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6.2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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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B-70 발키리 초음속 전략폭격기

잘못된 시기에 잘못 탄생한 비운의 도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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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B-70 발키리 <출처: 미 공군>
잘못된 시기에 탄생한 비운의 도전작 XB-70 '발키리' 초음속 전략폭격기


개발의 역사

핵 전쟁의 공포가 촉발한 초음속 핵추진 항공기 연구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결은 1950년에 벌어진 6·25 전쟁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고, 특히 1949년 8월 29일에 소련이 비밀리에 첫 핵 실험을 실시함에 따라 사실상 미-소 간의 핵 경쟁 시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양 진영의 대결 구도는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전 세계는 2차 세계대전 말 미국이 나가사키(長崎)와 히로시마(広島)에 투하한 ‘팻맨(Fat Man)’과 ‘리틀보이(Little Boy)’의 가공할 위력을 목격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대한 핵 공격의 공포에 시달리게 됐다. 이에 미국은 랜드(RAND) 연구소와 보잉(Boeing)이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MX-2145 유인 부스트-활공(Boost-glide)식 폭격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54년 1월부터 당시 개발 중인 다양한 핵무기를 투발할 수 있는 폭격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냉전 초 미국은 폭격기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핵폭격기의 개발에 나섰으며, 부스트활강식 폭격기가 개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출처: Public Domain>

초창기 핵무기의 문제는 소형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중량이 많이 나갔기 때문에 미국-소련처럼 대륙을 넘어 투발하기 위해서는 탑재 중량이 넉넉하고 연료도 많이 실을 수 있는 대형 폭격기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또한 투발 후 폭격기 자체가 핵폭발로 야기되는 방사능에 말려들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초음속 비행 능력 또한 필수였다. 항공 산업계는 일찍이 이러한 문제들을 인지해 1940년대부터 관련 기술을 연구해오고 있었으며, 특히 원자력 추진 방식의 장거리 폭격기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핵을 항공기 동력으로 사용한다면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열을 동력으로 삼되, 이륙 시나 순간적인 고속 비행 때에만 제트연료를 사용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붕소(硼素: boron)를 농축한 고(高) 에너지 연료를 활용하는 방식도 연구되었다. 붕소를 사용하면 연료 밀도를 일반 항공기에 비해 40% 이상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존 항공기의 제트 엔진을 개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 공군은 당시 전략폭격기로 운용하고 있던 콘베어(Convair) B-36에 원자력 엔진을 설치한 NB-36H를 다섯 대 제작했으며, 이를 X-6 사업으로 분리하여 공중에서 수 주 이상 떠 있을 수 있는 전략 폭격기 개발을 진행했으나 실용성과 효용성 문제로 사업을 중단했고, 소련 쪽 역시 비슷한 원자력 추진 개념의 항공기인 Tu-119 한 대를 제작했으나 제작 비용과 추락 시에 야기될 방사능 피해 문제로 양산화 및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적의 심장에 핵을 꽂기 위한 시도 – 초음속 장거리 핵 폭격기의 개발

각계의 연구 개발 상황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 온 미 공군은 1955년 일반 운용 요구도(General Operational Requirement) 제38호를 발행하면서 신형 폭격기 요구도를 수립했으며, 여기에는 대륙 간 비행이 가능한 B-52의 항속 거리와 넉넉한 탑재 중량, 그리고 콘베어 B-58 허슬러(Hustler)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최고 속도인 마하 2를 결합시켰다. 미 공군은 신형 폭격기의 실전 배치를 1963년으로 잡았으며, 핵추진을 염두에 둔 방안은 “무기체계(Weapon System) 125A”로, 통상적인 제트추진 설계 안은 “무기체계 110A”로 명명했다. 미 공군 항공연구개발사령부(ARDC: Air Research and Development Command)는 제트추진형인 WS-110A의 요구도에 ‘화학 연료’를 사용하여 순항 속도만 마하 0.9로 비행하고, 1,900km 거리를 비행한 후에는 ‘가능한 최고 속도로’ 목표물에 폭격을 가한 후 해당 공역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체로 개념을 잡았다. ARDC는 해당 기체의 전투 반경도 7,400km, 탑재 중량은 무려 23,000kg로 요구했으며, WS-110A와 병행 진행한 초음속 대륙간 정찰기 형상인 WS-110L에도 유사한 요구도를 포함시켰다.

WS-110A의 설계안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WS-110L은 SR-71 초음속 정찰기가 개발됨에 따라 1958년 부로 사업을 취소해버렸다. 미 공군은 이렇게 수립된 요구도를 토대로 정보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와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를 발행했으며, 이에 총 6개 업체가 응신하면서 입찰이 시작되었다. 미 공군은 그중 보잉(Boeing)과 노스 아메리칸 항공(NAA: North American Aviation/1967년 록웰 인터내셔널에 합병됐다가 1996년 보잉에 흡수)을 1단계 개발 업체로 압축한 후 1955년 11월 8일 자로 계약했다. 이들 업체는 1956년 중반에 고에너지 연료인 집(zip) 연료를 사용하는 초기 설계안을 제출했다. 두 업체의 설계는 모두 날개 끝에 대형 연료 탱크를 달고 있었으므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이 연료를 사용하고, 목표 근처에 가면 탱크를 분리해버린 후 초음속으로 목표를 공격한 뒤 이탈하는 개념으로 개발했다. 양사의 설계는 모두 날개 끝단까지 분리해버릴 수 있게끔 설계했는데, 이는 장거리 비행에는 긴 날개가 유리하나 순간적인 고속 비행에는 짧은 날개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두 설계 모두 날개 끝을 분리하고 나면 주익 형상이 마름모꼴이 된다는 특징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마름모꼴형 주익이 가장 고속 비행에 적합한 날개 형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사의 설계 모두 최대 이륙 중량이 340,000kg에 달하는 데다 동체 자체가 매우 컸기 때문에 미 공군은 실제 운용에 적합한 기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 SAC) 사령관으로 훗날 최연소 공군참모총장이 된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 1906~1990) 대장은 두 설계를 놓고 “이게 어디를 봐서 항공기인가, 세 척의 배를 붙여놓은 거지”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어쨌든 미 공군은 1단계 개발 사업을 1956년 10월 자로 종료했으며, 보잉과 노스 아메리칸 모두 다음 단계 연구 개발까지 계속 진행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본격적인 초음속 ‘순항’ 장거리 폭격기의 개발과 ‘발키리(Valkyrie)’의 등장

하지만 2단계로 사업이 진행하면서 마름모꼴 날개 대신 삼각익 날개가 초음속 비행에 더 안정적이라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마름모꼴 날개나 가변익(可變翼) 개념은 모두 도태됐다. 다음 단계의 문제는 엔진이었는데, 특히 고속으로 대륙 간 비행을 할 경우 고온을 견딜 수 있어야 했고, 공기 흡입도 원활하게 되도록 설계해야만 장시간 초음속 비행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시간 동안 일정한 초음속 속도로 비행을 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이를 위한 개발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엔진을 고속 비행에 맞춰 개발할 경우, 연료 소모량은 아음속으로 비행할 때보다 두 배 이상 높은 반면, 속도 자체는 통상 비행 속도의 네 배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연료 대비 거리를 계산한 경제 순항 속도를 뽑자면 결국 ‘최고 속도’가 가장 경제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는 기존에 공군이 생각했던 전략을 수정하게 하는 요소로, 기존에는 해당 기체가 적당한 초음속 속도로 비행해 목표에 다가간 후, 순간적인 최고 속도로 폭격을 하고 빠져나오는 것을 개념으로 잡았지만, 항상 최고 속도로 비행하는 것이 경제적이기 때문에 ‘순간적인 최고 속도’ 비행 없이 일정하게 최고 속도로 비행하면 됐기 때문이다. 이는 1957년 3월 자로 풍동(風洞) 시험에 돌입하면서 실현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WS-110A는 이륙 후 마하 3에 도달하면 꾸준히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체 설계를 변경하게 됐다. 집 연료는 항속 거리 증가를 위해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확정했으며, 보잉/노스 아메리칸 모두 뾰족하고 긴 동체에 대형 삼각익을 단 설계로 변경해왔다. 하지만 보잉은 날개 아래 파일런(pylon) 쪽에 엔진을 하나씩 장착한 개념인 반면, 노스 아메리칸은 여섯 개의 엔진을 반원형으로 구성해 동체 뒤쪽에 설치하는 설계안을 제출했다. 날개 설계에 있어서도 노스 아메리칸 사는 고속이 되면 날개 끝단이 아래쪽으로 살짝 접히게끔 설계했다. 이는 기체가 음속을 돌파하는 순간 발생하는 충격파의 동체 아래 흐름을 가둬 놓기 위한 조치였으며, 동시에 수직 비행 면을 늘려 고속 비행 간 기체의 방향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설계에서 지적된 문제 중 하나는 고속 비행으로 야기되는 기체 외피의 마찰이었다. 마하 3으로 비행을 실시하면 통상적으로 기체는 평균 230도까지 온도가 올라갔고, 날개 접합부의 리딩 에지(Leading edge)는 330도, 엔진실 부분은 540도까지도 상승했다. 이에 노스 아메리칸은 외피에 샌드위치 패널(sandwich panel) 방식을 적용하고, 각 패널은 얇은 스테인리스스틸을 놓은 후 그 사이에 벌집(허니콤, honeycomb)형 구조물을 채워 넣는 방식을 제시했다. 또한 리딩 에지나 수평 보조날개, 기수(機首)처럼 고열을 받게 되는 부분에는 고가의 재료인 티타늄을 쓰기로 했으며, 기내 온도를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엔진으로 가는 연료는 열 교환기를 거쳐 가게끔 설계했다. 

노스아메리칸의 WS-110L 최종설계안으로 결국 B-70이 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미 공군은 1957년 8월 30일 자로 노스 아메리칸과 보잉 양사가 정식 입찰을 실시할 조건이 충족됐다고 판단했으며, 요구도를 발행하면서 순항 속도 마하 3.0~3.2, 표적 고도 21,000~23,000m, 항속 거리 16,900km, 총 중량 220,000kg 이하를 명시했다. 미 공군은 양사의 제안을 받은 후 4개월 간 평가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12월 23일 자로 노스 아메리칸사의 제안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1958년 1월 24일에 계약을 체결했다. 미 공군은 해당 기체의 제식 번호로 B-70을 지정했으며, 처음 시험개발용으로 제작하는 기체에 대해서만 “시험기”를 의미하는 X(eXperimental)를 병기해 XB-70으로 지정했다. 미 공군은 1958년 초부터 해당 기체의 별칭을 일반 공모로 모집했으며, 그중 북유럽 신화에서 전투 중 사망한 전사들을 신들의 낙원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발키리(Valkyrie)’의 이름을 기체명으로 선택했다. 미 공군은 최초 1958년 3월에 XB-70 사업을 총 18개월 안에 끝나는 사업으로 속도를 올리고자 했으나 1961년 12월에 초도 비행 일자를 재조정했고, 1958년 말에는 예산 부족 문제로 18개월 진행 계획은 폐기했다. 미 공군은 1958년 12월에 사업 2단계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때 처음으로 기체에 공대지 미사일 및 외장 탱크 장착을 요구도에 추가했다. 노스 아메리칸사는 당시 개발 중이던 초음속 요격기인 F-108 레이피어(Rapier)와 XB-70의 엔진, 사출캡슐 및 일부 항전장비류를 공유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개발 비용을 줄였으며, XB-70의 첫 설계 안은 1960년 초 일반에 공개됐다.

U-2기 격추 사건과 시대의 변화가 야기한 XB-70 사업의 위기

이런 상황에서 1960년 5월 1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고고도 정찰기인 U-2 드래건레이디(Dragon Lady)가 소련 영내에서 촬영을 하던 중 소련 측에 격추당해 조종사인 개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 1929~1977) 대위가 생포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당시 사건은 고고도에서 비행하던 정찰기가 미사일로 격추당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으며, 미군은 이로 인해 그간 고고도 초음속 폭격에 집중하던 교리를 저고도 돌파 쪽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고도에서 비행하는 것보다 지상에 가깝게 비행할 경우 비행 거리가 단축되고, 무엇보다 지형지물과 비슷한 레이더 수평선 아래로 날아 레이더망의 탐지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는 아직 전투기 레이더가 하방탐지/하방공격(Look down/shoot down) 능력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상공에서 아래로 레이더파를 조사하더라도 전파를 읽어낼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XB-70 계획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여기에 1959년 부로 집 연료 개발까지 취소되었기 때문에 사업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고 에너지 연료인 JP-6 등이 등장하여 집 연료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어쨌든 집 연료를 JP-6로 대체하면 같은 양의 연료로는 항속 거리가 짧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내부 무장창 두 개 중 하나를 연료 탱크로 변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F-108 레이피어 사업까지 1959년 9월부로 취소된 것도 XB-70의 상황에 악재가 되었다. 그간 공용 구성품 개발을 통해 발키리의 개발 비용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순전히 XB-70용으로만 엔진, 사출캡슐 등을 개발하게 됐기 때문이다.

XB-70의 롤아웃 행사 모습 <출처: 미 공군>
사실 XB-70의 개발이 타당한가의 여부는 이미 1959년부터 미군 또한 자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다. 이미 U-2기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도 유인형 전략 폭격기로 소련을 직접 폭격하는 방식은 소련의 방공망 때문에 항공기가 임무 수행 후 소련 영공에서 살아나올 가능성이 지나치게 낮다는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1959년 11월 16일, 미 합동참모본부 회의에서 당시 합참의장인 네이선 트와이닝(Nathan Farragut Twining, 1897~1982) 대장은 XB-70 사업을 중지하고 예산을 정찰기 개발과 ICBM 사업으로 전용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공군참모총장인 토머스 와이트(Thomas Dresser White, 1901~1965) 대장은 소련이 로켓으로 B-70을 격추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인정했으며, 차라리 B-70 사업을 연구개발 사업으로 전환하여 종료시키고 양산은 들어가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에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까지 기존의 XB-70은 이미 고정되어 있고 위치가 알려진 시설을 핵으로 때리는 용도이므로 굳이 폭격기를 개발할 것이 아니라 비용이 싼 ICBM 등으로 때려도 충분하지 않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미 공군은 1959년에 단 한 대의 XB-70 시제기만 제작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렀으며, 향후 기체의 양산도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져 있었다.
대선후보였던 케네디가 공화당 정권의 안보태세를 지적하자 B-70 계획은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다. <출처: Public Domain>

여기서 1960년 대통령 선거가 XB-70 계획에 쟁점으로 부각됐다. 당시 소장파 정치가로 등장하여 대선 후보까지 급부상한 민주당의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 후보는 현 공화당 정권이 안보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기술 개발에도 소홀하기 때문에 소련과의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케네디 후보는 샌디에이고(San Diego) 지역 노스 아메리칸사 본사 인근에서 유세를 하며 “저는 진심으로 B-70 유인폭격기 계획을 지지합니다”라고 연설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결국 XB-70의 무장 개발 및 양산까지 진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1960년 8월 자로 XB-70 한 대와 YB-70 11대 개발 계약을 체결하고 2억 6,500만 달러가 의회 예산에서 XB-70 사업으로 할당됐다. 마찬가지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1994) 대통령 후보 진영 역시 B-70 계획을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닉슨을 지원하기 위해 XB-70의 존재를 일찍 일반에 공표하기로 했다.

발키리, 결국 천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칼을 내려놓다

하지만 1961년 1월, 정작 닉슨을 물리치고 백악관에 입성한 케네디는 XB-70 사업에 8억 달러(현재 가치로 약 67억 달러)를 투입했음을 보고받은 후 입장을 바꿨다. 케네디는 ‘적진을 돌파하여 폭격을 가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진행한 불필요하면서도 불공정한 사업’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1961년 7월, 커티스 르메이 대장이 공군참모총장으로 보직되면서 다방면에서 B-70 사업을 지원했으며, 결국 언론까지 이용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미 의회 역시 예산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2009) 국방장관이 1962년 1월 24일 자로 하원 군사분과위원회에 출석하여 B-70 계획이 얼마나 불공평하게 예산이 투입된 사업인지 증언했다. 이후 XB-70 사업은 맥나마라와 르메이의 대결로 비화하면서 정치 문제가 되어버렸고, B-70 개발 시설을 지역구로 둔 의원을 21명이나 포함하고 있던 하원 군사분과위원회의 지원을 업은 르메이 장군은 강력하게 역공을 실시하면서 B-70 사업에 5억 달러(현재 가치 41억 달러)를 투입해 RS-70 초음속 정찰기 개발로 변경하자는 내용의 고급 전략유인항공기(ASMA: Advanced Strategic Manned Aircraft) 사업 안을 밀어붙였다. 에드거 퍼이어(Edgar F. Puryear Jr.)가 장성들의 증언을 모아 낸 <명장의 코드(American Generalship)>에 따르면, 이 사업명은 실무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존스(David Charles Jones, 1921~2013) 준장이 제지하여 ‘고급전략유인항공기(ASMA)’ 사업에서 ‘고급유인전략항공기(AMSA)’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ASMA라는 약어가 천식을 뜻하는 asthma와 발음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결은 1962년 3월 19일, 케네디 대통령과 하원 군사분과위원회 의장 칼 빈슨(Carl Vinson, 1883~1981) 의원이 단둘이서 백악관 로즈 가든(Rose Garden)에서 담판을 지으면서 사실상 취소 수순을 밟는 대신 민간 사업으로 전환되었다.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미 공군 연방 박물관 야외에 주기 중인 XB-70. <출처: 미 공군>
XB-70은 로즈 가든 협상 결과에 따라 미 정부가 관심을 갖고 있던 민간 분야 사업인 고급 항공역학 및 추진체 연구 사업 및 초음속 수송기 사업에 투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3대의 시제기 개발이 결정되어 1961년 3월부터 조립이 시작되었다. 1번기인 AV-1은 1964년 9월 21일, 캘리포니아 주 팜데일(Plamdale, CA)의 미 공군 제42번 공장에서 5,000명의 노스 아메리칸사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해당 기체의 시험 비행 조종사로는 노스 아메리칸의 시험 비행 조종사인 앨빈 화이트(Alvin White)와 미 공군 소속 조세프 코튼(Joseph Cotton) 소령이 임명되었으며, 출고식에 참석한 한 기자는 발키리의 거대한 모습과 백조 같은 외양에 압도되어 “그간 이런 항공기는 어디에도 없었다"라고 묘사했다. 2번기인 AV-2는 1964년 10월 15일에 출고되었으며, 3번기는 완성을 앞둔 1964년 7월에 사업 전체가 취소되어 영영 완성되지 못했다. ‘발키리’는 비록 최초 예정했던 대로의 초음속 장거리 폭격기나 원자력 추진 항공기가 되지는 못했으나, 이후에도 NASA에 소속되어 민간 분야에서 항공사(史)에 한 획을 그었다. 어떤 의미에서 XB-70은 당시 기준에서는 기술적으로 환상의 항공기에 가까웠으나, 잘못된 시기에 잘못 탄생한 항공기였을지도 모른다.
XB-70의 마하 3 시험 비행 테스트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특징
활주로에 주기 중인 XB-70 1번기. 발키리의 주익은 끝단 1/3 부분이 아래로 접히게 설계된 독특한 형태였다. <출처: NASA>
XB-70 ‘발키리’는 고도 21,000m에서 마하 3으로 비행이 가능하도록 제작한 초음속 장거리 폭격기였으며, 최초 항공기의 개발 자체는 고고도 및 고(高)고속 유인 전략폭격기 용도였지만 실제 발키리가 항공사에 남긴 족적은 원래의 설계 목적과는 사뭇 달랐다. XB-70의 설계는 노스 아메리칸사의 항공 엔지니어로 훗날 아폴로(Apollo) 달 착륙 프로젝트 때 지휘/서비스 모듈(module) 설계자로 유명한 해리슨 스톰즈(Harrison Allen Storms, Jr. 1915~1992)가 맡았으며, 그의 지휘 하에서 카나드(canard: 귀날개), 삼각익, 스테인리스스틸 구조, 샌드위치 벌집 구조 패널, 티타늄으로 특정 지어지는 “발키리”의 특징이 잡혔다. 특히 XB-70에는 관성항법체계를 비롯한 초음속 대륙간 탄도 순항 미사일인 SM-64 나바호(Nabaho) 미사일의 기술이 많이 녹아있는데, 이는 미국에서 쏴 올린 핵미사일이 고도 18,000m에서 평균 시속 마하 3으로 날아 소련까지 도달한다는 기본적인 목적에서 발키리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바호 미사일이나 XB-70 발키리 모두 양산이나 실전 배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또한 부정적인 의미에서 동일한 점이기도 하다.
이륙 중인 XB-70의 모습. 최대 이륙 중량이 무거운 기체인데다 마하 3으로 비행하는 초음속 항공기였기 때문에 특히 랜딩기어가 튼튼하게 설계됐다. <출처: NASA>
마하 3을 달성하기 위해 XB-70은 자기 자신이 일으키는 초음속 충격파를 “올라타” 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때문에 비행 안정성을 목적으로 하여 넓은 삼각익과 평면으로 넓은 동체를 갖췄으며, 고속 추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트엔진 또한 여섯 기를 장착했다. 또한 주익이 일부 접히도록 설계한 것도 XB-70의 특징인데, 이착륙 간이나 아음속 비행 때에는 날개가 평면으로 펼쳐져 있어 통상적인 삼각익 모습을 유지하나 초음속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날개 끝단이 아래로 처지게 되어 공기 흐름을 끌어안는 듯한 모습이 되도록 설계됐다. 이는 기체 안으로 흐르는 음속 충격파를 윙팁(wingtip)이 감싸 안도록 하여 항력을 낮추도록 한 것이며, 날개 끝이 꺾이고 난 뒤에는 기체 중심 뒤의 면적을 줄이게 됨에 따라 날개 끝에서 발생하는 트림 항력(trim drag)을 낮춘다. 또한 날개를 꺾으면 날개 끝이 수직이 됨에 따라 항공기의 수직면이 늘어나 음속 비행 간 방향 안정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조종석 바로 뒤에는 대형 카나드 두 장이 붙어있어 비행 통제면의 역할을 수행한다. XB-70의 주익은 끝단 약 1/3가량이 최대 65도가량 아래 방향으로 꺾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활주로 가운데에 주기 중인 XB-70. 발키리의 주익은 끝단에서 1/3가량이 초음속 돌파와 함께 아래 방향으로 꺾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는 음속 돌파 시에 발생하는 충격파를 동체 아래에 가두어 놓기 위한 방편이었다. <출처: 미 공군/Will Haas>
XB-70에는 여타 초음속 순항 삼각익 항공기에서 많이 보이는 드루프 노즈(droop-nose)가 채택되어 착륙 간 기수를 아래 방향으로 꺾을 수 있다. 이는 이륙이나 착륙 시 기수가 조종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을 막기 위한 설계로, 콩코드(Concorde) 여객기나 소련 투폴레프(Tupolev)의 Tu-144 초음속 항공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설계이다. XB-70은 기수 일부가 고정된 하부 쪽으로 내려가도록 설계했으며, 양산이 실시될 경우 기수 하부에는 레이더를 넣고 상부에는 공중급유 파이프를 장착할 예정이었다. XB-70은 마하 3의 비행 후 최대 이륙 중량 24만kg가 넘는 동체를 착륙시켜야 했으므로 랜딩기어도 특수하게 제작되었다. 발키리의 랜딩기어는 총 무게 5.4톤, 타이어 무게만 1.8톤에 달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아 착륙하는 XB-70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후방에 설치된 랜딩기어 두 개는 각각 4개의 바퀴가, 기수 쪽의 랜딩기어에는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론적으로 XB-70은 최대 시속 61km/h로 달리는 중형 세단 자동차 800대가 정지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발키리에 장착된 GE사의 YJ-93-GE-3 엔진.
미 항공우주국(NASA)로 사업이 이관된 후 비행 준비 중인 XB-70 시제기 1번기. 독특한 사각형 동체 후미에 6개의 엔진이 장착된 것이 보인다. <출처: NASA>
발키리에는 6기의 GE YJ-93-GE-3 터보제트(turbo jet)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이는 고열량을 발생시키는 특수 항공유인 JP-6를 사용했다. JP-6는 열량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자연 발화를 막을 목적으로 연료 급유 시 액체 질소를 함께 충전해 연료 탱크의 빈틈을 채우고 연료 탱크의 압력을 일정량으로 유지하게 했으며, 기체 내부 열 안정을 위해 연료가 탱크에서 엔진으로 도달하기 전 열 교환기를 한 번 거치게 하여 일정 온도를 유지했다. 주 엔진이 고열량의 연료를 사용해 거대한 출력을 내게 한 것은 XB-70이 대륙간 비행을 해야 했던 점도 고려됐으나 기체 자체가 워낙 무거운 기체인 점도 작용한 것으로, YJ-93-GE-3 엔진은 고도 21,000m에서 마하 3으로 비행할 시 추력 대비 중량 5:1을 달성했으며, 최대 출력은 애프터버너 사용 시 28,000파운드(120kN), 사용하지 않을 시 19,900파운드(89kN)에 달했다. 발키리에는 YJ-93-GE-3엔진이 뿜어내는 316도의 열을 전용시켜 동체의 서리 제거나 빗물 제거용으로 사용했다. XB-70의 중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던 데에는 아직 고급 카본 섬유 복합재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열을 견딜 소재가 스테인리스스틸과 티타늄밖에 없었던 이유가 크다. 또한 비행 간 발생하는 마찰열을 견디기 위해 기체 외피는 벌집 구조로 만들어 스테인리스스틸을 씌운 형태로 제작했으며, 열을 특히 많이 받는 일부 부위에는 르네 41(René 41)이라 불린 특수 합금을 사용했다.
XB-70의 조종석 모습. 비행 중 소실된 XB-70 2번기(AV-2)의 조종석으로 추측된다. <출처: 미 공군>
미 공군 연방 박물관에 주기된 XB-70 1번기의 조종석. <출처: 미 공군/Ken LaRock>
근접으로 촬영한 XB-70의 조종 계기판. <출처: 미 공군/Ken LaRock>
XB-70은 비록 사업이 중도에 중단됐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신기술을 증명해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특히 “압축양력(compression lift)”이라 불리는 항공역학 이론을 실증하고, 초음속 돌파 시에 발생하는 충격파를 주익 날개로 감싸 안아 이용하는 방식 등은 매우 도전적인 시도였다. 발키리는 또한 주익의 약 1/3 가량을 비행 간 아래 방향으로 꺾을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초음속 돌파 시 날개 면적을 줄이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기체 하부에 ‘터널’을 만듦으로써 외부 초음속 충격파를 동체 아래로 모으고, 동시에 수직 비행 면을 늘림으로써 방향 안정성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최대 이륙 중량 245,847kg를 자랑하는 XB-70은 현재까지도 마하 3으로 비행을 한 가장 크고 무거운 비행기로 기록되어 있다.
초도 비행 후 착륙 중 랜딩기어 타이어에 불이 붙은 XB-70의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운용 현황

XB-70은 1960년대부터 미사일 기술이 향상되기 시작하면서 장거리 유인 폭격기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던 시기에 탄생한 기체였다. 결국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을 비롯한 장거리 미사일 전력에 더 기대를 걸게 된 케네디(Kennedy) 행정부는 B-70 계획을 취소했으며, 이에 따라 아직 제작 중에 있던 XB-70A 시험기 또한 최종 완성되지 못하고 개발이 중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거리 폭격기와는 별도로 미국에서는 초음속 수송기(SST: Supersonic Transport) 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이는 안정적으로 장시간 동안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항공기가 등장한다면 기존 프로펠러 항공기나 제트기에 비해 항공기 비행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고, 항공물류 산업이나 항공여객 산업 또한 크게 팽창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NASA의 드라이든(Dryden) 비행연구센터는 SST 개발을 위한 수 건의 연구를 1960년대에 걸쳐 실시했으며, 더글러스(Douglas/현 보잉)의 F5D-1은 초음속 항공기의 이착륙 연구용, 노스 아메리칸의 F-100C는 SST의 비행 핸들링(handling) 연구용, 노스 아메리칸의 A-5A는 항공 통제체계 시연용, 그리고 록히드(Lockheed/현 록히드-마틴)의 제트스타(JetStar)는 SST 비행 간 시뮬레이터용으로 지정되었다. 이 와중에 XB-70 사업이 취소되면서 초음속 전략폭격기 사업 시제기의 임무가 해제되자 NASA는 XB-70 한 대를 SST 연구 테스트베드(testbed) 항공기로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XB-70은 잠정적으로 구상한 SST 항공기와 크기도 유사하고, 스테인리스스틸 골격이나 티타늄 등 사용된 소재도 유사했기 때문에 테스트베드 기체로 안성맞춤이었다. 이에 따라 XB-70의 임무는 초음속 유인 전략 폭격기 시제기에서 초음속 비행 시연기로 변경되었다.

착륙 후 감속 낙하산(드래그슈트)을 개방한 XB-70 1번기. <출처: NASA>

XB-70A 1번기(기체 번호 62-001)는 1964년 9월 21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하면서 캘리포니아 주 팜데일(Palmdale)에서 이륙해 에드워즈 기지까지 비행했다. 하지만 이륙 후 엔진 하나가 꺼졌고, 랜딩기어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수납하지 않고 꺼내 놓은 상태로 비행해 당초 계획의 1/2 속도인 628km/h로 비행했다. 결국 착륙 간에도 우측 후방 랜딩기어가 잠긴 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타이어 마찰이 발생하여 파열했고, 곧이어 화재로 이어졌다.

XB-70 기체에 대한 감항 인증은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노스 아메리칸 및 미 공군 시험 비행 조종사의 조종을 통해 실시했는데, 안타깝게도 발키리는 마하 2.5 이상으로 비행할 경우 방향 안정성이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동체 외부 허니콤 패널 재질에 무리가 가는 것이 발견되었다. 결국 초음속 시험 비행 중 패널 한 장이 찢어져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으므로 이후 발키리의 비행은 마하 2.5 이하로만 제한됐다. 발키리 1번기는 단 한차례 비행에서만 마하 3을 돌파했으며, 대부분의 비행은 마하 2.5 이하의 속도에서만 실시됐다. 안타깝게도 실제 비행 데이터는 예상 데이터와 달리 여러 문제점이 발견됐는데, 예를 들자면 비행 간 운용성에 문제가 있었고, 통제체계 설계에도 결함이 나왔으며, 고고도 비행 간 진동 문제 등이 나타나 개선해야 할 부분이 광범위하게 인지됐다. 이에 따라 XB-70A 2번기(기체 번호 62-207)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주익에 약 5도가량의 2면각을 주었으며, 이 상태로 1965년 7월 17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다. 그 결과 핸들링이 훨씬 양호해진데다 마하 3 이상의 비행 안정성도 1번기보다 우수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에 1966년 6월까지 총 9회의 비행 간 마하 3을 돌파했다.

음속 돌파 중인 발키리의 모습. XB-70은 주익을 아래로 65도가량 꺾어 동체에서 발생하는 음속 충격파의 흐름을 타는 방식으로 비행한다. 특히 날개를 아래로 꺾음으로써 고속에서 비행 안정성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었다. <출처: 미 공군>
하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던 시험은 1966년 6월 8일 자로 중단됐다. XB-70 2번기가 체이서(chaser) 항공기로 뒤에서 따라 비행하던 NASA 소속 F-104N ‘스타파이터(Starfighter)’와 공중에서 충돌해 추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발키리는 GE사 엔진 제품 홍보용 사진 촬영을 위해 F-4 팬텀(Phantom) II, F-5, T-38 탤런(Talon), F-104 스타파이터(Starfighter)와 포메이션 비행을 실시하던 중 F-104가 발키리의 우측 주익 날개 끝에서 발생한 와류에 말려들어 균형을 잃으면서 XB-70의 우측 주익과 충돌했고, 동체가 회전하면서 돌다가 AV-2의 수직 미익 및 좌측 주익과 재차 충돌했다. F-104는 그 자리에서 폭발했으며, XB-70 2번기(AV-2)는 폭발로 인해 방향타와 좌측 날개가 파손되어 스톨(stall)에 걸려 추락하다가 캘리포니아주 바스토우(Barstow) 시 북쪽 들판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F-104N에 탑승 중이던 NASA 수석 시험 비행 조종사인 조 워커(Joe Walker, 1921~1966)가 폭발로 즉사했고, XB-70의 주조종사인 앨빈 화이트는 사출에 성공했으나 중상을 입었다. 부조종사인 칼 크로스(Carl Cross) 소령은 스톨에 걸린 기체에서 사출에 실패해 결국 추락한 항공기와 함께 사망했다.
XB-70의 공중충돌 사고장면. 충돌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2번기는 소실됐다. <출처: 미 공군>
당초 2번기는 SST 2단계 사업 기종으로 선정되어 있었으나 기체가 소실됐으므로 1번기만 운용이 가능해졌는데, 문제는 성능이 우수했던 2번기를 상실했기 때문에 성능이 요구도에 못 미치는 1번기에 대해 대규모 개조를 가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도 개조된 기체는 1966년부터 1년간 시험 비행을 실시했으나 최고 속도는 마하 2.57 이상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XB-70 1번기의 성능에 계속 의구심을 가진 공군은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뗀 후 NASA에 완전히 일임했다. 하지만 미 공군은 이후에도 시험 비행 조종사 제공이나 기체 관리 지원을 계속 실시했으며, 1967년 4월부터 NASA가 단독으로 사업을 지휘하면서 총 12회의 연구 비행이 실시됐다. XB-70은 연구 사업을 통해 의미 있는 성과를 달성했으나, 이미 이 시점이 되었을 때 미 공군과 NASA는 별도로 진행 중이던 초음속 정찰기 개발 계획인 YF-12A / YF-12C 쪽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YF-12A/C 사업은 SR-71 블랙버드(Blackbird) 항공기의 개발로 이어졌다. 특히 SR-71쪽에 적용된 기술이 XB-70보다 한참 앞섰기 때문에 결국 XB-70 개발은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XB-70은 시제기 두 대를 합쳐서 총 1시간 48분 동안 마하 3 이상의 속도로 비행을 했으나, YF-12는 단 한 번의 비행으로 이 기록을 경신했다.
퇴역 후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미 공군 연방 박물관에 전시 중인 XB-70의 모습. <출처: 미 공군/Ken LaRock>
XB-70의 마지막 비행은 1969년 2월 4일에 이루어졌으며, 세계 최고 속도의 폭격기를 지향했던 “발키리”의 최후 치고는 쓸쓸한 아음속 구조역학 시험 및 페리(ferry) 비행만을 한차례 소화한 뒤 착륙했다. 이후 XB-70은 에드워즈 기지에서 이륙하여 오하이오주 라이트-페터슨(Wright-Patterson) 기지로 이동했으며, 이날 이래 세계에 단 한 대 남은 XB-70 1번기는 미 공군 박물관의 야외 전시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XB-70 1번기는 총 83회의 비행 동안 160시간 16분을 비행했으며, 1966년에 추락한 2번기는 46회의 비행 동안 92시간 22분간의 기록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66년 6월 8일, 편대 비행을 실시하던 중 F-104N과 충돌하여 추락한 XB-70 발키리 2번기(AV-2)의 모습이 담긴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파생형

XB-70A: B-70 장거리 폭격기의 시제기로, 총 두 대가 제작되었다. AV-1은 총 83회 비행을 실시하면서 160시간 16분을 소화했으며, AV-2는 총 46회를 비행하면서 92시간 22분을 기록했다. 두 대 중 2번기는 1966년 6월 8일, GE사 제품 홍보용 촬영을 위해 포메이션(formation) 비행을 하던 중 NASA 소속 F-104N과 공중 충돌하는 바람에 추락하여 영구 소실됐다. 

XB-70A <출처: 미 공군/Will Haas>

XB-70B: AV-3으로 명명된 시제기 3번기로, 당초 계획에는 1961년 3월에 첫 YB-70A로 명명할 예정이었다. 생산 초창기에 개발이 중단됐다.

YB-70: 사전 양산 형상으로 계획됐던 기체로, XB-70의 단점을 개선한 기체.

B-70A: ‘발키리(Valkyrie)’로 처음 명명된 폭격기 형상 안. 최초 65대 양산이 계획되었으나 실제 완성된 기체는 없다.

RS-70: 총 4명의 조종사와 공중급유 능력을 탑재시키려 한 정찰폭격기 형상안으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XB-70 개발 사업을 유지시키기 위해 제창했던 형상이다. 실제 개발되지는 않았다.


제원

- 종류: 초음속 전략폭격기/연구용 시험기
- 제조사: 노스 아메리칸 항공(NAA/ 現 보잉)
- 승무원: 2명
- 전장: 56.39m
- 전고: 9.14m
- 날개 길이: 32m
- 날개 면적: 585㎡
- 날개 하중: 414.7kg/㎡
- 에어포일: 육각형; 0.30 육각형 수정 루트(root), 0.7 육각형 수정 팁(tip)
- 자체 중량: 115,031kg
- 총 중량: 242,536kg
- 최대 이륙 중량: 245,847kg
- 최대 연료량: 140,000kg / 176,950 리터
- 추진체계: 89kN /120kN(애프터버너 시) 제네럴 일렉트릭(GE) YJ93-GE-3 애프터버너 터보제트 x 6 
- 최고 속도: 마하 3.1 (3,310km/h)
- 순항 속도: 3,219km/h
- 전투 범위: 6,899km
- 실용 상승 한도: 23,580m
- 양항비: 마하 2에서 약 6
- 추력 대비 중량: 0.00308kN/Kg
- 사업비: 15억 달러(현재 기준 약 102억 달러)
- 대당 가격: 7억 5천만 달러 (평균 가격/현재 기준 약 51억 달러)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 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 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 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 근무 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