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2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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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16년 솜 전투 [6]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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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 전투 당시 방독면을 착용하고 경계 중인 영국군의 모습. 제1차 대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참호, 기관총, 가스를 한 장에 담은 유명한 사진이다.

희생의 대가

폭이 30여 km에 불과한 전선에 무려 50만의 대군을 투입해 벌인 공세의 결과가 2km 전진이라면 이를 성공이라 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어 왔던 솜 전투의 양상을 반추한다면 헤이그가 첫날의 전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의 대응 강도가 이전보다 약해지고 영국군의 손실 비율도 줄어들었기에 그 이후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헤이그는 공세지향적인 성격답게 이튿날부터 쉴 새 없이 공격을 가했다. 비록 전차의 전과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는 이외에도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특히 공격 시에 보병들을 가까이에서 엄호해 준 루이스(Lewis) 경기관총이나 진지 공격에 편리한 밀스(Mills) 수류탄 같은 경우는 상당히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혹독한 환경은 이처럼 새로운 전투 수단의 등장을 이끌었다.

9월 27일, 지난 석 달 동안 공략에 실패하며 엄청난 희생을 야기했던 티에프발의 점령은 이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알려준 전주곡이었다. 전선 대부분에서 독일군이 밀려나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확보한 제1방어선의 요충지였던 티에프발의 함락은 그만큼 의의가 있었지만, 사실 후방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버린 독일의 입장에서는 사수할 만한 가치가 사라진 이후였다.

1916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있었던 솜 전투의 상황도. 연합군, 특히 영국군은 엄청난 희생을 당했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특히 BEF의 희생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돌격 중에 산화했다. 다만 이전보다 그 비율이 조금 줄어들었고 희생한 만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었다. 연합군이 처음 솜 전투를 구상했을 때의 목적 중 하나가 독일군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BEF의 희생이 더 많았다.


어쨌든 끝을 봐야 했다

10월 1일에 이르러서는 제3방어선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연합군의 진격은 다시 멈추었다. 보름 동안 계속된 공세로 말미암아 지치기도 했지만 독일의 방어선도 강화되었던 것이다. 당시 독일은 베르됭 공략을 포기하고 수세로 전환하면서 전략적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제외하고 연합군의 대공세에 협공을 당한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반적으로 상당히 선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돌격을 저지하는 독일군. 1916년 전략적으로 연합군의 협공을 당한 불리한 상황에서 상당히 선전했다.

이른바 브루실로프 공세(Brusilov Offensive)로 알려진 러시아의 대공세를 받아내면서 9월 20일 동부전선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5월의 트렌티노 공세(Trentino Offensive)를 시작으로 동맹국을 압박하던 이탈리아군의 공세도 둔화시켜 남쪽의 알프스 전선도 소강상태로 만들었다. 덕분에 서부전선을 다시 강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헤이그도 다른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이 동원되기 전에 어떻게든 솜 전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10월 13일,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으로 영국군의 공세가 재개되면서 티에프발 후사면의 앙크르 고지(Ancre Heights) 일대에 독일군이 구축한 레지나(Regina) 참호선을 놓고 격전이 벌어졌다. 때마침 폭우가 이어지면서 피탄공으로 뒤집힌 전선은 발을 딛기 힘든 늪지대로 변했다.

늪처럼 변해 버린 전선의 모습. 전쟁을 쾌적한 상황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런 환경 때문에 병사들의 비전투 손실도 극심했다.

그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영국 제4군은 11월 7일, 마침내 난공불락 같았던 르 사르(Le Sars)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제4군이 모든 것을 쏟아붓고 멈추자 후속한 제5군이 공세의 대미를 장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후방군으로 불리다 전력이 대폭 증강되며 부대명이 변경된 제5군은 11월 13일 보몽아멜(Beaumont Hamel) 탈환을 위해 앙크르 강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전투

티에프발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보몽아멜의 보루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은 무려 열흘이 지난 11월 23일이었다. 이곳의 공략에 나선 영연방 뉴펀들랜드(Newfoundland) 대대는 병사 전원이 전멸할 정도였다. 이로써 연합군은 보몽아멜에서 약 30여 km 동남쪽의 프렌(Fresnes)에 이르는 선까지, 종심으로는 최대 10여 km까지 전선을 밀어붙였다. 그러고 나서 전선은 마치 공기 빠진 풍선처럼 급속도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뉴펀들랜드 대대원 814명 전원이 전사한 보몽아멜 전투 기념물. <출처: (cc) Beatpoet at Wikimedia.org>

물론 이후에도 쉬지 않고 교전이 벌어졌지만 많은 자료에서 이때까지를 솜 전투로 본다. 단지 지도상에 그어진 점령지만 놓고 따진다면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5개월간 벌어진 전투의 승자와 패자를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우선 독일군이 약 40만 정도의 전사상자, 실종자, 포로가 발생했던 반면, 연합군은 영국군이 약 40만, 프랑스군이 약 20만 정도의 인명피해를 보았다.

또한 연합군이 최대 95개 사단을 동원했지만 여러 곳에서 동시에 격전을 치렀던 독일은 그 절반 정도인 50여 개 사단만 투입했다. 아무리 서부전선이 공격자보다 방어자가 유리했던 싸움터였다 하더라도 독일군이 선전한 것이 맞다. 특히 반대 입장에서 치러진 베르됭 전투에서 공세를 벌인 독일군의 피해가 수비에 나선 프랑스군보다 조금 적었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연합군이 솜 전투의 승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돌격 준비를 하는 프랑스 제6군 병사들. 솜 전투를 주도한 BEF의 엄청난 피해에 가려졌지만 프랑스군의 사상자도 무려 20여만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보다 연합군이 공격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이긴 싸움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1915년 겨울 공세를 처음 구상했을 당시에 최종 목표로 삼았던 바폼과 페론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공격을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두 도시를 연결하는 가도를 점령했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그 정도로 엄청난 피를 갖다 바치고 과연 얻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닫히지 않은 지옥의 문

그렇다고 독일이 승자가 아니라는 점 또한 확실했다.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지 5개월 동안 그 좁은 싸움터에서 입은 40여만의 피해 또한 경악할 수준임에 틀림없다.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열심히 잘 싸웠다는 점을 제외하면 독일도 피를 퍼붓는 잔인한 경쟁에서 입은 피해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도 순순히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연합군이 솜을 공세 방향으로 선정한 것은 맞았다고 볼 수도 있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베르됭 전투에서 당황한 독일은 솜 전투에서 곤욕을 치르며 이제 제1차 대전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는 “완전히 탈진하여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토로했고 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는 “전쟁 전에 육성된 정예 중에서 그나마 살아있던 마지막 병사들이 솜에서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참호전의 상징인 무인지대는 텅 비어 있을 때가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돌격하다가 죽어간 병사들로 인해 이곳이 시체지대로 변하면 최전선 지휘관들의 협의에 의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임시 휴전이 벌어졌다. 대개 반나절 정도의 정리 시간이 끝나고 양측 참호 사이가 다시 깨끗한 무인지대가 되면 이곳을 또 한 번 시체로 가득 채우기 위한 싸움이 반복되었다. 솜 전투는 바로 이런 잔인한 장면이 가장 많이 등장한 지옥의 싸움터였다.

시신 정리를 위해 임시 휴전 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 시체지대가 무인지대로 바뀌고 나면 곧바로 살육이 재개되었다. 지옥 같은 솜 전투의 일상이었다.

5개월 동안 양측 합쳐 100여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친 솜 전투가 시작된 1916년 7월 1일은 지옥의 문을 연 날이었다. 살상 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잔인한 인간들은 거리낌 없이 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것을 언제, 어떻게 닫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열어 놓고 놀라서 5개월 후에 일단 쉬기는 했지만 이 문이 완전히 닫히려면 앞으로도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