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0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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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39년 폴란드 전역 [2]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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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3월 15일 전격적으로 프라하를 점령한 독일군. 히틀러는 불과 5개월 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다.

우리 시대의 평화

체코슬로바키아는 침략 의도를 분명히 한 독일을 단독으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즉각 독일계 주민들의 감시에 들어감과 동시에 국경 방어의 강화에 나섰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인란트 재무장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제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새로운 체제의 중핵인 프랑스는 독일과의 충돌을 꺼렸다. 또 하나의 핵심 당사자인 영국도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938년 9월 22일, 독일의 위협을 규탄하려고 프라하에 집결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 하지만 이들의 의지는 강대국들의 농간으로 좌절되었다.

8월 12일, 독일이 주데텐란트 할양을 명분으로 동원령을 선포하자 9월 7일, 프랑스도 동맹국 지원을 명분으로 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실제로 군대를 준비한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단지 요식적인 행위에 그쳤고 영국은 여전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9월 13일,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에 나서며 곧바로 제압되었다. 사실 이는 구실을 만들기 위한 독일의 모의에 의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시했고 이제 전쟁은 명확해졌다. 하지만 정작 군부가 반대를 표명했을 만큼 독일은 준비가 완료된 상황이 아니었다. 지난 3월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에도 허겁지겁 징발한 상당수의 민간 차량을 이용해 군대를 이동시켰을 만큼 여전히 독일군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움직임만으로도 영국과 프랑스는 놀랐고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약소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히틀러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뮌헨 협정 체결 후 귀국해 평화를 지켰다고 자화자찬하는 체임벌린

9월 30일,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내려진 결론은 더 이상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의 주장을 모두 수용한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는 처음부터 배제되었고 그렇게 약소국의 많은 영토가 전쟁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강제 할양되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를 만들고 귀국한 영국 수상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은 공항에서 협정 문서를 들고 득의만만하게 외쳤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다.”


찢겨나간 약소국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회담을 벌여 목적을 달성한 히틀러가 유일하게 양보한 것은 감시단의 입회 하에 열흘 뒤인 10월 10일에 합병하겠다는 것이었다. 한술 더 떠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정당성과 명분을 살리기 위해 주데텐란트 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류인 체크(Czech)족과 슬로바크(Slovak)족이 점유한 곳을 제외한 여타 지역을 주변국들에 함께 넘기는 만행을 자행했다.

1938년 10월 10일 주데텐란트에 입성하는 독일군을 환영하는 독일계 주민들. 평화스러워 보이는 모습과 달리 폭력으로 얼룩진 암울한 미래가 저들의 운명이었다.

베르사유 체제의 명분이기도 한 민족자결주의를 따른다는 이유를 내세워 헝가리인이 많이 사는 루테니아(Ruthenia)와 남부 슬로바키아를 헝가리에, 폴란드인들이 대다수인 북부의 자올지에(Zaolzie)를 폴란드에 넘겼다. 그러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국경 분쟁을 근원적으로 해결했다고 자화자찬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결과에 베네시(Edvard Beneš)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사임했다.

협정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고 쓰여 있었지만 정작 영국과 프랑스는 어떤 방법으로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이 이처럼 급속하게 대외 팽창에 나설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단지 전쟁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까지 독일도 전쟁을 벌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1937년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 당시 분열 비행 중인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 이처럼 수시로 행해진 무력시위 때문에 연합국은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재군비 이후 최강의 군대를 보유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당장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독일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에서 혹독한 경험을 했던 연합국은 독일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한 반면 자신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따라서 일단 전쟁을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것이고 당연히 약소국의 주권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멈추지 않은 도발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의 평화를 지켰다고 안심했지만 불과 5개월 만에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국토의 3할을 빼앗긴 체코슬로바키아는 체크족과 슬로바크족의 반목으로 국정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독일 나치가 슬로바크족의 후견인 행세를 하며 1939년 3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전격 점령했다. 독일은 체코를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에 병합하고 슬로바키아에는 괴뢰국을 세웠다.

1939년 3월 15일 전격적으로 프라하를 점령한 독일군. 히틀러는 불과 5개월 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다.

세계는 멈추지 않는 독일의 야욕에 경악했다. 위기가 해소되기는커녕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독일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당장 강경하게 대처하고 군비 증강에 나서야 했지만 문제는 이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적거렸다는 사실이다. 연합국의 이런 연이은 유화적인 태도는 히틀러가 겁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순식간에 중부 유럽을 석권한 히틀러의 시선은 이제 동쪽의 폴란드로 향했다. 독일의 주적은 이념적으로는 나치와 반대편에 있는 볼셰비키 소련이, 감정적으로는 패전국에게 감당하기 힘든 멍에를 씌워 원한이 사무친 프랑스였지만 사실 폴란드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중추인 프로이센과 폴란드의 전성기의 영토가 상당 부분 겹칠 만큼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39년 3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독일에게 넘겨주고 보호령의 수반이 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Emil Hácha)와 회담 중인 히틀러. 이제 그의 시선은 폴란드로 향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사실 제2차 대전을 떠나서, 역사적으로 어깨를 맞댄 국가들의 사이가 좋았던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독일과 폴란드 또한 전성기에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안겨주곤 했는데, 제1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은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역사에서 사라진 지 123년 만인 1919년에 독립했지만 그때부터 패전으로 인해 사기가 꺾인 독일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키곤 했다.


다음 목표로 떠오른 곳

지리적으로 정확하게 선을 긋기 곤란한 평원 지역에 건국되다 보니 폴란드는 처음부터 국경 설정에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폴란드인들이 주류인 지역을 연결해 영토가 정해졌고 이때 바다로의 출구를 확보해 주려고 서프로이센에 이른바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과 단치히 자유시(Free City of Danzig, 현 그단스크)가 설치되면서 순식간에 동프로이센이 독일의 역외 영토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1939년 제2차 대전 발발 전의 폴란드 지도. 해상 출구 확보를 위해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가 생기면서 독일 국토가 분리되었다. <출처: (cc) Joanna Kośmider at Wikimedia.org>

이처럼 폴란드는 출발부터 독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탄생했지만 이후에도 수시로 도발적인 행동을 보여 독일을 자극하곤 했다. 그런데 폴란드의 이런 행동으로 고통을 받은 건 독일만이 아니었고, 폴란드 주변국들이라면 예외 없이 겪은 일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폴란드의 권력자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가 주도한 미엥지모제(Międzymorze) 정책과 관련이 많다.

독일과 소련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의 안전을 위해 주변 민족들과 뭉쳐서 연방 형태의 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정책이 미엥지모제다. 그런데 소수라도 폴란드인이 거주하는 곳은 폴란드의 영토에 속해야 하고 새로운 대국가의 주체 또한 당연히 폴란드가 되어야 한다는 국수적인 사고에 기초한 것이 문제였다. 16세기의 전성기를 다시 구가하겠다는 일종의 팽창 정책이어서 당연히 주변 국가들과 마찰이 벌어졌다.

1920년 네만 강 일대에서 소련군을 격퇴 중인 폴란드군. 폴란드는 적백내전이 한창인 소련과 전쟁을 벌여 국토를 30퍼센트 이상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방을 향한 이런 팽창은 주변국들과의 불화를 불러왔다.

대표적으로 독립 직후인 1919년 내전으로 정신이 없던 소련을 공격해 국토를 확장했고 이웃한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와도 요지를 놓고 수시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흔히 제2차 대전의 발발 원인 중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독일의 팽창 야욕인데, 규모가 조금 작았다 뿐이지 1920년대의 폴란드도 이에 못지않았고 그 와중에 소수민족이 차별을 받았다. 독일과 폴란드는 이처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오래전부터 구원(舊怨)이 쌓여 있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