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3.1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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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39년 폴란드 전역 [6]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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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기병대의 이동 모습. 전차를 보고 달려든 구닥다리 군대라고 왜곡 선전되었지만 독일군에게 상당히 심각한 타격을 입혔던 폴란드군의 정예부대였다.

독일의 진격

히틀러의 예상대로 연합군의 대응이 미미함을 알게 된 독일은 더욱더 진격의 속도를 높였다. 바르타 강을 나란히 도하한 독일 제8군과 제10군은 9월 8일, 격렬히 저항하는 우치군을 양단하고 바르샤바로 향하는 초입에 위치한 요충지 우치(Łódź)를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좌우에 있던 포즈난군과 크라쿠프군(Armia Cracow)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더 이상 현지 사수가 불가능함을 인정한 폴란드군은 결국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개전 초기 폴란드로 진격하는 독일군 기갑부대.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최초의 실전이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무적의 독일 기갑부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9월 8일, 독일 북부집단군이 바르샤바 북쪽의 부크(Bug) 강 일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폴란드군 총사령관 리츠시미그위는 프랑스와 영국에게 좀 더 적극적인 대응을 요청했으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받았다. 이제 바르샤바로 향하는 모든 길이 독일군에게 차단된 상황이었다. 비록 정부와 군 최고지휘부는 개전 첫날 후방의 루블린(Lublin)으로 이전한 상태였지만 바르샤바는 여전히 폴란드의 심장이었다.

9월 9일, 바르샤바 서쪽의 코닌(Konin)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포즈난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해 독일 제8군의 좌익을 강타했다. 9월 19일까지 폴란드군 22만과 독일군 42만이 충돌한 이 격전을 브주라 전투(Battle of the Bzura)라 하는데, 폴란드 전역에서 벌어진 최대의 교전이었다. 처음에는 기습을 가한 폴란드군이 우세했으나 제공권을 앞세운 독일의 반격에 곧바로 역전당했다. 병력만도 2배 가까이 되었기에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정도였다.

브주라 전투에서 격파된 폴란드군 포병. 양측 합쳐 60만이 넘는 대군이 격돌한 최대 규모의 전투였지만 완벽하게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군이 폴란드군을 간단히 격파했다.

9월 12일이 되자 엄밀히 말해 고전적인 형태의 전선은 사라졌다. 독일군의 돌파에 밀려서 갈기갈기 찢겨나간 폴란드군은 주요 도시에 분산되어 항전하는 형태가 되었다. 바르샤바, 라돔(Radom), 시에들체(Siedlce), 비아위스토크(Białystok) 같은 곳에서 폴란드군은 엄중히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을 펼쳤다. 독일군은 전략 목표를 예정대로 확보했으나 이들을 소탕하느라 일부에서 전진이 늦춰지기도 했다.


영웅적인 항전

하지만 도시의 사수는 사실상 무의미했다. 군사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폴란드군은 전선을 단절시키지 않고 동부로 후퇴하며 시간을 버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나중에 소련군이 개입했기 때문에 동부로의 탈출은 결론적으로 무의미한 선택이 되었겠지만 너무 명분에 사로잡혀 도시를 사수하다가 많은 피해를 자초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폴란드인들의 굳센 의지와 노력을 결코 폄하할 수는 없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바르샤바 왕궁. 맹렬한 공격에도 20여 일을 버텼지만 결국 4만 명의 시민이 희생되며 바르샤바는 함락되었다.

제2차 대전의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폴란드 전역은 세세한 내용까지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저 독일이 일방적으로 폴란드군을 제압해 침공 한 달 만에 완승을 거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의외로 독일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장면이 많았다. 좌절하지 않고 각 거점을 요새 삼아 용감하게 방어전을 펼친 폴란드군의 항전 때문이었다.

9월 8일부터 20여 일간 독일이 뿌려댄 엄청난 폭탄의 비를 받아가며 싸워 4만 명의 시민이 희생된 바르샤바 방어전(Siege of Warsaw)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그 외에도 눈물겨운 장면이 많았다. 9월 1일 새벽, 최초로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의 수비대는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3,500여 명의 독일군을 상대로 9월 7일까지 버텼다. 이처럼 독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폴란드군의 모습은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만큼 많다.

하지만 폴란드가 전쟁에서 패하면서 이후의 왜곡된 선전에 의해 그들의 활약상이 폄훼된 경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구시대적인 폴란드군 기병대가 독일군 기갑부대를 향해 무모하게 돌격하다 전멸당했다는 크로얀티 전투(Battle of Krojanty)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폴란드군 기병대는 일부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독일 보병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을 만큼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구데리안이 자서전에서 그들의 용맹함을 가감 없이 거론할 정도였다.


뒤늦게 뛰어든 소련군

9월 17일에는 소련군이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당시 폴란드는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계획은 세워놓지도 않았을 만큼 소련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소련군은 유유자적하게 텅 빈 폴란드 동부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폴란드 못지않게 영국과 프랑스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연합국은 원론적으로 소련에게도 선전포고를 해야 했지만 불가능했다.

1936년 바르샤바를 방문한 가믈랭을 안내하는 리츠시미그위. 독일의 양편에 위치한 프랑스와 폴란드는 자연스럽게 동맹 관계가 되었지만 결국 프랑스는 폴란드를 포기했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는 폴란드가 갔던 길을 따라가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39년 폴란드 전역 [6] -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전쟁사)

오히려 이제 폴란드는 가망이 없으므로 더 이상 독일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단정한 프랑스는 자를란트까지 진군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처음부터 폴란드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아니었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의 당면 과제라고 생각했다. 폴란드군 총사령관 리츠시미그위는 항의했지만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은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간단히 답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의 행동은 독일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서부전선을 우려해 하루라도 빨리 폴란드를 굴복시키고자 9월 1일 함께 침공하자고 제의했지만 소련은 극동에서 진행 중인 할힌골 전투(Battles of Khalkhyn Gol)를 핑계로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전쟁의 끝이 눈앞에 보이자 숟가락을 들고 달려든 것이었다. 사전에 부크 강을 경계로 폴란드 분할을 합의했던 독일은 뒤늦게 등장한 소련군에게 일부 점령지를 고스란히 넘겨주어야 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조우한 독소 양국군 병사가 환담 중인 모습. 이들은 불과 2년 후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적으로 맞서게 된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소련군과의 정책 조정 기능을 담당한 OKW(국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사전에 정확한 언질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진군에만 힘쓰던 OKH(육군 최고사령부)는 경악했다. 격전을 치르고 어렵게 차지한 점령지를 소련군에게 내주게 되자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는 병사들이 쓸데없이 희생되었다고 분노했다. 렘베르크(Lemberg)처럼 점령 후 180km나 돌아서 나오는 곳까지 생기자 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독일이 수치를 당한 날’이라고 기록했다.


대전쟁의 서막이 되다

9월 19일, 시코르스키(Wladyslaw Sikorski)가 이끄는 폴란드 망명 정부가 프랑스에 수립되었다. 이제 폴란드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고 독일과 소련의 포위망을 벗어난 병력들은 리비우(Lwow)를 통해 루마니아로 탈출했다. 이들은 이후 영국을 기반으로 활약한 20만에 이르는 이른바 폴란드 서부군(Polish Armed Forces in the West)의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6일, 남부의 코츠크(Kock)에서 벌어진 마지막 항전을 끝으로 폴란드 전역은 막을 내렸다.

타넨베르크 작전에 의해 처형되는 폴란드인들. 독일은 침략과 동시에 계획적인 대규모 학살을 예정하고 있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123년 동안의 외세 지배 끝에 1919년 독립한 폴란드는 불과 20년 만에 다시 지도에서 사라졌다. 약 한 달 동안 폴란드군이 20만, 독일군이 5만, 그리고 뒤늦게 참전한 소련군이 1만의 전사상을 당했다. 따라서 이후 제2차 대전에서 벌어진 여타 전장과 비교한다면 기간이나 피해가 그다지 많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간만 놓고 본다면 이듬해에 있었던 프랑스 전역과 비교해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양상은 더 격렬했다.

하지만 폴란드 전역이 진정으로 무서웠던 것은 이후 등장한 지옥 때문이었다. 지도층 6만여 명이 처형된 타넨베르크 작전(Operation Tannenberg)처럼 독일은 침공과 동시에 학살을 저질렀다. 카틴(Katyń) 숲 사건에서 보듯이 소련도 25,000여 명의 포로와 시민을 학살해 암매장했다. 하지만 이후 독일 점령 기간 동안 600만의 폴란드인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 사건의 숫자도 오히려 미미한 수준이라 할 만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폴란드는 제2차 대전 내내 가장 참혹한 땅이 되었고 엄청난 폴란드인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전쟁 자체도 크고 무서웠지만 편협한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서 제2차 대전은 인류사 최대의 지옥이 되었다. <출처: (cc) C.Puisney at Wikimedia.org>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 폴란드 곳곳에 설치된 학살 공장에서 비명 속에 죽어갔는데 이중 300여만 명이 폴란드 국민이었다. 한 달 동안 겪은 전쟁 패배의 대가로는 너무나 가혹한 수준이었다. 원래 전쟁은 비참한 것이지만 제2차 대전은 이런 비이성적인 학살극이 너무 크고 많아서 더욱 잔인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지옥이었고 1939년에 짧게 벌어진 폴란드 전역은 그렇게 앞으로 6년 동안 계속될 파멸의 시대를 연 순간이 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