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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역사

결코 T-34에 만족할 수 없다.

T-34는 소련에서 ‘조국을 구한 전차’라고 불릴 만큼 좋은 전차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겸비한 걸작이었다. 기갑 역사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흔적을 남긴 하인츠 구데리안이 독일 제2기갑집단 사령관 당시에 노획한 T-34를 검사하고 나서 뛰어난 성능에 놀라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2차 대전 발발 시점에서나 그랬을 뿐이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독일의 티거(Tiger)나 판터(Panther)에 확연히 밀렸다.
사실 티거는 중(重)전차여서 기본적으로 화력과 방어력에서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워낙 두 전차의 대결이 많이 알려져 이들을 라이벌로 보는 경향이 많지만 티거의 진정한 맞상대는 IS 같은 소련의 중전차였다. 하지만 일선에서 어려움을 호소하자 1943년에 이르러 강력한 85mm 주포를 장착한 T-34-85가 개발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같은 체급인 판터보다 열세여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판터가 개발 당시에 T-34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결국 바늘과 실처럼 포탑이 바뀌자 그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새로운 차체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기능이 향상된 엔진과 토션바 현가장치를 채택하고 전면 방어력이 대폭 강화된 새로운 차체가 개발되었다. 이후 개량을 거쳐 T-55까지 이어지고 제2세대 전차인 T-62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만큼 성능이 준수했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차체에 T-34-85 포탑을 결합한 새로운 중형(中型) 전차가 T-44다. 마치 T-34와 T-55를 결합한 것 같은 외형만으로도 T-44가 소련 전차 개발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1944년부터 양산을 시작했지만 독일의 패전이 확실한 상황이어서 차후 대립이 예상되는 서방측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실전에 투입하지 않았을 만큼 T-44에 대한 군부의 기대는 컸다.

화력에 대한 고민
 
하지만 정작 방어력과 주행력이 개선되자 이번에는 화력이 문제였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이 전선에 투입한 M26의 90mm 주포나 쾨니히스티거의 71구경장 88mm 포에 확연히 밀렸던 것이다. T-44의 ZiS-S-53 강선포는 85mm 구경이지만 탄두의 재질과 화약의 품질이 뒤져서 근거리에서 티거보다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던 판터의 70구경장 75mm 주포에도 밀릴 정도였다.

이에 SU-100 자주포의 100mm 포와 IS-2 중전차의 122mm 포를 탑재하는 시도를 했으나 포탑은 그대로여서 균형이 맞지 않았고 휴대할 수 있는 포탄의 수도 적었다. 이후 T-62의 개발 과정에서 보듯이 주포의 업그레이드는 전차의 안정성, 사격의 정확도 등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만큼 쉽지 않다. 결론적으로 포탑의 완전한 재설계 없이는 제대로 공격력을 향상시키기 어려웠다.

개발을 담당한 모조로프(Morozov) 설계국과 소련군 당국은 T-44에 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100mm D-10 포와 122mm D25-T 포를 놓고 고민하다가 D-10으로 결정했다. 실제로 D-10은 티거와 화력전에서 밀리지 않았을 만큼 강력했다. 게다가 이미 122mm 주포를 사용하는 IS-3 중전차가 양산에 들어간 상황이어서 그 정도면 향후 등장이 예상되는 미국, 영국의 중형전차와 맞설 수 있다고 분석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용 목적별로 중, 중형, 경(輕)전차를 별도로 사용하던 때였다. 주로 방어전이나 벙커 공략 등에 사용하는 중전차와 달리 중형전차는 기갑전이나 보병 지원이 목적이어서 너무 화력만 신경 쓰다가는 기동력 등에서 낭패를 볼 수 있었다. 처음 언급한 T-34이 출현 당시에도 가장 강한 전차가 아니었지만 가장 좋은 전차로 평가받은 이유도 바로 이런 여러 요소를 골고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중형전차의 시대를 열다

1945년 3월, 마침내 오비옉트(Ob'yekt) 137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이루어진 전차의 프토로타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T-54(T-54-1)다. 외형상으로 T-44와 별 차이가 없었으나 D-10 포를 장착하면서 포탑이 좀 더 커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능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어서 군부의 요청에 따라 곧바로 대대적인 개선에 착수해 종전 이후인 1947년에서야 양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선에서 포신을 아래로 내리고 하향 사격을 할 경우 방어력이 취약한 포탑과 포방패의 상부가 크게 노출되는 문제점을 제기하자 군부가 납품 중단 후 개선을 요구했다. 이에 다시 한 번 대대적인 개량이 이루어져 포탑이 반구형에 가깝게 바뀌었고 차체 전면 방어력과 주행력도 향상되었다.(T-54-2) 이처럼 T-54는 이후에도 일선의 요구를 즉각 반영해 성능을 개선했다.

비록 등장과 동시에 개량이 이루어지고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변경이 이루어졌을 만큼 소련 군부가 처음부터 만족해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T-54는 서방측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직은 제2차 대전 당시의 기준으로 성능을 평가하던 시기다 보니 가벼운 중형전차 임에도 100mm 구경의 강력한 주포를 장착했고 피탄 능력이 좋은 경사 장갑을 갖추었다는 점이 상당히 우려스러웠다.

가볍고 기동력이 좋지만 오히려 방어력은 증대되고 화력도 강한 T-54의 등장은 사용 목적에 맞게 각기 다른 전차를 보유해 운용하는 기존 사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굳이 여러 종류의 전차를 운용할 필요 없이 이를 주력 전차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문에 1955년 탄생한 T-10(IS-8)을 마지막으로 소련에서 중전차는 개발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만큼 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사실 서방측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새로운 전쟁을 대비한 전차

T-54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49년 M26을 개량한 M46을 대항마로 내세웠고 1951년에는 새롭게 포탑을 설계한 M47의 양산에 나섰다. 하지만 서둘러 배치한 M47이 생각보다 성능이 부족하고 일선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자 즉시 단종시키고 성능이 대폭 강화된 M48을 1953년부터 양산 했다. 지금이라면 보기 힘든 이런 개발 속도는 다시 말해 그만큼 미국이 전전긍긍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소련도 재차 T-54의 개량에 나섰다. 1957년부터 출력이 대폭 강화된 엔진을 장착하고 연료 탑재량을 늘려 속도와 주행 거리를 증가시킨 T-54B를 개발하는 동시에 이를 기반으로 포탑을 바스켓 구조로 바꾸고 NBC 방호장치를 장착한 오비옉트 155 개발을 병행했다. 이렇게 성능이 대폭 업그레이드된 개량형이 1958년부터 양산되는데, 이것이 바로 T-55다.

T-54가 제2차 대전의 사상을 승계했다면 T-55는 유럽에서 전면전이 재발할 경우 전술 핵폭탄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후 대규모 기갑부대가 돌격을 펼쳐 적진을 신속히 점령하는 새로운 하지만 상당히 무서운 냉전시대의 전면전을 대비한 전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NBC 방호장치 정도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아 T-54/55라고 표기하거나 두 기종을 합해 흔히 T-55로 구분한다.

개발 이후 T-55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및 친소국가에 대량 공급되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중국에서 면허 생산도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 후속전차들이 등장하면서 2선급 전차로 위상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1950년대에 생산이 종료된 라이벌 M47, M48과 달리 198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생산되었고 현재도 일선에서 활약 중이다. 덕분에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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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