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0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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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39년 폴란드 전역 [1]

파멸의 시대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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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폴란드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직접 사열하는 히틀러.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보복이 자초한 위기

제1차 대전은 전 세계에 예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아픔을 남겼다. 전쟁의 골이 깊었기에 평화라는 산을 쌓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 질서를 구축하면서 패전국에 대한 보복이 너무 컸다는 점이 문제였다. 전쟁에서 패한 이에게 가해지는 제재는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도를 넘는 보복은 불과 20년 만에 더 큰 전쟁을 불러온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19년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있었던 전후 처리 회의를 묘사한 그림. 1871년 이곳에서 탄생을 선포한 독일 제2제국은 능욕 수준의 제재를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대한 독일의 분노는 대단했고 결국 제2차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도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만일 충분히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면 인류사의 비극은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쟁을 계속 벌였다면 결국 패했겠지만 종전 당시의 모습은 독일이 패자(敗者)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은 동쪽으로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세력권에 넣고 서쪽으로는 프랑스 북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랬던 독일에 1919년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따라 가해진 제재는 승전국 내부에서조차 너무 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참에 철저하게 이빨을 뽑아 놓아야 항구적인 평화가 달성될 것이라며 독일을 옭아매는 데 앞장섰던 나라는 바로 프랑스였다. 50년 전 보불전쟁 패배의 망신을 겪었고 제1차 대전에서도 가장 심각한 인적, 물적 피해를 당했던 프랑스의 고집을 꺾지 못하면서 전후 처리는 결국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직접 사열하는 히틀러.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독일에 가해진 제재는 프랑스의 의도대로 전쟁을 예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복수심을 키워 새로운 위기를 유발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마침내 독일은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독일의 침략이 대전쟁(Great War, 제1차 대전)을 몇 배나 능가하는 인류사 최대 비극의 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파멸의 시대였던 제2차 대전의 시작을 알린 폴란드 전역(Invasion of Poland)이다.


전쟁 개시일에 대한 논쟁

많은 자료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을 제2차 대전의 개시일로 언급하지만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을 종전일로 보는 데는 이의가 없는 반면,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는 제2차 대전이 처음부터 피아가 구분되어 한 번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41년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립국이었고 독일과 소련은 동맹국이었을 만큼 전쟁의 처음과 끝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영어로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 할 만큼 세계사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을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참전이 있기 전까지는 세계대전의 일부가 아닌 변방 국가들의 분쟁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다.

제2차 대전은 크게 아시아-태평양 전구(戰區, Theater)와 유럽-아프리카 전구로 구분하지만 사실 두 전쟁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 전구는 주요 교전국인 중국과 일본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7월 7일을 그 발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본다면 만주사변이 벌어진 1931년은 물론, 이론적으로 1894년의 청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한 1941년 12월 7일을 아시아-태평양 전구의 개시일로 보는 이유는 이때부터 강대국 간의 직접 대결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유럽-아프리카 전구도 마찬가지다. 제2차 대전 중 연합군이 최초로 전략적 승리를 거두고 해방시킨 추축국 점령지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인데, 이곳에 대한 이탈리아의 도발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유럽-아프리카 전구의 시작도 훨씬 앞으로 당길 수 있다.

1936년 아비시니아를 침공하는 이탈리아군. 이후 1941년 영국이 이탈리아군을 격퇴하고 아비시니아를 해방시킨 동아프리카 전역은 제2차 대전의 일부로 다루지만 시작은 제2차 대전과 별개로 본다.

이처럼 많은 논쟁과 이견이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유럽-아프리카 전구를 포함한 제2차 대전 전체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 또한 이후 역사에 남긴 독일의 행위와 역할, 그리고 독일을 상대한 소련과 연합국의 대응이 이전의 국지전이나 지엽적인 전쟁들과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폴란드는 비극적인 제2차 대전의 시작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될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다.


복수극을 준비한 독일

제2차 대전의 발발과 관련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히틀러다.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며 정권을 잡은 그는 1935년 재군비 선언(Aufrüstung der Wehrmacht)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군사력 팽창에 나섰다. 동시에 지난 전쟁의 패배로 잃어버린 일부 주권과 영토를 회복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게르만 민족 국가의 건설을 명분으로 대외 진출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제1차 대전 종전 후 축소된 독일 영토. 히틀러는 이곳의 회복은 물론 게르만족이 사는 주변 일대를 포함한 대제국의 건설을 주장했고 이것이 제2차 대전의 비극을 불러왔다. <출처: (cc) User:52 Pickup at Wikimedia.org>

1936년 3월 7일, 전격 단행된 라인란트 재무장(Remilitarization of the Rhineland)은 그러한 침략의 시작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당황했으나 '독일군이 그들의 영토에 진주한 것'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대응을 하지 않았다. 사실 라인란트 재무장은 베르사유 조약과 이를 후속한 로카르노 조약(Pact of Locarno)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였으므로 연합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명분은 충분했다.

더구나 독일을 군사적으로 압도하던 시기여서 결심만 한다면 독일군을 라인란트에서 몰아낼 수도 있었다. 독일 내부에서도 히틀러를 제외하면 외교, 국방 당국자들 모두가 반대했을 만큼 실행을 두려워했었다. 아직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히틀러가 당시 독일군의 수장인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에게 만일 프랑스의 반격이 개시되면 교전을 삼가고 즉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동의를 얻었을 정도였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라인란트에 진주하는 독일군. 연합국은 수수방관했지만 제2차 대전을 가장 쉽게 막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유사시 즉각 후퇴할 수 있도록, 동원된 37,000여 명 중 강을 건너 라인란트로 진군한 병력은 1만에 불과했고 이후 히틀러도 작전 개시 전날이 일생에서 가장 초조한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몸을 사렸다. 하지만 연합국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던 히틀러의 예상대로 모든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제2차 대전이라는 인류사 최대의 비극을 가장 쉽게 막을 수도 있었던 순간이 그렇게 지나갔던 것이다.


전쟁 전의 침략들

이처럼 제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보여준 애매모호한 행동은 히틀러의 도발 욕구를 점점 부추겼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이 게르만 민족의 국가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1938년 합병(Anschluss) 당한 오스트리아였다. 표면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내부의 자발적 결단에 의한 정치적 행위로 포장되었지만 3월 12일 무단 월경한 독일군이 군사적으로 점거하면서 상황이 종료된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요구가 있었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유유자적하게 비엔나에 입성한 독일군. 단지 교전이 없었을 뿐 명백한 군사적 침략 행위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이에 용기를 얻은 히틀러가 독일 주변의 게르만족 거주 지역으로 영향력 확대를 꾀하자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일차적인 목표가 되었다. 제1차 대전 후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전쟁 중 연합국에서 이탈해 단독 강화한 소련의 옛 영토 사이에 수많은 신생 독립국이 생겼다. 민족자결주의를 따른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원론적으로 패전국과 소련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연합국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민족별로 정확히 나누어 국경선을 정할 수는 없었고 그 와중에 불가피하게 해당 국가 내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사례도 많았다. 제2차 대전사에서 독일의 침략을 부각하다 보니 종종 간과되는 사실인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지에 사는 독일계 주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독일이 자국 내의 소수 민족을 탄압했던 행위에 비하면 약과에 불과했다.

1933년 유태인 변호사를 조롱하는 나치 돌격대(SA). 나치는 이처럼 독일 내의 소수 민족을 혹독하게 탄압했지만 주변국의 게르만족이 차별을 받는다고 선동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어쨌든 소수 민족에 대해 그다지 관대하지 못했던 당시의 보편적인 시대상은 침략 명분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히틀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합병을 완료한 직후부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약 300여만의 게르만족이 몰려 사는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동시에 독일계 주민들에게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전복시키라고 대놓고 선동을 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