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클러 & 코흐의 등장

2차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무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StG44나 MG42 같은 당대 최고의 명작 총기를 만들었던 독일의 엔지니어들은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국가로 건너가서 총기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바로 이런 가운데 전직 마우저(Mauser) 사의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특수정밀가공업체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마우저 공장 인근에 방공호로 쓰이던 자리에 작업장을 차려놓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바로 헤클러 & 코흐(Heckler & Koch; 이하 HK)이다.

헤클러 & 코흐는 두 창립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마우저의 관리자였던 에드문드 헤클러(Edmund Heckler, 1906~1960)와 티오도어 코흐(Theodor Koch, 1905~1976)는 마우저 출신 총기 설계자로 HSc 권총을 설계했던 알렉스 자이들(Alex Seidel, 1909~1989)을 영입하고 익명의 자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1949년 창업을 했다. HK는 원래 총기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제작기계용 정밀부품 등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서독(West Germany)의 연방국경경비대(Bundesgrenzschutz; BGS)와 연합군 점령군사령부가 K98k 소총과 MG42 기관총의 수리부속을 요청함에 따라 1951년 HK가 그 부품을 만들면서 총기 사업을 시작했다.

총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HK는 방공호 작업장에서 나와 오베른도르프(Oberndorf)의 구도시인 린덴호프(Lindenhof)의 언덕에 있던 구 마우저의 건물로 공장을 옮겼다. 특히 1955년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여 서독은 NATO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서독의 무기생산금지조치가 해제되면서 HK는 본격적으로 총기 회사로 전환을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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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TME와 HK가 만나다

한편 HK의 주 거래처였던 BGS는 1954년 스페인의 국립조병창인 CETME에서 발매한 7.92mm 시제 자동소총인 모델 2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험평가를 담당했던 BGS 담당자는 이 탄환이 7.62mm 구경이라면 BGS가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러자 CETME는 7.62x41mm CETME탄환을 사용하는 모델A1을 정식으로 발매했다. 그러나 BGS에서 얘기했던 7.62mm 탄환은 1954년 NATO의 제식탄환으로 선정된 7.62x51mm NATO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수를 깨달은 CETME는 NATO탄과 유사한 규격을 갖춘 7.62x51mm CETME탄을 개발하고 이를 발사하는 모델 A2와 모델 B를 속속 발매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CETME 소총은 NATO 규격탄에 맞는 모델이 아니었고, 규격에 민감한 독일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BGS는 NATO탄을 사용하는 CETME 소총의 시제모델 400정을 만들어 달라고 발주한다. 독일의 엄격한 요구에 고심하던 CETME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독일의 협력사를 찾기 시작했고, BGS와 협력하던 HK가 결국 1954년부터 CETME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 두 회사를 연결시켜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탄약회사 NWM(Nederlandsche Wapen en Munitiefabriek)의 사장인 헨크 비저(Hinderikus 'Henk' Lucas Visser)였다.

물론 HK는 최초에는 소총의 개발에 도움을 주는 역할에 한정되었다. 비록 조력의 역할이었지만 HK는 CETME 개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7.62x51mm탄의 원활한 사격을 위하여 각인 약실(fluted chamber)를 채택하도록 약실 설계를 바꾼 것도 HK였다. CETME 소총의 독일 도입이 구체화되면서 독일 내의 양산이 거론되자, CETME는 독일 내 양산을 위해 마우저(Mauser)와 접촉했으나, 마우저는 CETME의 제안을 비웃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CETME는 1956년 HK를 양산 파트너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CETME의 독일용 소총의 개발과 양산을 HK가 담당하게 되었다.

상황에 이렇게 되자 HK는 이제 베팅에 나섰다. 당시 독일·스페인·포르투갈 3개국을 제외한 CETME 소총의 전세계 생산 권한을 갖고 있던 것도 역시 헨크 비저였다. 아예 생산설비를 갖출 것이라면 전세계로 총기를 판매하겠다고 결정한 HK는 비저에게 이 권리를 양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비저가 이를 승락하건 아니건 간에, CETME의 결정이 없이는 전세계의 생산 권한은 양도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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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소총을 만들어버린 HK

어렵사리 만들어진 CETME/HK의 소총의 앞날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서독군이 1956년 벨기에제 FN FAL 소총을 G1 자동소총으로 제식채용하자, BGS도 당연히 G1을 채용하게 되면서 CETME/HK 소총을 더이상 채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BGS에 납품하기로 한 시제총기의 생산은 HK의 경험 부족으로 난항을 거듭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HK는 CETME 소총의 독일 생산에 성공하고 시험용 총기 400여 정을 1956년 10월에 BGS에 납품하였으며, 이후 1957년 4월까지 시험평가가 실시되었다.

한편 1958년이 되자 이제 서독 국방부(Bundesministerium der Verteidigung; BMVg)가 CETME/HK 소총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독군도 이미 FN FAL 소총을 G1 자동소총으로 제식채용하고 있었지만, 서독 정부가 FAL 소총의 라이선스 생산을 요구하자 FN은 이를 거절했다. 2차대전 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기억에 벨기에 정부는 직도입은 몰라도 면허생산은 허용할 수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독군은 자국서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자동소총을 찾아야만 했다. 마침 BGS에서 시험평가하고 있던 CETME/HK 소총은 매우 시의적절한 대안이었고, 결국 BMV는 1958년 4월 17일 시험평가용 소총을 400정이나 주문했다. 이에 따라 HK는 7월 1일까지 400정의 CETME/HK 소총과 함께 1,600개의 탄창과 기타 수리부속을 납품했다.

독일 정부는 사실상 CETME/HK 소총의 채용을 결심하고 매우 진지하게 시험평가에 나섰다. BWB(Bundesamt für Wehrtechnik und Beschaffung; 국방기술조달청)는 꼼꼼한 시험평가 과정을 실시하면서 여러가지 사항을 개선하도록 요구했다. BWB는 우선 본격적인 시험평가에 앞서서는 17가지의 개선사항을, 시험평가 종료 후에는 4가지 개선사항을, 그리고 양산 전에는 3가지 개선사항을 요구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험평가 전 개선요구사항
1) 소염기와 총류탄 발사기를 결합하여 설계할 것
2) 가늠쇠 보호장치를 강화하여 제작할 것
3) 가늠자는 플립-업이나 다이얼 방식으로 제작할 것
4) 운반손잡이에 고정장착를 장착할 것
5) 조종간 고정장치의 위치를 변경할 것
6) 탄피의 배출시 방향을 바꾸는 기구를 부착할 것
7) 개머리판 끝부분의 재질을 금속 대신 고무로 변경할 것
8) 권총손잡이의 양산절차를 단순화 할 것
9) 멜빵의 장착 위치를 변경할 것
10) 장전손잡이를 길게 제작할 것
11) 파이프의 외양을 변경할 것
12) 반동 스프링 가이드를 변경할 것
13) 권총손잡이에 장착되는 핀을 변경할 것
14) 버퍼장치를 변경할 것
15) 개머리판의 형상을 변경할 것
16) 방아쇠 안전장치의 모양을 변경할 것
17) 장전손잡이를 더욱 인체공학적인 형상으로 변경할 것

2. 시험평가 종료후 개선요구사항
1) 양각대를 강화할 것
2) 손 보호를 위한 대책을 강구할 것
3) 권총손잡이의 형상을 더욱 인체공학적으로 교체할 것
4) 전체 중량을 감소할 것

3. 시험평가 종료 후 양산전 개선사항
1) 안전장치가 걸려있는 상태에서도 장전이 가능하도록 방아쇠 구조를 변경할 것
2) 20발이 수납가능한 탄창을 제작할 것
3) 마지막 탄환 발사 이후 약실이 개방된 상태로 되도록 만들 것

독일군을 위한 개조 과정에서 HK가 만드는 소총은 점점 CETME 소총과는 다른 소총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CETME 소총의 총몸은 저탄소강, 즉 연철로 만들어졌다. 사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돌격소총(Sturmgewehr)들을 만들 때부터 총몸에 저탄소강을 썼는데, 돌격소총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CETME 소총도 당연히 이런 전철을 따랐던 것이다. 저탄소강을 사용하면 손쉽게 가공이 가능하여 부족한 설비로도 저가로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가공을 위한 저탄소강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CETME 소총은 독일의 돌격소총처럼 상대적으로 저위력의 탄환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롤러로킹의 지연블로백 작동방식을 사용한 것도 처음에 채용했던 탄환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62mm NATO탄을 사용하면서 총기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극도로 증가하면서 더 이상 저탄소강을 쓸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HK는 저탄소강을 대신하여 더욱 강성이 높은 합금강을 채용하였다. 또한 노리쇠를 구성하는 노리쇠 앞쪽과 노리쇠 뭉치, 롤러 등도 모두 강성이 높은 다른 재질로 바뀌었다. HK는 원활한 작동을 위해 무려 20가지가 넘는 롤러들을 개발하여 원하는 것을 채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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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채용된 G3

한편 HK가 소총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라인메탈이 HK의 파트너가 되었다. 사실 라인메탈은 원래부터 CETME 소총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독일 내 생산을  CETME에 제안했지만 HK를 이미 파트너로 선정했기에 좌절된 바 있다. 이제 독일 내 양산을 놓고 1957년 CETME는 HK/라인메탈 팀과 협상에 들어갔는데,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자 CETME는 이제 독일 국방부와 직접 면허생산계약을 맺고자 했다. 독일 국방부도 CETME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기를 바랬지만, 해외수출권한까지도 확보하길 바랬는데, 이 부분에서 결국 CETME와 대립하면서 계약은 체결되지 못했다.

계약이 이뤄지지 못하자 1958년 3월쯤에 이르러 CETME/HK 소총의 독일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작업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스페인이 채용한 CETME 모델 B 소총은 NATO 표준탄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과연 FN FAL을 대체할만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까지 더해졌다. 게다가 서독 연방군의 규모가 문제가 되었다. 애초에 50만 명 규모의 군대를 목표했지만 숫자는 계속 줄어갔고, 이는 차기소총의 생산량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CETME는 새롭게 계약협상을 진행할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는 그간 꺼려왔던 해외수출권리까지도 독일측에 넘길 수 있음을 밝혔다. CETME 소총의 뿌리가 독일의 StG45(M)이며 그 개발의 주역이 루드비히 포그림러를 포함한 독일 총기설계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독일의 핏줄을 가진 총기가 독일인의 손에 돌아온 셈이었다.

CETME 측이 양보하자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59년 2월이 되자  CETME, HK, 라인메탈은 물론이고 독일과 스페인 양국 국방부까지 서명한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대금이 지급되고 생산에 필요한 기술 문건들이 이전되면서 드디어 CETME/HK 소총의 독일 생산의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1959년 서독 연방군은 CETME/HK 소총을 "자동소총, 7.62x51mm NATO 구경, G3(Automatisches Gewehr, Kal 7.62x51mm (NATO), G3)"로 제식채용하였다. 한편 연방군을 위한 G3 양산에서 서독 국방부는 신생업체인 HK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에 따라 HK 이외에도 라인메탈에서도 G3가 생산되었으며, 초도주문량으로 HK와 라인메탈은 각각 65,000정을 생산했다. HK와는 별도로 라인메탈도 독자적인 G3 변형모델들을 개발했으나,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G3가 성공하면 할수록 CETME와 HK의 관계는 멀어졌다. 특히 이미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CETME 소총의 개발자였던 포그림러가 마우저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CETME는 마우저와 전략적 협력을 하기에 이렀는데, 포그림러는 마우저에서 시험용 기관총을 만들기도 했다. 5정의 시제기관총이 만들어져 서독 연방군에 제공되었지만, 이미 MG3라는 우수한 기관단총을 보유하던 연방군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우저의 CETME 소총 개발은 방향을 잃고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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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3 소총으로 미래를 연 HK

실전배치된 G3는 현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독일군의 G3 실전배치와 만족스러운 운용은 다른 NATO 회원국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군대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독일 다음으로 채용한 것은 포르투갈로, 이들은 CETME 사양이 아니라 G3 사양으로 자국생산을 시작했다. 그 다음은 스칸디나비아의 3개국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자국에서 생산을 시작했다. 이외에도 터키, 파키스탄, 이란, 그리스와 프랑스에서도 G3는 면허생산되었다. 한때 FN FAL로 NATO 전역을 장악할 것 같았던 FN FAL은 G3에 밀려나게 되었다.

HK의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G3의 작동방식에 바탕하여 다양한 총기들을 개발했는데, 5.56x45mm 탄을 사용하는 HK33과 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하는 MP5 기관단총을 만들면서 제품군을 다양화했다. 물론 G3 자체를 경기관총화 하여 만든 HK11(탄창급탄방식)과 HK21(탄띠급탄방식)이 등장했다. 그러나 G3는 기관총보다 저격총으로 만들어져 더욱 인기를 끌었다. G3SG/1에서 시작하여 MSG3이 등장했고, 이후에는 프리플로팅 배럴을 장착한 PSG1과 MSG90까지 등장했다.

물론 HK의 주력상품군은 G3만은 아니었다. HK4 권총이나 P9, VP90 등 당시 기준으로 획기적인 총기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HK가 마우저나 라인메탈, 발터 등의 거물들을 제치고 독일의 대표적인 총기업체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G3 소총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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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본 연재인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 중동지역에서 군 특수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아덴만 지역에서 대(對)해적 업무를 수행하는 등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하다 일선에서 물러났다. 현재는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WMD 대응센터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남대와 신안산대 등에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방위사업청, 해·공·육군 정책자문위원, 민주평통 국제협력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