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의 역사

독일의 헤클러&코흐(Heckler & Koch, HK)는 1990년대에 권총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될뻔한 위기를 USP의 개발로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오히려 1990~2000년대에 HK는 글록/SIG와 함께 전술용 권총 시장에서 대표적인 주자중 하나로서 성공을 거두었고,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USP및 그 후계작들이 가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바로 격발기구였다. 별도의 해머(공이치기)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싶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갈수록 경쟁작에 대한 약점으로서의 측면이 강해졌다. 여기서 경쟁작이란 USP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총기인 글록을 가리킨다..

폴리머 프레임 등 여러가지 면에서 글록은 다른 총들에 강한 영향을 끼쳤지만, 사실 다른 총들이 가장 따라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따라할 수 없던 것이 바로 글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스트라이커 격발기구였다.

글록의 격발기구는 자동권총에 그동안 기대할 수 없던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직관성’을 선사했다. 일단 약실에 탄이 장전되어있기만 하면 그 다음에 사수가 할 일은 오로지 하나, 즉 방아쇠를 당기는 것 뿐이다. 전통적으로 더블액션 리볼버에서나 기대할 수 있던 특징인데, 그것을 자동권총에서 구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글록 이전에도 약실에 탄을 장전한 채 휴대하다 방아쇠만 당기면 격발이 이뤄지는 해머식 더블액션 격발기구를 가진 자동권총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디코킹 과정을 거쳐야 한다든가, 초탄 더블액션-차탄 싱글액션 방식이라 첫 발(초탄)과 그 다음 탄의 방아쇠 느낌이 현저하게 다른 경우가 보통이다. 설령 더블액션만 가능하게 해 방아쇠 압력의 표준화를 구현했다 해도, 자동권총의 해머식 더블액션 방아쇠는 리볼버의 더블액션 방아쇠보다 방아쇠의 느낌이나 압력 등 많은 면에서 연사로 좋은 사격결과를 얻기에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반면 글록의 스트라이커 방식은 기존 해머식 더블액션의 결정적 약점 두 가지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일단 초탄부터 마지막까지, 방아쇠 압력이 사실상 같다. 게다가 매발 쏠 때마다 방아쇠가 일정한 압력으로 당겨질 뿐 아니라 압력 그 자체도 낮고 왕복거리도 짧다. 극단적으로 말해 거의 싱글액션으로 연사하는 수준이다. 당연히 첫발부터 끝까지 같은 감각으로, 그것도 꽤 잘 맞출 수 있다.

물론 글록의 스트라이커 격발기구 -업체에서 ‘세이프 액션’으로 처음 홍보했던- 에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다. 초기 보급 과정에서 이 총을 가지고 오발사고를 일으킨 미국 경찰관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총 자체의 결함보다는 무겁고 왕복거리가 긴 더블액션 방아쇠에 익숙한 미국 경관들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에 대한 교육의 개선이 이뤄지면서 사고는 크게 줄었으며 결국 글록은 미국 시장 진출 후 10년도 채 안되는 시간 안에 미국 사법기관의 거의 절반이 선택하는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다면 왜 HK나 타 업체들은 스트라이커 격발 기구를 그대로 도입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글록은 자사의 세이프 액션 기구를 철저하게 특허로 보호했다. 그 결과 완전한 싱글액션이나 더블액션으로 하지 않는 이상 스트라이커 방식으로 글록과 경쟁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만들면서 글록과의 특허 분쟁을 피할 방법은 매우 찾기 어려웠다. 특히 글록이 초반부터 막대한 현금 매출을 벌어들이면서 법무팀, 특히 미국 지사의 법무팀을 강력하게 보강한 탓에 이런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글록 미국 지사는 아예 지사장이 변호사인 때도 있었다).

즉 HK가 USP를 개발하면서 폴리머 프레임등 많은 부분에서 글록을 벤치마킹했지만 정작 핵심인 스트라이커 격발기구를 벤치마킹하지 않은 것은 법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애당초 폴리머 프레임은 HK가 먼저 도입한 요소였고 글록의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인 브라우닝 방식 쇼트 리코일 기구 역시 특정 업체가 법적 독점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컸지만 스트라이커 격발기구만큼은 글록의 거미줄같은 특허를 건드리지 않고 벤치마킹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종의 자존심과 차별화, 고정관념의 복합이었다. 글록을 그대로 베낄 수는 없다는 자존심, 글록과는 다르다는 면모를 부각시켜야 할 차별화, 그리고 ‘그래도 권총은 해머 방식이지’라는 고정관념이 USP의 개발과정에 녹아든 것이다- 이는 사실 HK만의 문제는 아니고, 2000년대 중반까지 SIG자우어 등의 다른 업체들에서도 종종 보이던 오판이지만 어쨌든 HK도 벗어날 수는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가 2010년대로 바뀌면서 시장의 흐름은 더 이상 고정관념과 자존심에 의존할 수 없는 수준까지 변해갔다. 글록의 시장점유율은 줄어들 기세 없이 꾸준히 늘어갔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점유율 그 자체를 넘어 글록이 사실상 전술용 권총의 표준으로 굳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스트라이커 격발기구를 통한 직관적인 조작성은 이제 ‘글록이라는 특수한 권총의 신기한 것’을 넘어 ‘권총이라면 으레 가져야 할 것’처럼 통하기 시작했다. 글록의 미국내 사법기관 점유율이 60%대에 도달한 상황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스마트폰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것과도 비슷한 상황이 권총 업계에 닥쳐버린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법적인 제약도 풀려버렸다. 모든 특허는 결국 유효기간이 있고, 글록이 1980년대가 갓 시작될 무렵에 자사의 스트라이커 격발기구에 걸어 둔 특허들도 2000년대 중~후반 사이에 모두 유효기간이 만료되었다. 당연히 S&W의 M&P를 시작으로 여러 업체들이 스트라이커 격발기구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엉덩이가 느린’ 총기 업계의 특성상 단번에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2010년대에는 누가 봐도 기존의 해머식 격발기구에만 의존해서는 전술용 권총의 주류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미 육군이 2010년대에 차기 권총 사업인 MHS(Modular Handgun System)를 추진하면서 이런 추세는 아주 분명해졌다. 미 육군은 MHS사업의 후보가 스트라이커 격발 방식일 것을 진작에 결정한 상태였고, 거의 막바지까지 글록이 최유력 후보로 남아있었다. 비록 글록이 떨려나기는 했으나 승리자 역시 스트라이커 격발 방식인 SIG의 P320이었다는 사실은 대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HK역시 더 이상 해머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HK가 내민 도전장, VP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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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2014년 6월에 발표된 VP9의 개발은 2009년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HK가 시장의 흐름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셈인데, 따지고 보면 HK는 스트라이커 격발 방식에서도 글록보다 선구자였다. 상업적으로 실패했을지언정 독특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총이던 VP70도 스트라이커 방식이고, USP이전에 전술 시장에서 나름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P7시리즈 역시 스트라이커 방식이다. HK로서는 제대로만 하면 ‘글록의 벤치마킹’이 아니라 ‘전통의 복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인 셈이다. 미국의 MHS사업이 이 총의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맞는 듯 하지만, 결국 HK는 MHS사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VP9의 VP는 Volkspistol, 즉 ‘국민 권총’이다. 아마도 이런 ‘전통의 복귀’라는 차원에서 과거의 VP70을 이어받았다는 면을 강조하고 싶어서 붙인 이름이겠지만 VP의 V, 즉 Volks(국민)라는 명칭은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일치단결된 군국주의적 국민’을 강조하는데 쓰이던 호칭이라 독일에서는 기피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VP라는 호칭 대신 SFP(striker fire pistol)라는 호칭이 사용된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미국 출시명인 VP를 사용해 보자. 참고로 VP9은 9mm루거탄을, VP40은 .40S&W탄을 사용하는 바리에이션이다.

VP9의 기본 디자인은 HK의 전작인 P30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제로 VP9의 그립은 P30과 마찬가지로 백스트랩뿐 아니라 좌우 플레이트까지 바꿔 사용자의 손에 맞춰 다양한 사이즈로 변환할 수 있는 방식이며 탄창멈치 역시 좌우 대칭식의 레버 타입이다. 그러나 VP9은 슬라이드 멈치 자체를 분리해야 슬라이드와 프레임이 분리되는 P30과 달리 별도의 분해 레버를 갖춘 P220과 유사한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부품이 총에서 덜 분리되는 만큼 최근 고객들의 선호도가 집중되는 방식이기에 불가피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슬라이드 멈치도 P30보다는 글록에 더 가까운, 프레임에서 분리되지 않는 타입으로 바뀌었고 좌우 모두에 있기 때문에 왼손잡이도 동등하게 조작이 가능하다. 탄창멈치 역시 레버 타입을 불편해하는 고객들을 위해 버튼 타입의 옵션이 추가되었고, 수동식 안전장치 레버도 최근 옵션의 하나로 가세했다.

사실 스트라이커 격발 방식까지 채택하고 나면 현대의 전술용 권총에서 글록과 차별화되는 총을 만들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뭔가를 더 추가해서 장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더 빼서 장점이라고 홍보하는 미니멀리즘의 상징같은 총을 상대로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HK는 기능 그 자체보다는 ‘느낌’을 더 강조한 총으로 VP9을 완성했다고 봐도 좋다. 그립도 파지감이라는 ‘느낌’을 중시한 디자인이고, 무엇보다도 방아쇠의 ‘느낌’에 상당히 애를 썼다.

VP9의 방아쇠는 압력 자체는 글록과 큰 차이가 없지만, 글록보다 더 좋은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쓴 것이다. 특히 리셋 거리, 즉 한 발을 쏘고 다음 발을 쏠 때 까지 당겨야 하는 방아쇠의 거리를 최대한 짧게 하는 데 주력했다. 또 방아쇠를 당겨 격발이 이뤄지는 순간의 느낌이 최대한 선명하게 나게끔 했다. 흔히 말하는 ‘딱 부러지는 느낌’ 내지는 ‘유리 막대가 깨지는 느낌’이 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싱글액션이나 마찬가지이며, 이 때문에 HK는 VP9의 오발 방지용 공이 차단기를 기존의 상하 작동식에서 수평 작동식으로 바꿔 오발 가능성을 더욱 낮게 만들려 했다.

업체의 이런 주장이 약간 과장된 느낌은 있어도 실제로 VP9의 방아쇠 느낌은 상당히 좋다. 실제로 방아쇠 리셋 거리도 짧고 느낌도 꽤 뚜렷하다. 하지만 이런 느낌적인 부분 외에 실용적으로도 글록보다 유리한 측면이 있다. 글록은 분해하기 전에 방아쇠를 당겨 공이(스트라이커)를 전진시킨 다음 분해를 시작해야 한다. 반면 VP9은 최근 개발된 스트라이커 격발방식 총기들의 추세를 따라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도 분해를 시작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차징 서포트’라고 불리는 부품의 도입이다. 슬라이드 뒤쪽에 추가되는 이 부품은 일종의 손잡이로, 슬라이드를 당길 때 잡기 편하게 하려고 설치했다. 너무나 단순한 플라스틱 조각이지만 조작성에 꽤 좋은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장갑을 끼는 등으로 기존의 슬라이드 홈을 잡아 당기는데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라면 꽤 도움이 될 것이다.

탄창은 VP9을 기준으로 15연발(어댑터 사용으로 20연발까지 확장 가능)인데, P30의 탄창이 사용된다. 이 탄창의 사용 때문인지, 스트라이커 방식의 중요한 장점 중 하나인 총열 축선의 높이가 P30보다 그다지 낮지 않다. 기존 제품과의 탄창 호환성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사실 P30도 콘트롤이 어려운 총은 아닌 만큼 딱히 문제라고 할 부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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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현황

사실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는 모델이기 때문에 아직 검증이 충분히 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무난하게 완성된 스트라이커식 전술용 권총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그리고 본고장이라 할 독일 경찰 시장에서는 이미 바바리아주 경찰이 4만정을 도입하고 베를린 경찰이 24,000정, 니더작센주가 22,000정, 작센이 11,000정을 주문했으며 그 외에도 브란덴부르크와 매클렌부르크-베스트포메라니아주 경찰도 도입해 착실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 GSG-9(독일 국경수비대 소속 대테러부대)도 기존의 USP택티컬을 대체할 총으로 VP9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룩셈부르크와 스위스의 바젤-슈타트 주 경찰도 도입을 결정하는 등 짧은 등장 기간을 고려하면 유럽 시장에서 나름 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미국 경찰에서는 아직 몇 곳의 소규모 경찰조직들이 도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글록의 아성에 도전하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과연 이 총이 어느 정도의 실적을 거두게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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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이션

VP9/SFP9-SF: 미국 시장에서의 VP9기본형을 유럽시장에서 부르는 명칭.

SFP9-TR: 독일 경찰의 규정에 맞춰 방아쇠 압력을 6.7~7.9파운드(표준은 5.5파운드)로 높인 모델. 글록의 소위 ‘NYPD트리거’의 독일 버전에 해당.

SFP9-OR: 슬라이드 위에 마이크로 도트사이트 장착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있는 모델.

VP택티컬 / SFP9-SD: 총열을 나사홈이 파인 소음기 장착용으로 바꾼 버전.

VP9SK/SFP9-SK: 총열을 86mm의 짧은 것으로 장착한 서브컴팩트 버전.

SFP9-L: 127mm의 총열을 갖추고 그에 맞는 긴 슬라이드가 장착된 버전.

SFP9-M: 해상작전용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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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

	VP9	VP9SK
구경:	9 x 19 mm 파라블럼
길이:	186.5mm	168mm
총열 길이:	104mm	86mm
폭:	33.5mm	33mm
높이:	137.5mm	116mm
탄창 용량:	15발	10발
무게:	710g(빈 탄창 포함)	687g(빈 탄창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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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홍희범   
1995년 월간 플래툰의 창간멤버로 2000년부터 편집장으로 출간을 책임지고 있다. 2008년부터 국군방송 및 국방일보 정기 출연 및 기고를 하고 있으며, 세계의 총기백과, 밀리터리 실패열전 등을 저작하고 2차세계대전사, 컴뱃 핸드건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