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3.0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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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39년 폴란드 전역 [5]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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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상공을 비행 중인 Ju 87 급강하폭격기. 폴란드군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야비한 사기극

8월 31일 오후 8시 12분, 슐레지엔 일대의 독일 라디오 방송이 갑자기 중단되고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더니 “폴란드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폴란드인이여 단결하라”라는 호전적 내용의 폴란드어 선언문이 약 4분간 낭독되었다. 그리고 11시경 괴벨스(Joseph Goebbels)가 베를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폴란드군이 국경을 무단 월경해 글라이비츠(Gleiwitz) 방송국을 점거하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모두 격퇴했다고 발표했다.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 중인 글라이비츠 방송국 건물과 방송 안테나

다음 날 아침 공개된 현장에는 사살된 폴란드군의 시신이 있었다. 당시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4명의 직원들은 무장한 폴란드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자신들을 포박한 후 무단으로 방송을 했지만 곧바로 출동한 독일군이 이들과 싸워 용감하게 물리쳤다는 생생한 증언을 했다. 묶여서 구금되었기에 교전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들 입장에서 진술한 내용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날 히틀러는 국회에서 “폴란드가 8월 31일 밤에 공격을 가해왔다. 우리 군은 반격 작전을 실행 중이며 폴란드는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마침내 전쟁이 개시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독일과 폴란드의 전쟁이었지만 이후의 역사에는 인류사 최대의 가장 잔혹했던 비극인 제2차 대전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그렇게 오지 말아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전쟁 전 게슈타포(비밀경찰) 대장 자격으로 폴란드 경찰총장 자모르스키(Kordian Zamorski)와 회동 중인 힘러. 전쟁 중 벌어진 나치의 대학살을 진두지휘한 최고 책임자로서, 폴란드 침공의 명분이었던 글라이비츠 방송국 사건도 기획했다. <출처: NAC>

그런데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글라이비츠 방송국 사건’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게슈타포 대장이었던 힘러(Heinrich Himmler)의 지시로 벌어진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졌다. 폴란드 군복을 입은 독일 비밀 요원들이 방송국을 점거해 왜곡 방송을 하고 나서 강제수용소에서 끌고 온 사형수에게 폴란드 군복을 입혀 사살한 것이었다. 이처럼 독일은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냈을 만큼 아직은 전쟁을 시작하는 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독일의 고심

유럽에서의 제2차 대전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히틀러를 제외하곤 설명하기 곤란하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독일은 그의 의지대로 전쟁의 판을 계속 키워갔고 결국 도가 지나쳐 패망에 이르렀다. 그런데 히틀러가 처음부터 전쟁이라는 수단을 거리낌 없이 꺼내 들 만큼 자신만만했던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그의 태도는 1940년 6월 강대국 프랑스를 굴복시킨 후부터 완전히 돌변한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의 도발에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의회에 나와 전쟁을 선포하는 히틀러.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그전까지 히틀러는 상당히 몸을 사렸고 군부의 눈치도 보았다.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강탈을 실행하기 전까지는 많은 고민을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곤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은 폴란드와 1:1로 붙어서 이길 자신은 있었다. 문제는 폴란드가 아니라 폴란드와 전쟁을 벌일 경우 간섭에 나설 주변 강국들이었다.

그래서 폴란드의 절반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소련의 협조를 얻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했다. 히틀러는 그들이 여전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자신했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 했다. 사실 부담감은 히틀러보다 군부가 더 했다. 나치 집권 초에 군부를 대표한 전쟁성 장관 블롬베르크는 1942년이나 되어야 독일이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히틀러의 도발 욕구를 막기에 급급했을 정도다.

이처럼 몸을 사릴 정도였으니 명분 없이 전쟁을 벌이기도 곤란했다. 당시 독일 국민들도 제1차 대전의 트라우마가 있었기에 무조건 전쟁을 반길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그전부터 영토 문제와 폴란드 내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의 핍박을 들먹이며 적대적 관계를 조성했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명분이 있어야 했다. 결국 글라이비츠 방송국 사건이라는 꼼수가 벌어졌고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전 세계를 불사른 불씨가 되었다.


초전의 양상

전쟁의 서전은 새벽 4시 40분, 대대적으로 출격해 폴란드의 주요 군사 거점을 맹폭한 독일 공군이 열었다. 동시에 친선을 명분으로 단치히를 방문해 기항 중이던 독일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이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의 요새를 기습 포격했고 전 전선에서 모든 준비를 완료한 육군의 대포들도 국경 인근의 폴란드군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이처럼 전쟁은 육해공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에 위치한 폴란드군 요새를 향해 기습 포격을 날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폴란드군 총사령관 리츠시미그위(Edward Rydz-Śmigły)는 현지 사수 원칙에 입각해 병력 대부분을 국경에 골고루 분산 배치해 놓고 있었지만 이런 전략은 전선의 단절을 쉽게 불러올 수 있었다. 특히 독일이 반환을 요구한 폴란드 회랑과 동프로이센 인근을 담당하고 있던 포모제군(Armia Pomorze)과 포즈난군(Armia Poznan)은 유사시 독일군에게 포위당하기 아주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우려대로 협공을 개시한 독일 북부집단군은 9월 3일,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를 장악했다. 일대를 담당하고 있던 포모제군은 앞뒤에서 달려드는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으나 독일의 진격로를 앞장서서 개척하던 독일 공군의 공습에 이동이 제한되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독일의 새로운 전략에서 공중 포대의 역할을 담당한 공군의 활약은 예상보다 상당히 뛰어났다. 구상해온 이론이 그렇게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프로이센에서 국경을 넘어 단치히로 진입하는 독일군. 독일계 주민이 90퍼센트가 넘는 곳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긴장감 없이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하지만 폴란드의 예상과 달리 정작 독일의 주력이 침공한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80만으로 이루어진 독일 남부집단군은 북쪽에 신경을 쓰고 있던 폴란드군의 허를 찔러 아직 동원이 완료되지 않은 우치군(Armia Łódź)을 밀어붙이고 성큼 바르타(Warta) 강을 건넜다. 지리적으로 바르샤바까지 마땅히 방어선을 삼을 만한 곳이 없던 폴란드군은 당황했다. 바로 그때 폴란드에 용기를, 반대로 독일에게는 충격을 안겨준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다

9월 3일, 그동안 독일을 어르고 달래만 왔던 영국과 프랑스가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이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이제는 확실히 깨달은 것이었다. 비록 곧바로 교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연합군과 독일이 전쟁 상태가 됨으로써 제1차 대전이 끝난 지 불과 21년 만에 강대국 간의 싸움이 재개되었다. 아직까지는 유럽에서만의 전쟁이었지만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이렇게 세계대전으로 증폭되었다.

영국의 대독 선전포고 소식을 듣고 폴란드 주재 영국대사관 앞에 모여 환호하는 바르샤바 시민들.

당시 독일군이 서부전선에 배치한 10개 사단은 프랑스군의 1할 정도에 불과해 연합군이 진격을 개시한다면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배제하고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히틀러도 근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 선전포고는 폴란드에 잘못된 신호의 역할을 했다. 일단 전력을 추슬러 후방에 방어선을 새로 구축해야 함에도 연합군의 참전 소식에 고무되어 더욱 현지 사수에 매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반면 독일은 예정보다 안쪽인 비스툴라 강 서쪽에서 주력들이 합류해 일단 작게라도 포위망을 먼저 완성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만일 서부전선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면 즉시 회군하기 위한 예방 조치였다. 그만큼 독일은 서부전선을 신경 쓰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어이없지만 연합국의 선전포고는 폴란드에게 후퇴를 유보하게 한 반면 독일에게는 일방적인 승리의 와중에도 뒤를 돌아볼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연합국의 선전포고 이후 만일을 위해 독일은 애초 계획보다 작게 비스툴라 강 서쪽에 포위망을 형성하는 대안도 고려했다. 하지만 폴란드군이 제때 후퇴하지 않아 신속히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애타는 폴란드와 달리 정작 연합군은 전쟁 의지가 없었다. 9월 7일, 40개 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제1군이 자를란트(Saarland)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지만 교전을 삼가고 단지 지그프리트 선(Siegfriedstellung)까지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준비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의지의 문제였다. 나중에서야 이때가 제2차 대전의 확전을 막을 마지막 호기였음을 알게 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