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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역사

전차 여명기에 있었던 이런저런 시도

제1차 대전을 겪으며 전차의 가능성은 확인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능과 구조를 갖추고 어떻게 운용해야 효과적인 전투 수단이 될 것인지에 대한 연구는 종전 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특별히 참조할 것이 없어 진행 과정이 나라별로 중구난방이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1920년대가 지나자 기갑 전투와 관련한 각종 기법과 이론 그리고 이에 적합한 전차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차를 처음 만들고 실전에 투입한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보병과 함께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방어력이 강화된 전차와 빠른 속도로 전선을 돌파하거나 우회해서 적의 주요 거점을 타격할 수 있는 기동성이 강화된 전차로 기갑전력을 이원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전자는 보병전차(Infantry Tank)로, 후자는 순항전차(Cruiser Tank)로 구분이 된다. 사실 명칭만 다를 뿐이지 여타 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당시 군사관계자들이 모여서 협의를 한 것은 아니지만 제2차 대전 당시에 각국의 기갑부대는 영국의 보병전차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重)전차와 순항전차 역할을 담당한 중형(中型) 혹은 경전차로 나누어 전력을 구축했다. 오늘날은 전차의 모든 임무를 MBT(주력전차)가 담당하지만 당시에 이렇게 역할을 나누고 그에 맞는 별개의 전차를 개발하고 운용한 이유는 부족했던 기술력 때문이었다.

오늘날은 다양한 소재의 장갑 덕분에 예전 전차와 같은 무게라도 방어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설령 무게가 늘어났어도 뛰어난 엔진 덕분에 기동력은 오히려 좋아졌다. 그러나 제2차 대전 당시만 해도 방어력 향상을 위해 장갑을 두텁게 하거나 공격력을 높이려고 주포를 업그레이드하면 전차가 무거워졌고 그만큼 기동력이 떨어졌다. 이처럼 오랫동안 방어력, 공격력, 기동력은 함께 하기 어려운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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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때문에 포기한 것

보병전차와 달리 마치 기병처럼 쾌속으로 전선을 돌파할 순항전차는 속도가 중시되었다. 당시 기술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게를 줄이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장갑을 얇게 해야 했다. 그런데 영국뿐 아니라 당시 주요 전차 개발국들은 속도가 빠르면 빈약한 방어력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방어력을 포기한 결과 제2차 대전 이전의 여러 국지전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상식적으로 전차가 빨라봤자 발사된 포탄보다 빠를 수는 없다. 당시 전차들도 기동 중 사격은 가능했지만 명중은 요행이어서 공격하려면 일단 멈춰야 했다. 최초의 Mk I(A9)과 Mk II(A10) 순항전차로 독일의 3호, 4호 전차와 도저히 전투를 벌일 수 없었을 정도였다. 서둘러 후속작인 Mk.V(A13) 커버넌터(Covenanter) 순항전차의 양산을 진행해 2년 동안 무려 1,700여대를 만들었으나 어이없게도 설계 오류로 인해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영국은 1940년 말부터 신예 순항전차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와 별개로 당장의 전력 공백을 메우고자 커버넌터를 바탕으로 성능을 개량한 Mk.VI(A15) 크루세이더(Crusader) 순항전차를 개발해 1941년부터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크루세이더는 빈약한 방어력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배틀액스 작전에 투입된 90대 중 51대가 격파 당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일선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자 신예 전차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당국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전훈을 토대로 1942년 배치를 목표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크루세이더 후기형이 57mm 구경의 QF 6파운더 포로 화력을 강화했지만 독일의 4호 전차나 소련의 T-34와 비교하면 부족한 수준이었다. 당장 대안이 없어 같은 주포를 장착했지만 이는 추후 성능 개량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뼈저린 경험을 토대로 무엇보다 신경 쓴 부분은 방어력이었다. 크루세이더의 40mm 장갑도 그 이전의 전차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강화된 수준이었으나 실전에서는 상당히 무기력했다. 신예전차는 2배 정도인 75mm(후기형은 100mm)의 장갑을 둘러 방어력을 대폭 늘릴 예정이었다. 덕분에 크루세이더보다 무게가 9톤 정도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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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경의 이름으로 명명되다

그렇다고 순항전차에게 있어 중요한 기동력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엔진과 구동장치를 개량해서 문제점을 해결하기로 했다. 사실 크루세이더는 포장도로에서조차 시속이 42km에 불과해 순항전차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당국은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실패를 대비하기 위해 유수의 차량제조사인 박스홀(Vauxhall), 너필드(Nuffield Organization), 릴런드(Leyland Motors) 등 3개사를 참여시켜 경쟁을 유도했다.

연구 단계부터 호국경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을 만큼 당국의 기대는 상당했다. 박스홀은 처칠 보병전차를 축소한 A23을, 너필드와 릴런드는 각각 크루세이더를 확장 개량한 A24와 A27 개발안을 당국에 제출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개발 기간이 가장 빠를 것으로 예측된 너필드의 A24가 최종 승자로 결정되었고 당국의 의뢰를 받아 프로토타입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크루세이더에 사용 중인 리버티(Liberty) 엔진이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성능이 미흡했다. 1942년 6대의 프로토타입이 납품되어 실험에 들어갔지만 실망스런 결과를 보였다. 이에 릴런드의 도움을 받아 A27에 제안되었던 강력한 롤스로이스 미티어(Meteor) 엔진을 장착하기로 했다. 스피트파이어 전투기의 심장인 멀린 엔진을 차량용으로 개조한 미티어 엔진은 600마력의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엔진을 탑재하기 위해 차체를 전면 재설계하고 변속장치와 현가장치의 성능도 개량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개발된 Mk VIII(A27M) 크롬웰 순항전차는 공격력, 방어력, 기동력이 적절하게 결합된 영국 최초의 전차로 평가받지만 여러 우여곡절 때문에 계획보다 늦은 1943년부터 양산이 시작될 수 있었고 최초의 실전 투입은 이듬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단지 힘이 약했을 뿐이지 신뢰성이 입증된 리버티 엔진을 배제하기에는 너무 미련이 많았다. 이에 영국군 당국은 A24을 크롬웰 1, 리버티 엔진을 장착한 모델을 크롬웰 2, 미티어 엔진을 장착한 개량형을 크롬웰 3으로 세분화했다. 하지만 세부적 성능이 다른 전차라고 할 만큼 차이가 뚜렷해 크롬웰 1은 카발리어(Cavalier)로, 크롬웰 2는 센타우르(Centaur)로 개칭되었고 이후 크롬웰 3만이 크롬웰 전차를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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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