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1.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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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3]

혈맹을 갈라놓은 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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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엘케비르 해전은 국가 간의 역학관계가 급속히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마침내 시작된 공격

7월 3일, H기동함대 사령관 소머빌이 최후통첩과 함께 공격 준비 명령을 하달하자 모든 함정들이 각각 할당된 목표를 향해 포신을 돌렸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흘러 6시간이 지나도 프랑스의 대답이 없자 17시 55분, 마침내 영국의 함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장술은 1분 전에 무장을 해제하겠다는 답변을 보냈지만 소머빌은 받지 못했다. 그의 행동이 불과 5분만 빨랐어도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를 메르스엘케비르 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H기동함대에서 관측된 포격 모습. 엄밀히 말해 예고된 공격이므로 기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대응 준비는 상당히 부족했다.

충분히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을 시작했기에 초탄부터 정확히 목표물을 강타했다. 이로써 엊그제까지 어깨동무하고 함께 독일과 싸웠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교전 상대가 되었다. 특히 해군 간의 교전은 트라팔가(Trafalgar) 해전 이래 133년 만이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며 동맹은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협상을 진행했을 만큼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기에 아쉬움이 많은 순간이었다.

공격 명령을 내린 소머빌뿐 아니라 포탑에서 사격을 가하는 말단의 수병들도 이런 상황이 가슴 아팠지만 전투가 시작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했다. 후속탄이 메르스엘케비르 군항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정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공격까지 하겠냐며 낙관하고 있던 프랑스의 충격은 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장을 해제하려던 장술은 곧바로 응전 명령을 내렸다.

메르스엘케비르 항에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기동 중인 프랑스 함정들. <출처: (cc) Jacques Mulard at Wikimedia.org>

하지만 프랑스 제1함대의 준비는 너무 안일했다. 메르스엘케비르는 항구의 구조상 함정들이 선수를 육지 방향으로 향해서 정박해야 했다. 따라서 반격에 나섰을 때 선미의 포탑들로만 교전을 벌일 수 있었다. 그나마 프랑스군 화력의 상당 부분을 책임져야 할 최신예 전함 됭케르크,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영국군의 최초 포격에 주포들이 강타당해 부포만 사용할 수 있었다.


독 안에 든 쥐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해도 제1함대 사령관 장술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함대를 항구에서 빼내 전투 대형으로 배치하는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해 놓았어야 했다. 영국의 공격이 있다면 즉시 반격에 나서겠다고 말로는 호기 있게 답변했지만 정작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진주만 공습처럼 기습이 아니라 영국 함대가 어디에 있고 언제 공격할 것인지를 미리 통보해 준 상황이었다.

선수가 육지를 향해 정박한 프랑스 함대의 모습. 따라서 반격에 나섰을 때 선미의 함포만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 H기동함대는 목표 지점을 향해 횡대로 늘어서서 화력을 일거에 집중시켰다. 전력상으로는 양측이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처럼 영국이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기에 상대를 향해 날릴 수 있는 포탄의 양은 3~4배 이상이었다.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영국 해군답게 침착하게 공격에 나선 것이다. 항구 안에 갇혀 있던 프랑스 함정들은 머리 위로 포탄의 비가 쏟아지자 그때서야 시동을 걸고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러자 영국의 구축함들이 전진하여 출입구 봉쇄에 들어갔다. 교전이 시작된 이상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매섭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제1함대는 독 안에 갇힌 쥐처럼 내항에서 포탄을 피해 우왕좌왕하다가 얻어맞았다. 가장 큰 비극은 전함 브르타뉴(Bretagne)에서 발생했다. 후드가 발사한 15인치 포탄에 탄약고가 직격당해 대폭발을 일으키고 격침되면서 977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012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결정타를 맞고 유폭이 발생한 전함 브르타뉴. 1,000여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출처: (cc) Jacques Mulard at Wikimedia.org>

역시 후드의 공격에 의해 상부가 사라지다시피 한 전함 됭케르크와 프로방스(Provence)는 격침을 피하기 위해 착저(着底)를 선택했다. 특히 피해가 컸던 됭케르크에서는 21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외에도 4척의 구축함이 전투력을 상실했고, 그중 후미가 정확하게 직격당한 모가도르(Mogador)에서는 38명의 인명 피해가 나왔다. 함포 사격이 그치자 함재기들이 날아와 어뢰로 추가 공격을 실시했다.


일방적인 결과

그 와중에 전함 스트라스부르가 아직 항해가 가능한 2척의 구축함들을 이끌고 항구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탈출한 이들 이외의 함정들은 대부분 격파되거나 전투력을 상실했기에 메르스엘케비르에서의 해전은 어둠이 내리기 전에 막을 내렸다. 스트라스부르는 항공모함 아크로열(HMS Ark Royal)에서 발진한 비행대의 추격을 받았으나 지중해를 가로질러 다음날 툴롱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포격이 쏟아지는 메르스엘케비르를 빠져나오는 프랑스 전함 스트라스부르 <출처: (cc) Jacques Mulard at Wikimedia.org>

짧고 굵게 벌어졌던 해전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프랑스는 전함 1척 침몰을 비롯해 5척의 전함과 구축함이 대대적인 수리를 받아야 하는 손실을 입고 1,5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당했다. 반면 영국은 6기의 함재기를 격추당하고 2명이 전사하는 데 그쳤다. 두말할 필요 없이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투의 전개 과정을 본다면 영국이 잘했다기보다는 프랑스의 준비가 한심스러워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항복하기 전까지 독일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더라도 군대는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프랑스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1904년 이래로 40여 년 가까이 함께 발을 맞추어 왔지만 프랑스가 중립을 선언하고 동맹을 파기한 이상, 더구나 독일의 지배하에 있다면 영국과의 관계 정립도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런 점은 무시했다.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했던 것이다.

부상자를 수습하는 모습. 인명 피해가 상당해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감정은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회복 불능의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브르타뉴 한 척이었고 나머지 함들은 수리해서 사용이 가능했지만 일단 지중해에서 추축국이 프랑스의 해군력을 동원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영국은 목적을 달성했다. 다를랑이나 장술은 영국에게 반드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장담했고 실제로 2년 후에 독일에 맞서 주력함을 자침시키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영국이 이를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역사

반면 됭케르크 철수 후 가뜩이나 영국에 대한 실망감이 컸던 프랑스의 반응은 격앙에 가까웠다. 곧바로 영국과 국교를 단절했고, 민심이 독일 쪽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믿었던 도끼에 또다시 발등을 찍혔다면서 반영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런던에 망명해 항독 전선을 준비 중이던 드골도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식민지 주둔군을 포섭해 자유 프랑스군의 주력으로 삼고자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프랑스 최강의 전함인 리슐리외(Richelieu). 비시 정권을 따르다가 1943년이 되어서야 연합군에 편입되었다.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때문에 자유 프랑스군은 전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는 말로는 중립이라 외쳤지만 얼마 후에 벌어진 다카르(Dakar) 해전이나 1942년 연합군의 횃불 작전(Operation Torch) 당시에 극렬하게 저항했을 만큼 영국에 적대적으로 행동했다. 사실 영국이 캐터펄트 작전을 펼쳤을 때는 이런 상황까지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독일의 지배를 받는 순간부터 프랑스는 결국 영국과 함께 갈 수 없는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항복을 받고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던 독일은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완전히 갈라섰다고 판단하고 7월 10일 제정된 새로운 헌법에 의해 본격 출범한 비시 정권을 적극 후원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추축국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종전 후 단죄를 받을 만큼 친독 괴뢰 정부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가 되었다. 독일은 비록 프랑스의 함정은 포기했지만 대신 배후를 안심하고 영국의 공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편협한 시각으로 본다면 영국의 행동은 프랑스에게 배신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제 정치에서, 그것도 생존을 걸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의리나 명분은 단지 허울 좋은 명제에 불과하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의 생존과 관계된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그 다음을 논할 수 있다. 1940년 7월 3일에 있었던 메르스엘케비르 해전은 그런 냉정한 역학 관계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준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