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1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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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16년 솜 전투 [4]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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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에 나선 독일군도 방어물과 기관총 세례에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러섬이 없는 사람들

첫날의 전과만으로도 이 정도의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기에는 아직 BEF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를 많이 동원했지만 중포와 고폭탄이 부족했고, 증강된 병사들도 대부분 전선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징집병이어서 참호전이 낯설었다. 하루 동안 사상자와 실종자를 합친 인명 피해가 무려 58,000여 명이라면 일단 작전을 멈추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했다.

격전이 벌어진 피카르디 평원에 방치된 영국군 시신. 돌격 첫날 무려 58,0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헤이그는 공세를 재개했다.

그러나 헤이그는 다음 날 다시 진격을 명령했다. 어이없게도 그는 영국군이 이 정도라면 당연히 독일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프리쿠르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돌파에 성공하기도 했고, 독일군의 소모를 강요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라고 오판한 것이다. 더구나 제1차 대전 발발 후 BEF가 주도한 최초의 전략적 공세이다 보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곧바로 대대적인,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포격이 다시 이어진 후 보병들의 돌격이 재개되었다. 그나마 첫날의 악몽 때문에 보다 조심스럽게 공격에 나서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무인지대에는 계속 시신이 쌓여갔다. 헤이그의 희망과 달리 독일 제2군의 소모는 크지 않았고 여전히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만일 초전에 밀렸다면 수세적 방어전을 구사할 생각이었던 팔켄하인은 독일 제2군의 선전에 고무되어 한 치의 땅도 넘겨주지 말고 즉각 반격에 나서라고 명령했다. 사령관 벨로브도 반격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선형 방어를 실시하면서 기회가 되면 피탈된 지역의 탈환에도 나섰다. 이처럼 양측이 물러서지 않고 맞서면서 솜 전투의 양상은 연합군의 공세가 끝나면 독일군이 간간이 반격하는 모양새로 반복되었다. 당연히 병사들의 희생은 커져갔다.


일상이 되어버린 잔인함

양측 모두 공통적으로 사용한 전술은 공격에 나섰을 때는 포격 후 전진, 반대로 방어에 임했을 때는 일렬로 거치한 기관총으로 죽음의 세례를 날리는 것이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참호전의 가장 무서운 모습이 1916년 연이어 벌어진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로 완전히 고착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격렬함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변동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유사 이래 이런 무서운 싸움은 없었다.

솜 전투 초반의 모습. 일부 구역에서 영국군은 목표 지점에 도달했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고전을 겪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마치 야구 경기처럼 시간을 정해 놓고 공수가 반복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그나마 병력이 우세했던 연합군은 7월 말에 이르러 콩탈메종(Contalmaison), 바장탱 르 프티(Bazentin le Petit) 같은 제2방어선의 일부 지역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처음에 꿈꿨던 기동전은 아니었지만 BEF는 초기의 엄청난 시련을 통해 하나하나 참호 지대를 돌파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이를 실전에 응용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곤욕을 치르면서 당장 살기 위한 방법을 터득했던 일선 지휘관들과 달리 후방 최고 지휘부의 사고는 바뀌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제1안작(ANZAC) 군단이 티에프발(Thiepval) 공격에 나설 때 후방군 사령관 고프(Hubert Gough)는 좁은 가도를 따라 독일 제14군단 전면을 돌파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5주간 23,000여 명이 전사상당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그는 단조로운 공격 방법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벨로브가 신설된 제1군 사령관으로 전보된 후 구원 투수로 투입된 막스 폰 갈비츠. 그는 제2군뿐 아니라 제1군도 함께 포괄적으로 관할했다.

이러한 엄청난 희생에 힘입어 연합군은 7월 11일, 팔켄하인이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고 방어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곳이 뚫리면 베르됭도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7월 19일, 제1군을 새로 창설해 제2군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보다 공격적인 갈비츠(Max von Gallwitz)를 파견해 솜 전투를 책임지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피로도가 극심하여 전력의 약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잘못된 방식의 돌격

시간이 흘러 어느덧 8월 중순이 되자 영국은 보병이 전진하는 데 보다 효과적인 포병의 이동 탄막 포격 방법을 터득했다. 사실 이제까지 겪었던 엄청난 희생에도 전혀 깨달은 것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세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횡대 대형으로 연속 제파 돌격을 반복하는 방식은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일렬횡대 대형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영국군. 최초 대형이 희생되면 곧바로 다음 제파가 돌격하는 방식으로 공격을 했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당연히 이들은 대기하고 있던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야 했고 여기에 밀려 후퇴하면 진지를 박차고 나온 독일군의 추격을 받고는 했다. 더구나 이때쯤에 이르러 독일은 초반에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펼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강력한 벙커와 참호들이 하나하나 격파되어 여기저기 파인 포탄 구덩이에 임시 방어선을 형성하고 연합군을 막아내기 급급한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영국군의 전황은 부진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조건 공격만 외친 헤이그의 잘못도 있었지만 거점 확보 후 공격을 반복하는 방식을 택한 제4군 사령관 롤린슨의 오판 때문이었다. 일선 사단장들도 독일군의 소모를 강요하거나 전선에 돌파구를 내려 하기보다 진지 점령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이 약화된 방어선에 넓게 산개하고 있었음에도 영국군은 몇몇 거점만 타격하고 공략하는 바람에 피해만 늘어나고 있었다.

전력이 열세였던 독일군은 선형 방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선방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생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롤린슨은 물론 독일의 갈비츠도 병사들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베르됭을 구원하기 위해 시작된 솜 전투는 일부 목적을 달성했지만 어느덧 그에 못지않은 피의 블랙홀이 되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맞서다 보니 병사들의 피해를 줄일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먼저 대응을 포기하는 쪽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되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부담스러운 현실

솜 전투의 참혹함은 영국 본토까지 전해졌다. 전시 통제를 했지만 상황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남아있는 필름 ‘솜 전투’는 영국 국방부가 우려를 불식시키고 무공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지만 편집을 했음에도 전선의 참혹한 모습이 생생히 알려지면서 오히려 염전 사상을 증폭시켰다. 독일도 제5군사령관 빌헬름(Wilhelm) 황태자 같은 일선 지휘부에서 우려를 드러내곤 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의 한 장면. 이후 전쟁 동영상 기록물의 기준이 되었을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후방 몽트뢰유(Montreuil)의 BEF 사령부에 있던 헤이그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부진한 전과를 탓하며 보다 과감한 돌파를 강행하도록 명령했다. 솜 지역이 포함된 서부전선 북동부의 독일 제1, 2, 6, 7군 전체를 관할하기 위해 8월 28일 창설한 루프레히트 집단군(Heeresgruppe Rupprecht)의 사령관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처럼 끝 모를 소모전이 한창이던 8월 29일, 지지부진한 전황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부임했다. 사실 팔켄하인의 낙마는 공세에 실패한 베르됭 전투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처음부터 수세적으로 임한 솜 전투는 비록 조금씩 밀리고는 있었지만 연합군에게 배 이상의 피해를 안겨주며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부임 직후인 1916년 9월 촬영된 참모총장 힌덴부르크(좌)와 참모차장 루덴도르프. 이때를 기점으로 루덴도르프는 군은 물론 정권까지 거머쥐고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힌덴부르크가 새로운 참모총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독일군을 지휘한 인물은 참모차장인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였다. 그는 빌헬름 2세의 위임을 받아 군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관할하는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되면서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졌다. 루덴도르프는 결국 지구전을 버텨낼 수 있어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상황을 검토한 그는 일단 공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