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23 10:07

글자크기

[전쟁사]

1939년 폴란드 전역 [4]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0 0
폴란드에서 제작한 7TP 전차. 독일의 1, 2호 전차보다 성능이 뛰어나 나중에 독일이 노획해 사용했다. 사실 지상군만 놓고 본다면 일방적으로 불리한 수준은 아니었을 만큼 폴란드군은 나름대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전쟁을 암시한 조약

서로를 증오하는 독일과 소련의 관계가 익히 알려져 있었기에 갑자기 전해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 즉 독소불가침조약은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독일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일부러 소련을 멀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독일과 소련의 관계가 자신들과 독일의 관계보다 더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한배를 탔다는 것은 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1940년 11월 베를린을 방문해 히틀러를 접견하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만에 속아 이듬해 6월 독소전쟁 발발 순간까지 독소불가침조약을 맹신했다.

히틀러는 이미 3월 초에 OKH(육군 최고사령부)에 지시해 백색 작전(Fall Weiß)으로 명명한 침공 작전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영국과 프랑스, 소련의 개입이 있기 전에 속전속결로 폴란드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 조약으로 소련과의 충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그 대가로 폴란드의 절반을 비롯해 발트 해 연안과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권리를 인정해야 했다.

욕심 많은 히틀러가 이처럼 상당 부분을 순순히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영국과 프랑스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과 한판 대결을 벌이기 위해서라도 폴란드를 먼저 제압해야 했는데, 만일 소련이 개입하고 이에 맞춰 독일 서쪽에서 연합국이 동시에 협공을 가한다면 곤란해질 것이 명약관화했다. 히틀러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이 사라지면 연합국도 함부로 전쟁에 뛰어들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욕심 많은 히틀러가 폴란드 동부와 발트 해 연안을 순순히 양보했던 것은 서쪽의 영국과 프랑스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루어 놓았을 뿐이었다. <출처: (cc) Mosedschurte at Wikimedia.org>

그러나 이틀 후인 8월 25일, 영국이 폴란드와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와 함께 자동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하고 무솔리니가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을 하자 히틀러는 다음 날 새벽 4시로 예정했던 전쟁 개시를 보류했을 만큼 겁을 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합국이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할 것이라 확신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은 9월 1일에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백색 작전

단지 군사적인 관점에서만 놓고 본다면 독일은 지리적으로 절대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이후 폴란드의 서부는 독일에 의해 이미 절반 이상 포위된 상황이었다. 지도만 놓고 보면 군사 문외한이라도 남과 북에서 동시에 전진해 폴란드군의 배후를 차단한 후 포위 섬멸하면 된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핵심은 얼마나 빨리 포위망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백색 작전은 이미 폴란드의 절반 이상을 포위하는 위치를 선점한 독일이 구사할 수 있는 당연한 전략이었다. 그런데도 폴란드의 대응은 너무 안이했다.

주공이 전선을 신속히 돌파해 적의 배후를 일거에 차단하는 포위전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다. 특히 독일은 ‘가마솥(Kesselschlacht) 전술’이라 부를 만큼 전통적으로 이를 상당히 애용해 왔지만 제1차 대전 초기 서부전선에서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무기의 발달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 보병과 기병에 의존한 고전적인 기동방법으로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패전의 멍에를 둘러쓴 독일은 이때의 교훈을 한시도 잊지 않고 새로운 전쟁 방법을 찾는 데 매진했다. 그 결과 소장파 장군들의 주도로 대규모 기갑부대가 공군의 엄호 하에 상대의 종심까지 신속히 파고 들어가 일거에 포위망을 완성한 후 항복을 받거나 섬멸하는 전략이 고안되었다. 그런데 훗날 전격전(Blitzkrieg)이라 불리게 되는 이 전략을 실제로 구현하기까지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1928년 차량에 캔버스로 만든 전차 모양을 씌우고 기동 훈련 중인 독일군. 비록 개발과 보유를 금지당했지만 이런 식으로 비밀리에 실력을 길러왔다. <출처: IWM>

우선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전차, 전투기 같은 중장비의 개발과 보유를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량에 캔버스로 만든 전차 모양을 씌워서 기동 훈련을 해야 했고 전차 개발도 늦었기에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할 즈음 제작된 1, 2호 전차는 주변국 전차와 비교하면 성능이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처럼 백색 작전은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비밀리에 갈고 닦은 독일의 새로운 전쟁 방법이 처음으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기갑부대를 둘러싼 논란

백색 작전에 따른 독일군의 침공 계획은 단순 명료했다. 폴란드군의 시선을 최대한 끌기 위해 전선 중앙을 현 상태로 유지시키는 동안 150만 명의 60개 사단을 두 개의 병단으로 나누어 폴란드 남북에서 동시에 진격해 조우하는 것이었다. 상슐레지엔(Upper Schlesien) 일대에 배치된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은 북쪽으로, 폴란드 회랑 서쪽과 동프로이센에 배치된 북부집단군(Heeresgruppe Nord)은 남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전쟁 개시와 함께 달려 나가는 독일 전차부대. 당시 2개 장갑군단이 편성되어 양 집단군에 각각 하나씩 배속되었으나 이 또한 전차사단과 차량화보병사단으로 구성된 실험적인 제대였다. 그만큼 기갑부대의 집단화에 대해 아직 독일 군부는 반신반의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39년 폴란드 전역 [4] -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전쟁사)

남과 북 양측에 포진된 이들 두 개 집단군은 비스툴라(Vistula) 강을 따라 신속히 전선을 가르고 들어가 바르샤바 일대에서 조우해 폴란드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한 후 일거에 소탕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속도였는데, 이때 양 집단군에는 각각 새롭게 편성되어 배치된 1개 (장갑)군단이 선봉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보병부대와 분리해 전선을 돌파하기로 예정되었지만 정작 독일 내부에서조차 상당히 말이 많았다.

제14(장갑)군단장이자 전쟁 전부터 독일 기갑부대의 건설을 주도한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기갑부대를 전선 돌파의 중핵으로 삼으려면 야전군급 정도의 제대 규모로 더욱 크게 집중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은 전차가 보병과 기병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며 연대 규모 이상의 기갑부대 편성조차 반대한 슈튈프나겔(Otto von Stülpnagel)처럼 부정적인 이들도 군부 내에 여전히 많았다.

파리를 방문한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를 안내하는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 슈튈프나겔(우). 그는 기갑부대의 집단화를 반대한 보수파의 핵심이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때문에 당시의 (장갑)군단은 상당히 실험적인 제대였고 사실 ‘장갑(Panzer)’이라는 부대명도 아직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만큼 독일은 전차와 기갑부대를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좋은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실 이번 침공전에 준비한 2,700여 대의 전차도 대부분 전차라 하기에 민망한 수준의 1, 2호 전차였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징발한 LT vz. 35, LT vz. 38까지 대거 동원할 만큼 독일의 상황은 충분하지 않았다.


폴란드의 부적절한 대응

폴란드는 1930년대 들어 독일로부터 추축국에 가담하라는 회유와 더불어 말을 듣지 않으면 침략하겠다는 협박도 함께 받아왔다. 또한 1920년대 초반에 전쟁을 벌여 망신을 준 소련이 어느덧 적백내전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력을 급신장하면서 상당히 위험한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군사력 강화 없이 이들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맹신하고 프랑스와의 군사동맹에 철저히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약 30여만의 상비군을 보유한 폴란드는 전쟁이 목전에 다가오자 서둘러 동원령을 선포했지만 예정대로 모두 충원되더라도 독일보다 적은 100만 정도였고 이마저도 완편하는 데 2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병력보다 더 부족한 것은 장비였다. 전차와 야포가 독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특히 공군력의 양적, 질적 격차가 심각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123년 만에 독립을 달성하고 그 이후 영토확장 전쟁도 불사해서 그런 것인진 모르지만 단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며 주력 대부분을 국경 부근에 분산 배치했던 것이다. 평원 위에 자리 잡은 폴란드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방어선을 구축할 곳이 많지 않았으므로 이런 선택은 상당히 위험했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전략적으로 독일에게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비행장에 정렬된 폴란드 공군의 자국산 PZL.23 폭격기와 PZL P.11 전투기. 독일 공군기에 비해 성능과 수량 면에서 뒤졌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군의 가장 잘못된 선택은 현지 사수 전략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공군력은 절대 열세였지만 그래도 지상군 전력이 독일의 절반 이상은 되었기에 중요 거점을 선택해 탄력적으로 사수하는 식의 방어 전략만 제대로 구사하면 독일을 곤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이 곧바로 서부전선에 제2전선을 만들어 줄 것이라 낙관해 오로지 현지 사수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선택은 독일의 전략에 스스로 말려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