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1.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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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43년 3차 하르코프 전투 [2]

독일의 마지막 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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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보전협동 공격전술인 탱크 데산트 대형으로 하르코프를 향해 진격 중인 소련군. 동부전선 남부에 전개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5배에 이르렀다.

낯선 상황을 마주한 소련군

도네츠 강 서쪽으로 돈 집단군을 이끌고 후퇴한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은 소련군이 겪고 있는 상황에 주목했다. 지난 1941년 겨울, 모스크바 전투에서 소련이 절반의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방어전이었다. 소련군이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것은 독소전쟁 들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즉, 공세라는 것이 소련군에게 상당히 낯선 상황임을 깨달은 것이다.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최대의 진격을 선보였다. 만슈타인은 이것이 소련에게 낯선 상황이므로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사실 진격을 처음 해보는데다, 한 달 동안 무려 300여 km 가까이 달려온 소련군에게 틈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독일 군부 내에서도 손꼽히는 지략가인 만슈타인은 그 틈을 정확히 노린다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냉정한 만슈타인과 달리 들떠 있었던 STAVKA는 우크라이나 해방에 대한 자신감에 충만해 초입에 놓여 있던 하르코프의 탈환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낙관했다.

이제부터 그들도 1941년의 독일군처럼 거침없이 진격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의의가 대단히 크긴 했지만 독일은 그것만으로 무너질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소련이 독일을 완전히 몰아내기까진 햇수로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전쟁은 여전히 소련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독소전쟁 전체로 볼 때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돈 상태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도심에서 여흥을 즐기는 소련군. 비록 엄청난 대승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일사천리로 밀려났기에 어려워 보였지만 소련의 생각과 달리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북쪽에서 여전히 레닌그라드를 위협하고 있었고 중앙의 르제프 일대에서는 소련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 중이었다. 또한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던 독일의 여러 핵심 부대들이 속속 달려오면서 전력이 서서히 증강되고 있었다.


독일의 구원부대

그중 제1, 2, 3친위장갑척탄병사단(SS Panzer Grenadier Division, 이하 친위사단)으로 구성된 친위장갑군단(SS Panzer Korps)이 대표적이었다. 모든 무장친위대(Waffen SS)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초창기에 창설된 이들 3개 사단은 철저한 정신무장을 바탕으로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극렬하게 싸워 수시로 재편되곤 했을 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했다. 이들 부대가 장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된 후 1943년 2월 동부전선에 재투입된 것이다.

1941년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작전을 펼치던 당시의 제3친위사단. 모든 무장친위대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943년 전선에 투입된 친위장갑군단은 상당한 정예부대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이와 더불어 독일군 최강의 부대 중 하나였던 그로스도이칠란트(Großdeutschland) 장갑척탄병사단도 벨고로드(Belgorod) 인근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원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이들 정예부대들이 전선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이 종료되고 독일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중이었다. 비록 상황이 어려웠지만 당시 독일이 보유한 알토란 같은 핵심 전력을 보냈을 만큼 전선 남부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은 컸다.

이들이 배치된 곳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B집단군 예하의 헝가리 제2군과 이탈리아 제8군이 담당하던 전선이었다. 천왕성 작전으로 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이 산산이 격파되다시피 한 후, 말 그대로 B집단군 관할은 뻥 뚫린 허허벌판이었다. 다행히도 소련군이 잠시 숨을 고르느라 추격 속도가 조금 둔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독일의 방어선이 구축되기 전이라서 마음만 먹는다면 계속 진격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1940년 프랑스 침공전 당시 룬트슈테트와 자리를 함께한 바익스(우).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후 그의 B집단군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B집단군 사령관 바익스(Maximilian von Weichs)는 이곳을 틀어막기 위해 이번에 새로 투입된 핵심 구원부대들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주 중인 잔존 부대를 긁어모아 란츠 파견군(Armeeabteilung Lanz)을 구성했다. 파견군은 야전군과 군단의 중간에 해당되는 임시 제대인데, 부대를 급조해 투입했을 만큼 독일의 상황은 급박했다. 이들에게 하달된 임무는 하르코프와 쿠르스크의 방어였다.


3번째 격전이 시작되다

사실 그럴듯한 명칭과 달리 란츠 파견군에서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친위장갑군단뿐이었다. 이들 부대가 하르코프에 전개를 마치고 있을 때에도, 궤멸되어 산산이 부서진 이탈리아, 헝가리의 패잔병들이 앞다투어 도망쳐 나오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거대한 소련군이 쓰나미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만일 이곳이 함락된다면 독일은 드네프르 강 서쪽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다.

1943년 2월 2일, 별 작전에 따라 보로네시 전선군의 선두에 선 기갑부대들이 도네츠 강을 건너면서 역사적인 제3차 하르코프 전투(Third Battle of Kharkov)가 개시되었다. 없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수준인 헝가리, 이탈리아 부대들을 소련 제3전차군이 격파하며 하르코프로 쇄도했고 북쪽에서는 제40군이 벨고로드로 직진했다. 그만큼 공격이 빨랐고 반면 이제 막 이동 전개를 마친 독일의 대비는 충분하지 못했다.

돈 집단군이 담당하는 남쪽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좋았지만 남쪽에서 로스토프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홀리트 파견군(Armeeabteilung Hollidt)이 남서전선군에게 밀리면서 미우스(Mius) 강을 건너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보고를 받은 주코프는 이런 전황에 몹시 흡족해했고 더욱 진격에 박차를 가하라고 명령했다. 일선 소련군 지휘관들은 마치 누가 더 멀리 진격하는지 경쟁하는 것처럼 신이 나 있었다.

란츠 파견군을 이끌고 하르코프 방어에 나선 후베르트 란츠. 배속된 친위장갑군단의 지휘권도 없었을 만큼 제약이 많았던 그에겐 너무 과중한 임무였다.

히틀러는 홀리트(Karl Hollidt)와 란츠(Hubert Lanz)에게 직접 연락해 반드시 로스토프와 하르코프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제약이 너무 많았다. 란츠만 해도 예하에 배속된 친위장갑군단을 쓸 수 없었다. 친위장갑군단의 이동과 지휘를 히틀러가 직접 행사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 없이는 기갑부대나 핵심부대의 이동과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다. 어느덧 독일군은 총통의 사병이 되어 있었다.


재창설된 남부집단군

제2차 대전 내내 독일에서 히틀러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던 곳은 없었지만, 이처럼 일개 단위 부대까지 직접 통제하려 했을 만큼 그의 편집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란츠는 친위장갑군단장 하우서(Paul Hausser)에게 총통의 반격 명령을 그대로 전하는 역할만 했다. 하지만 하르코프를 향해 진격 중인 소련군은 경악할 만큼 많았다. 친위장갑군단은 정예부대였지만 좌우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하르코프 외곽에 배치된 제2친위사단 소속의 티거 전차.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다가는 알토란 같은 핵심부대를 잃을 가능성이 컸다.

친위장갑군단이 안심하고 싸우려면 좌우를 연결해 주어야 할 여타 부대들이 함께 보조를 맞춰야 했으나 이들은 서류상으로나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이런 상태로 앞만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포위망에 걸려 궤멸되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반격은 커녕 2월 10일 벨고로드가 피탈되면서 서쪽의 폴타바(Poltava)로 향하는 통로만 제외하면 삼면이 막혀버린 하르코프를 사수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우서는 출동을 거부했고 란츠도 반격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보고를 받은 B집단군 사령관 바익스는 상황이 심각하니 차라리 하르코프를 포기하고 후방에 방어선을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한 히틀러의 대답은 2월 13일자로 바익스를 해임함과 동시에 B집단군을 해체하고 이를 돈 집단군과 합쳐 지난 1942년 7월 해체된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을 재창설하는 것이었다.

분노한 히틀러가 부대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만슈타인이 새롭게 편성된 남부집단군의 사령관에 부임했다. <출처: NAC 폴란드 문서 기록보관소>

바익스를 파면한 것은 평소 히틀러의 행태를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지사수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경고의 의미까지 더해져서 B집단군을 해체하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옳았다. 1942년 11월 이후 전선 남부의 지휘체계와 전투서열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독일군은 떨어져 작전 중인 A집단군을 제외하면 이제 신편 남부집단군으로 단일화되어 만슈타인의 지휘 하에 들어왔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