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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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16년 솜 전투 [5]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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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공격하는 독일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사실 성능이 뛰어나서라기보다 낯설어 당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응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공세를 중단한 독일

1916년 9월, 당시 독일은 베르됭에서 펼친 공세가 실패로 끝날 것이 확실시되었고 계속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면 오히려 이곳과 솜에서 연합군에게 밀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의 진격을 막아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붕괴되면서 근심만 늘어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남쪽에서는 원래 삼국동맹(Dreibund)의 일원이었지만 1915년 연합국에 전격 가담한 이탈리아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1916년 5월 구휼 음식을 배급받는 베를린 시민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방을 지원하느라 민간의 삶은 어려워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다로 나가는 길이 꽁꽁 막혔다는 점이었다. 세계 2위를 자랑하던 독일 해군은 그해 6월 유틀란트(Jutland) 해전에서 영국 해군과 정면으로 충돌했지만 열세를 인정하고 바다를 포기했다. 이제 몇몇 중립국을 통하는 방법을 제외하고 독일이 외부에서 물자를 도입할 수 있는 통로는 사라져 버렸다. 현실적으로 더 이상의 확전은 전쟁 물자와 예비대가 부족한 독일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루덴도르프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전쟁이 장기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병력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으니 화력, 즉 무기를 통해 간격을 메우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전시 경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생산과 민간의 소비를 조절하고 이를 군수 분야로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들에게 내핍과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서 얼굴마담 격인 힌덴부르크의 명의로 이른바 '힌덴부르크 프로그램(Hindenburg-Programm)'을 시행했다.

기관총을 들고 진지를 이동하는 독일군. 병력 부족을 우려한 루덴도르프는 소모를 줄이기 위해 기동 방어 전술을 택했다.

독일이 나중에 다시 공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생산을 늘리면서 동시에 병력과 물자의 소모는 줄여야 했다. 이에 따라 루덴도르프는 공세를 중지시키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최전선의 병력은 경계 수준으로 대폭 줄이는 대신 강력한 예비대를 종심 근처에 배치하고 있다가 위험한 지역으로 달려가 기동 방어에 나서는 탄력적 전술을 채택했다. 당연히 전선의 축소도 고려되었다. 물론 이런 내용은 대외 공표되지 않고 은밀히 진행되었다.


상황을 오판한 헤이그

미세하나마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는 있었지만 영국의 상황도 몹시 나빴다. 1915년 5월, 독일 비행선이 심장부인 런던을 폭격하고 그해 11월에는 독일 해군의 군함들이 영국 본토까지 침투하여 포격을 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자신들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쟁은 군인들이 바다를 건너가 먼 곳에서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제1차 대전은 그야말로 초유의 경험이자 공포였다.

후방으로 이동하는 부상 영국군들. 엄청난 희생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경악했고 영국 정치권에서 헤이그에게 특단의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이 빗발쳤다.

하지만 보다 충격적인 것은 귀국한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전해지는 전선의 무서운 모습이었다. 특히 솜 전투 발발 이후에는 신문에 실리는 전사자들의 부고 기사가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영국인들에겐 친인척 중에 전사상자가 반드시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의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헤이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이는 상당한 압력이 되었다.

헤이그는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2달 동안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3방어선까지 다가가지도 못했기에 느긋한 입장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이때 BEF 정보참모인 차터리스(John Charteris) 소장이 전방에 배치된 독일군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루덴도르프의 지시에 의한 변화였지만 BEF 사령부는 이를 독일군의 붕괴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참호 속에서 대기 중인 영국군. 헤이그는 독일군이 약화되었다고 오판하고 공격을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독일군을 무한정 소모시켜 서부전선에서 승리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이 드디어 효과를 본 것으로 오판한 헤이그는 최종 승리를 위한 결정적 타격을 가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는 영국 제4군과 후방군 예하의 15개 사단, 새롭게 증원된 프랑스 제10군 예하 8개 사단을 동원하여 티에프발에서 베르망토빌레(Vermandovillers)에 이르는 30여 km에서 9월 15일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신무기의 등장

헤이그는 이번 기회에 독일의 제3방어선이 위치한 모르발(Morval)에서 구드쿠르(Gueudecourt)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정찰 결과 그 뒤로 의미 있는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곳만 돌파하면 최종 목적지인 바폼과 페론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그가 그렇게 자신한 데는 먼저 눈에 띄는 독일 진영의 병력 감소가 있기도 했지만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흙 구덩이에서 6인치 야포를 이동시키는 영국군 포병. 그동안의 혹독한 경험을 통해 포병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먼저, 실패로 끝난 7월 1일의 공세를 교훈 삼아 당시의 두 배가 넘는 충분한 야포를 동원했다. 이제 포병은 최후방이 아닌 전선 가까이에서 보병의 진격 상황을 파악하여 신속히 이동하면서 목표 지역을 정확히 타격하는 기법을 터득했다. 너무 혹독한 대가를 치른 이후였지만 BEF는 보병과 포병의 협조 체계가 유기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지옥의 참호전으로 인해 탄생한 신무기가 이번 공세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만으로 2년 가까이 참호전을 겪은 이상 이를 극복할 방법을 궁리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렇게 해서 장갑을 둘러 탑승자를 보호하고 무한궤도로 거친 대지와 방어물을 건너 상대 참호까지 다가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가 고안되었다. 개발과 이동 중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물탱크 같은 특유의 모습을 빗대어 탱크(Tank)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 무기가 바로 전차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전차인 Mark I. 지옥의 참호전은 전차의 등장을 이끌었으나 솜 전투에서의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영국은 최초의 현대식 전차인 Mark I의 개발을 완료하고 서둘러 시험을 거친 후 49대를 9월 초에 은밀히 전선에 배치했다. 헤이그는 물론이거니와 닦달을 받아 스트레스가 심했던 제4군 사령관 롤린슨도 당연히 이 새로운 무기에 대한 기대가 컸다. 최전선에 등장한 이 생소한 무기를 본 병사들은 사기충천했다. 그리고 9월 15일, 대대적인 포격이 재개되면서 9월 들어 잠시 소강상태였던 전선은 다시 불타올랐다.


기대와 실망

항상 그랬듯이 참호 속에 틀어박혀 있던 독일군은 영국군의 포격이 끝나자 기관총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진지에 거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연과 먼지를 헤치고 다가오는 영국군의 모습이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들의 바로 옆에 처음 보는 이상한 차량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서 기관총을 난사했지만 총탄을 너끈히 튕겨낸 이들은 진지를 향해 곧바로 달려오면서 탑재된 포와 기관총으로 공격을 가했다.

처음 겪는 상황에 놀란 독일군 전선은 무너져 내렸고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도망쳤다. 사기가 오른 영국군 보병들은 환호하며 철옹성 같았던 독일군 진지를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 특히 제15군단 예하 제41사단에 배속된 4대의 전차는 공격 당일 플레르(Flers) 시가지까지 진입하는 쾌거를 올렸다. 같은 방식으로 공격에 나선 서북쪽의 제3군단도 쿠르슬레트(Courcellette)를 동시에 탈환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사실 전차보다는 루덴도르프가 전략을 변경하면서 독일군의 전방 진지가 이미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플레르 같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9월 15일 영국군은 약 2km 정도를 나간 상태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받고 진격을 멈추었다. 뒤에 있던 강력한 독일군 예비대가 이동 방어에 들어가자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솜 전투 당시 격전지 중 하나인 델빌 숲(Delville Wood)의 9월 공세 직후 모습. 포격으로 뒤집힌 대지만으로도 그 무서움을 짐작할 수 있다.

야심만만하게 도입한 Mark I은 고장이 잦아 정작 36대만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고 플레르나 쿠르슬레트의 탈환이 극히 예외적이었을 만큼 전반적으로 전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훗날 공세를 주도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었고 이마저도 분산 배치하는 실책을 범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당시에 전차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법을 아는 이는 지구상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이날의 공격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