합부는 엄청난 압력을 버틸 수 있도록 스텔라이트 재질이 채용되었고, 총강은 크롬도금이 적용되었다. 또한 쉽게 총열을 교체할 수 있도록 총열에 손잡이를 장착했다. 1953년 여름 시험평가를 마친 T52E3는 문제점을 보완하여 T52E4로 또다시 개량되었다.


또 다른 보험, T161의 등장

T52가 치열하게 개발되는 사이 미 국방부는 T52 기관총의 예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 국방부 장비위원회는 1950년 12월 육군 장비개발지침서를 발간하면서 추후 개발될 무기체계의 지침을 수립하였다.  지침에 따르면 신형 .30구경탄(추후 7.62mm NATO탄)을 기반으로 소총과 기관총을 개발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또한 신형 경기관총은 내구성과 신뢰성, 정확성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작동이 용이하며 마운트를 포함해도 전체중량이 25파운드(11.3 kg)를 넘지 않도록 권고했다. 이에 따라 신형 경기관총의 개발사업을 가속하기 위하여 육군은 제너럴 모터스(GMC)의 인랜드 제작부서(Inland Manufacturing Division)와 별도의 경기관총 개발계약을 체결하였다.

T161 시제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인랜드는 T52와 유사한 사양으로 T161 시제 기관총을 개발하였다. T161은 대량생산에 집중하여 개발되었으며 T52의 취약점을 보완하는데 집중하였다. T161은 T52E1과 마찬가지로 가스팽창시스템을 채용하였으며, 가스활대와 노리쇠 뭉치가 접합하는 부분에는 롤러를 채용하여 마찰을 줄였다. 또한 T161은 알루미늄 방열판을 채용하고 플라스틱 소재를 적극 채용하는 등 T52와는 얼핏 유사하지만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T52 기관총의 부품구성 <출처: Public Domain>
T161은 T52와 동시에 개발되면서 개량을 거듭했다. 1952년 초에는 개량형인 T161E1이 개발되었으나 급탄기구의 문제로 인하여 또다른 개량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피드커버를 개선한 T161E2가 개발되었는데, 이번에는 작동방식까지 개선되어 쇼트 스트로크 가스피스톤 방식이 채용되었다. T161E2는 1953년 1월부터 시험평가를 실시하였으며, 새로운 작동방식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자 이제 T161은 T52와 직접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T161는 뒤늦게 개발되었지만 T52의 시행착오를 반영하면서 차분히 발전되어갔다. <출처: Public Domain>


치열한 경쟁의 결과

1954년 미국의 T65E5 탄환이 NATO의 표준 7.62mm 탄환으로 선정되자, T161과 T52는 차기 경기관총의 자리를 두고 본격적으로 경쟁에 돌입하였다. 1955년 1월 T161E2 3정과 T52E4 2정이 혹한기 시험평가에 투입되었다. 시험평가 결과 T161E2는 별다른 문제 없이 통과했으나, T52E4는 급탄기구의 문제로 인하여 모든 기준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T161E2는 상당한 내구성을 자랑했는데, 시제총기 중 한 정은 겨우 2개의 총열로 25,000발의 발사시험을 견디어냈다. 특히 이 총기는 각 총열로 100발씩 10분 간격으로 발사를 거듭하여, 4시간을 연속으로 사격을 실시했다.

인랜드의 최종 개량형인 T161E3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물론 T161E2에서도 문제가 존재하여, 탄매가 쌓이면 작동이 불가능했으며, 공이가 부러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또한 가스활대에 장착된 전방 롤러도 쉽게 파손되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무게를 추가로 감소시킬 필요성도 제기됨에 따라 T161E3가 개발되었다. 1955년 동안 T161E2 20정이 E3 사양으로 개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100정이 제작되었다. 한편 T52E4도 E5사양으로 개조되어 새로운 급탄기구를 채용하면서 신뢰성을 높이고자 했다. T52E5가 신형 T89 탄띠 링크를 채용함에 따라 T161E3도 역시 T89 링크를 채용하게 되었다.
지리멸렬한 시험평가 끝에 T161E3는 1957년 M60 기관총으로 채용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1955년 말 드디어 애버딘 시험평가장에서 T161E3의 시험평가가 시작되었다. 수개월간 지속된 실험에서 T161E3는 비교대상인 기존의 경기관총들을 압도했다. 개수된 T52E5도 T161E3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1956년 육군의 시험평가 위원회는 T161E3를 차기 경기관총으로 추천했다. 제식채용을 위한 일부 개선사안들이 제시됨에 따라 제작사인 인랜드 디비전은 악세사리를 포함하면서 납품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결국 1957년 2월 미군은 T161E3를 M60 기관총으로 제식채용하였다. 이와 함께 시험용 삼각대인 T178E2는 M91로, T89  탄띠 링크는 M13 링크로 제식채용되었다.
M60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M60의 활약

M60이 일선에 배치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미군은 소화기 전체를 교체 중에 있었다. M14 소총과 M79 유탄발사기 등이 도입되고 있었기에 M60 기관총은 예산의 우선순위를 놓고 이들과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M60의 시험 양산은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시작되어, 초도 생산분 10정이 1958년 12월까지 생산되었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이듬해 9월까지 월간 500정을 생산하게 되었는데, 비록 납기는 지연되었으나 할당된 물량의 생산은 마쳤다.

M60은 101 공수사단부터 배치되면서 일선의 평가를 바탕으로 개량해나갔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초도 생산분들은 미 해병대와 육군 101 공수사단에 시험평가를 위해 보내졌다. 일선에서 평가가 높아지면서, 공수부대뿐만 아니라 공중강습부대 등에서 헬기용 기총으로 M60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초도분의 일선운용결과에 바탕하여 1962년 10월부터 개량형이 개발되어 이듬해 7월까지 25정이 만들어졌으며 개량형 M60은 3천 정이 요구되었다. 이 개량형은 총열과 결합되었던 가스실린더와 양각대를 총몸으로 옮기고 총열에 운반손잡이를 장착했다. M60E1으로 불렸던 이 개량형은 결국 양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M60은 베트남전에서 뛰어난 실전기록을 과시하면서 미군의 기관총으로 자리잡았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M60은 이후 베트남전에 투입되면서 맹활약을 했다. 거대한 크기와 무게로 인하여 M60은 병사들 사이에서 '피그(Pig, 돼지)'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1970년대까지 M60은 분대기관총으로 강력한 화력을 제공했지만, M249 분대지원화기의 등장과 함께 점차 M60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차량탑재용 기관총으로서 M60은 널리 활용되었다. 한편 M60의 역할 축소를 우려한 미 해병대는 개량형 M60E3를 도입했다. 해군 특수부대 SEAL팀에서는 M60E4를 Mk 43 Mod 0로 도입하기도 했다.
M60은 E3형이 해병대에 채용되기도 했으나 90년대 중반 중기관총 사업에서 패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출처: Public Domain>
한편 미 육군이 1994년 중기관총 개선사업을 시작하면서 7.62mm 기관총의 개선책을 찾기 시작하면서 M60은 또다른 기회를 맞이하는 듯 했다. M60의 제작사인 사코 디펜스는 M60E3를 제안했지만, FN USA의 M240과 경쟁에서 참패를 맞이했다. M240이 2,962 MRBS(작동불량간 발사탄환)과 6,442 MRBF(고장간 발사탄환)을 기록하는 사이 M60E3는 846 MRBS와 1,669 MRBF를 기록했다. 결국 미 육군이 M240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M60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자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다. 현재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신안산대 경호경찰행정학과의 겸임교수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본 연재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