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1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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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39년 폴란드 전역 [3]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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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나 소련과 맞서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폴란드도 나름대로 군사 강국이었다. 1936년 사노크(Sanok)에서 퍼레이드 중인 폴란드 제22산악사단의 모습. 나치 독일의 상징이기도 한 스바스티카를 부대 마크로 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독일의 계속되는 도발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손에 넣은 지 보름도 안 된 1939년 3월 28일, 지난 1934년에 체결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의 파기를 선언하자 전 세계는 히틀러의 넘치는 도발 욕구에 경악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추하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강탈할 때 보여주었던 독일의 태도가 그대로 재현될 것임은 명확했다. 독일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차지하려 들 것이고 그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 틀림없었다.

독일계 주민이 90퍼센트인 단치히 자유시를 폴란드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곳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출처: (cc) Barbara Maliszewska at Wikimedia.org>

폴란드 독립 당시부터 양국 간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가 당장 시빗거리가 되었다. 특히 독일계 주민이 인구의 90퍼센트에 이르지만 실질적으로 폴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단치히가 핵심이었다. 굳이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모든 독일인들이 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폴란드가 거부하면 충돌도 불사해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식상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유시를 합병하려면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이미 독일은 1938년 10월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에 대한 치외법권을 폴란드에 요구하고 더불어 단치히를 독일에 귀속시키는 데 동의하면 폴란드가 25년간 자유롭게 도시와 항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고 했다. 그럴듯한 제안 같았지만 만일 이를 수용하면 폴란드가 바다로 나갈 길을 독일이 마음대로 막아버릴 수도 있었다. 당연히 폴란드는 독일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의회 연설을 통해 독일의 제안에 거부 의사를 밝히는 폴란드 외무장관 요제프 벡(Józef Beck)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과정에서 보았듯이 만일 폴란드와 국제 사회가 이를 수용하더라도 독일은 이후 더 많은 요구를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히틀러는 폴란드 영토에 거주하는 게르만족들이 탄압받고 있다는 주장을 수시로 하며 자국민을 선동하는 중이었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만이 아니었다. 처음 언급처럼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폐기하고 위협을 가하자 상황은 상당히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냉정한 현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더 이상의 도발 행위를 자제하라고 경고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독일의 막무가내는 그동안 계속 유화정책으로만 대했던 연합국의 자세도 크게 한몫을 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후 체제를 출범시켰으면 1923년에 배상금 지연 문제를 빌미로 루르(Ruhr) 지방을 점거했던 것처럼 끝까지 통제하고 책임져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연합국은 독일의 깡패 행위를 방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르 지방의 중심지인 도르트문트를 2년간 점령한 후 1924년 철군하는 프랑스군. 이처럼 독일을 무력으로 압박할 수 있었던 프랑스의 용기와 힘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가장 큰 이유는 대공황의 여파 때문이었다. 사상 초유의 엄청난 경제 한파는 가장 먼저 국방비의 감축을 불러왔고 그만큼 자신감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대공황의 혼란을 호기로 삼아 정권을 잡은 나치는 대외 팽창을 통해 난국을 해결하려고 대대적인 군수산업 육성과 군비 증강에 나섰다. 1930년대 중반은 바짝 움츠러든 연합국과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팽창하려는 독일의 상반된 모습이 교차한 시기였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예에서 보듯이 연합국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약소국의 주권을 함부로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주데텐란트 할양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지켜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폴란드에게 프랑스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사이였고 영국은 원조를 약속한 우호국이었지만 앞의 예에서 보듯 이들이 독일을 확실히 견제하지 못했기에 결국 공은 폴란드에게로 넘어왔다.

뮌헨 회담 당시의 주역인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사기극에 놀아났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후 독일을 제재하는 데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이러한 국제 사회의 냉정한 현실과 더불어 독일의 위협이 가시화된 이상 폴란드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먼저 독일의 동맹이 되어 안위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었다. 사실 폴란드도 극우 독재정권이 통치하고 있어 이념만 놓고 본다면 나치와 유사점이 많았다. 만일 독일과 한배를 탄다면 자칫 괴뢰국의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었지만 침략이나 극단적인 탄압은 모면할 수 있었다.


굴복이냐 항전이냐

더구나 폴란드에게 서쪽의 독일만큼 위험스러운 존재는 동쪽의 소련이었는데, 나치는 폴란드보다 소련을 더욱 적대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치는 그들이 주도한 방공 협정(Anti-Comintern Pact)에 폴란드의 동참을 촉구하기도 했다. 여기에 가담했다면 당장의 위기를 해소하고 안보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독일의 다른 침략 정책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연합국 및 소련과는 적대관계로 바뀔 것을 각오해야 했다.

1938년 소련 견제를 목적으로 폴란드군이 볼히니아(Volhynia) 인근에서 벌인 군사 훈련을 참관하는 독일군 옵저버와 이를 안내하는 폴란드군 장교. 당시 폴란드는 반소 파시스트 성향의 모시치츠키(Ignacy Mościcki)가 정권을 잡고 있어서 나치와의 연대 가능성도 충분했다.

루마니아는 이러한 길을 택한 대표적인 나라였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독일과 싸웠고 제2차 대전 초기까지만 해도 패망한 폴란드군의 탈출로를 제공해 주었을 만큼 루마니아는 연합국에 우호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1940년 프랑스가 몰락한 후 독일 편에 붙은 헝가리에 트란실바니아, 불가리아에 도브루자, 소련에게 베사라비아, 북부 코비나를 강탈당하자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전격적으로 추축국에 가담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자존심이 센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 폴란드인들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결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는 123년 만에 독립한 신생국이었지만 국토의 크기가 독일과 비슷하고 인구는 절반인 3,500만에 이르러 나름대로 대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수시로 주변국과 군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을 만큼 힘을 과신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협박하자 격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독일이나 소련과 맞서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폴란드도 나름대로 군사 강국이었다. 1936년 사노크(Sanok)에서 퍼레이드 중인 폴란드 제22산악사단의 모습. 나치 독일의 상징이기도 한 스바스티카를 부대 마크로 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제2차 대전 초기까지 히틀러가 침략 명령을 하달할 때마다 가장 반발하고 나섰던 세력이 군부였다.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 1938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그리고 이후 1940년의 프랑스 침공 때에도 한결같이 군부는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다며 군사 행동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런 군부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명령에만은 환호했을 만큼 양국의 사이는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였다.


전쟁으로 가는 길

이처럼 두 열차가 마주 보고 달려오자 의외로 몸이 먼저 달아오른 나라는 소련이었다. 독일이 폴란드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던 것처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자신들이 되찾아야 할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독일이 폴란드를 독차지하면 자신들이 확보할 영역까지 사라질 것이란 우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보다 더 적대적인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이었다.

1938년 공군 부대의 사열을 받는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 이처럼 독일은 수시로 군사 행사를 벌여 무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 선전하고는 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반면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섰던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군사동맹을 맺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다. 단지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때 독일의 뒤통수를 강타할 위치에 폴란드가 있어서 중요하게 여겼던 것뿐이었다. 사실 독일은 나중에 프랑스를 처단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폴란드를 먼저 정리해야 했다.

이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독일이 폴란드를 차지하면 곤란을 겪을 나라들이 많았다. 이런 점을 깨달은 소련은 4월 16일 영국과 프랑스에게 군사 동맹을 맺자고 전격적인 제안을 했다. 연합국은 아무리 독일의 팽창을 저지하는 게 급해도 독일 못지않게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힌 소련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기에 제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정작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참관 하에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와 독소불가침 협정문에 서명하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 세계를 경악시킨 거래였다.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연합국이 전쟁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4월 28일, 영독해군조약을 폐기하고 한 달 후인 5월 22일, 이탈리아와 강철조약을 체결했다. 제1차 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가 그래도 중간자적인 역할을 해주리란 기대감이 깨지자 다급해진 영국과 프랑스는 8월 11일, 소련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하지만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