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1.1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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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43년 3차 하르코프 전투 [1]

독일의 마지막 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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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의 균형추가 넘어왔다고 판단한 소련은 대대적인 후속 공세를 준비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히틀러

1942년 10월이 되었을 때, 스탈린그라드 일대는 양측 합쳐 180만의 대군이 엉켜 붙어 싸우는 지옥도로 변했다. 차지하려는 독일과 지키려는 소련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하면서 이곳을 제외하고 남북으로 2,000여 km에 이르는 거대한 동부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히틀러가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도시에 매몰되어 청색 작전(Fall Blau)의 애당초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리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1942년 가을이 되면서 독일과 소련 모두 스탈린그라드에 매몰되었다. <출처: Bundesarchiv>

12월 23일, 돈 집단군(Heeresgruppe Don)의 겨울폭풍 작전이 실패로 막을 내리면서 제6군 구출은 실패했다. 이제 독일도 제6군의 산화를 기정사실화한 이상 더 이상의 전력 투입은 불가했고 오히려 코카서스(Caucasus)로 깊숙이 남진한 A집단군(Heeresgruppe A)의 후퇴를 서둘러야 했다. 반대로 소련군은 고립된 제6군을 말려 죽이기 위해 독일군 본진을 최대한 서쪽으로 몰아붙이며 간극을 넓혀갔다.

소련 남서전선군(Southwestern Front)과 남부전선군(Southern Front)은 서쪽으로 퇴각 중인 돈 집단군을 쫓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기점인 도네츠(Donets) 강으로 향했다.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독일군 주력을 강 서쪽으로 완전히 몰아내 아직 코카서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A집단군과의 연결을 끊고자 했던 것이다. 만일 소련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6군보다 더 큰 대어를 낚을 수도 있었다.

소련이 로스토프를 점령하면 코카서스로 깊숙이 남진해 있던 A집단군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코카서스 포기를 망설였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히틀러는 어렵게 차지한 코카서스에서 A집단군이 빠져나와야 하는 현실에 심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통로인 로스토프(Rostov)의 함락이 확실시된 이상 A집단군이 적진에 고립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는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 A집단군 사령관에게 최악의 경우 케르치(Kerch) 해협을 건널 수 있는 쿠반(Kuban) 반도까지만 물러날 것을 허락했다. 그는 여전히 코카서스 정복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대승에 들뜬 소련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돈 집단군이 아조프 해(Sea of Azov) 연안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어야 쿠반 반도를 사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후퇴 중이어서 방어선을 구축하기 힘든 돈 집단군과 제6군의 산화로 말미암아 껍데기만 남은 B집단군(Heeresgruppe A)의 간극이 너무 넓게 벌어져 소련군이 침투할 곳이 많다는 점이었다. 결국 1943년 1월 3일, 히틀러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도네츠 강 서쪽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소련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독일 제6군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시킨 소련군은 1943년 1월 독일 본진을 도네츠 강 서쪽까지 밀어 붙이는 데 성공했다.

돈 집단군이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서고 있었지만 로스토프는 풍전등화의 위기였고 육상 통로의 차단이 확실해진 A집단군은 서둘러 쿠반 반도를 향해 퇴각했다. 역설적이지만 더 이상 투입할 예비대가 없던 독일에게 그나마 후퇴할 시간을 벌어준 이들은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어 사투 중인 제6군이었다. 이들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많은 소련군이 이동 전개하지 못하고 어느덧 후방으로 변해버린 스탈린그라드 일대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배고픔과 추위 속에 한 달 가까이 저항하던 제6군이 마침내 2월 2일 항복하자 이제 전선은 단순해졌다. 소련군의 진격은 더욱 탄력을 받았고 전선은 9개월 전 독일이 청색 작전에 따라 대공세를 개시하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독소전쟁 개시 이후 소련군이 최고의 전진을 보였던 순간인 만큼,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를 얻은 직후 소련군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역설적이지만 고립된 제6군의 저항이 독일군 본진의 후퇴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동안 소련은 너무 심하다고 할 만큼 독일에게 두들겨 맞았다. 전쟁 개시 이후 이때까지 500여만의 병력이 먼지처럼 사라져 갔고 그보다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고 물산은 파괴되었다.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이들이 주도하던 독소전쟁은 툭하면 자행된 학살로 인해 이상의 희생과 파괴가 추가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소련의 복수심은 대단했고 처음 경험하는 이런 호기에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주한 격전의 땅

거침없이 독일군을 추격해 서쪽으로 달려온 소련군의 눈앞에는 우크라이나의 동쪽 관문인 하르코프(Kharkov)가 보였다. 우크라이나에서 2번째 대도시인 하르코프는 유럽과 코카서스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사통팔달로 나뉘는 교통의 요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인근의 물산, 자원을 바탕으로 기계공업이 발달했는데, 특히 독일 점령 전까지는 전차를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의 주요 생산지였다.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하르코프의 자유광장. 독소전쟁 중 수차례에 걸친 격전의 현장이었다.

당연히 독소전쟁 발발 후 이곳은 격전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독일이 처음 전쟁을 개시한 곳에서부터 1942년 여름의 최대 팽창선 안에 위치한 지역은 필연적으로 최소한 2번 이상 격투장이 되어야 했다. 워낙 지역이 넓다 보니 독일, 소련 모두 신경도 쓰지 않고 스쳐 지나간 곳도 많지만 격렬하게 싸움을 벌인 곳도 부지기수다. 그중에서도 하르코프는 무려 4번이나 거대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의 땅이었다.

지난 1941년 10월과 1942년 5월에도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매번 승자는 독일이었다. 1차 전투는 소련이 도심에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군수공장 시설을 통째로 뜯어 우랄 산맥 동쪽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는 기적을 연출했지만, 2차 전투는 무모한 돌격만 남발하다 30만의 소련군이 몰락하는 참사를 당했다. 그만큼 소련에게 하르코프는 저항의 의지와 굴욕의 아픔을 함께 담고 있는 곳이었다.

1941년 10월, 1차 전투 당시에 하르코프 중심가로 진입한 독일군 기갑부대. 이때만 해도 이 도시 일대에서 앞으로 세 번이나 더 격전을 치르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1943년 3차 하르코프 전투 [1] - 독일의 마지막 대승 (전쟁사)

워낙 요충지여서 도시 자체도 중요했지만 군과 국민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소련이 이곳을 탈환해야 할 명분은 충분했다. 반면 독일도 동부전선 남부의 조기 안정과 르제프(Rzhev) 일대를 중심으로 여전히 선전을 펼치고 있는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과의 연결을 위해서 이 도시를 어떻게든 사수해야 했다. 그렇게 동부 우크라이나의 평원에 놓인 하르코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싸움터가 되어야 했다.


양측의 전력

당시 전선 남부에 전개한 독일군의 전투서열은 혼란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주력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해 단지 간판만 남은 B집단군이 북익을, 급하게 조직된 돈 집단군이 남익을,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코카서스에서 빠져 나온 A집단군이 크림 반도와 쿠반 반도 일대를 맡고 있었다. 9개월 전 공세를 펼쳤을 때 130만이었던 독일군은 이제 40만에 불과했고 연이어 벌어진 격전으로 몹시 지친 상태였다.

혹한의 날씨에 우크라이나로 퇴각 중인 돈 집단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패하며 전선 남부 일대의 독일군 전력은 9개월 전 공세 개시 당시의 30퍼센트 수준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출처: Bundesarchiv>

반면 1943년 1월 말 현재, 도네츠 강까지 진격한 소련군은 보로네시 전선군(Voronezh Front), 남서전선군, 남부전선군으로 이루어진 약 150만이었고 후속해 스탈린그라드를 정리한 50여만의 돈 전선군(Don Front)이 곧바로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번 기회에 독일군의 뿌리를 완전히 뽑을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STAVKA는 별 작전(Operation Star)과 질주 작전(Operation Gallop)으로 명명된 일련의 공세 계획을 수립했다.

보로네시 전선군이 B집단군을 격파하고 하르코프와 쿠르스크(Kursk)를 탈환하는 동안 남쪽에서 질주 작전에 따라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이 돈 집단군을 격파해 드네프르(Dnepr) 강까지 진격하는 것이 골자였다. 한마디로 우크라이나에 포진한 독일군 전체를 일거에 격멸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세를 반전시킨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 당시를 능가하는 엄청난 전력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소련의 일선 부대들도 몹시 지쳐 있었고 보급도 서서히 문제를 보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련은 너무 낙관적으로 행동했다. 지난 모스크바 전투 승리 직후 스탈린이 계속해서 공세를 가하라고 했을 때 주코프(Georgy Zhukov)를 비롯한 일선의 장군들은 무리라며 반발했었다. 그런 우려대로 소련의 추가 공세는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스탈린은 물론 지휘관들까지 함께 들떠 있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