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0.2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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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1]

혈맹을 갈라놓은 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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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년부터 자유 프랑스군의 기함으로 활약한 전함 리슐리외. 제2차 대전 당시 프랑스 최강의 군함이었으나 연합군에 가담하게 된 과정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한배를 탄 영국과 프랑스

1904년 4월 8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외교 협상이 타결되었다. 14세기에 벌어진 백년전쟁 이래로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한배를 타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바로 20세기 전반기에 존재했던 가장 강력한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영불협상(Entente Cordiale)이다. 처음에는 식민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원만히 정리하기로 한 외교적인 타협이었으나 곧바로 군사 동맹으로까지 발전했다.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기도를 드리는 영국군 군목. 영불협상 준수를 위해 참전한 제1차 대전에서 영국은 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경험했다.

대개 영불협상이 포함된 삼국협상(Triple Entente)과 삼국동맹(Dreibund)의 대립을 제1차 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많이 거론한다. 그래서 제1차 대전 종전 이후에 영불협상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지난 2004년에 공동으로 대대적인 100주년 행사를 개최했을 만큼 현재 양국의 관계, 특히 NATO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동맹 관계를 고려한다면 또 다른 형태로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1898년, 수단 남부의 파쇼다(Fashoda)에서 아프리카 분할을 놓고 군사 대치를 벌였을 만큼 팽팽했던 양국이 불과 6년 만에 한편이 되기로 합의한 이유는 독일이라는 공통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를 돕기 위해 4년 동안 영연방군을 포함해 무려 900만을 참전시켜 120만의 전사자를 포함한 330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화였다.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당시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프랑스 구축함 모가도르(Mogador)

이 정도로 피를 흘려 함께 싸웠으니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후 질서 재편을 함께 주도했고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한 후 30만의 원정군(BEF)을 프랑스에 즉각 파견했을 정도였다. 현재도 그런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제2차 대전 중에는 서로를 적대시할 정도로 관계가 험악해진 적이 있었다. 바로 메르스엘케비르 해전(Battle of Mers-el-Kébir) 때문이었다.


프랑스 항복하다

1940년 5월 10일, 그동안의 기묘했던 가짜 전쟁(Phoney War)을 끝내고 마침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팽팽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독일군이 공군의 엄호를 받는 집단화된 기갑부대를 앞세워 연합군 배후를 강타하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불과 열흘도 안 되어 프랑스 수상 레노(Paul Reynaud)가 파리까지 날아온 영국 수상 처칠에게 “우리는 패했다”는 넋두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 5월 25일 회합한 프랑스의 전쟁 지휘부. 총사령관 웨이강(좌1), 수상 레노(좌3), 페탱(좌4). 하지만 위기를 타개할 묘책은 없었다.

6월 4일, 영국군이 됭케르크(Dunkirk)에서 철군을 완료하자 전쟁의 승패는 결정난 것과 다름없었다. 프랑스인들은 믿었던 영국이 배신하고 도망갔다고 분노했지만 이런 참사를 당하게 된 근본 원인은 사실 프랑스 자신에게 있었다. 결국 프랑스 정계는 스페인 대사로 있다가 긴급 소환된 제1차 대전의 영웅 페탱(Philippe Pétain)을 6월 16일, 수상으로 임명하고 위기를 타개하도록 조치했다.

모두가 페탱이 전세를 반전시켜 주기를 원했으나 정작 그는 항복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독불관계사를 살펴보면 항복은 비록 치욕스럽지만 그래도 국권을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최근이라 할 수 있는 나폴레옹 전쟁, 보불전쟁, 제1차 대전도 승자가 패자를 멸망시켜 국토를 병합하거나 식민지로 삼지는 않았었다. 대신 많은 간섭과 착취가 수반됨은 어쩔 수 없었다.

프랑스의 항복 서명을 받기 위해 박물관 벽을 뚫고 전시 중인 객차를 인출하는 독일군 공병대. 지난 제1차 대전 당시에 연합국이 독일의 항복을 받은 바로 그 객차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결국 협상이 개시되어 6월 22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페탱이 "적어도 나라의 명예만은 지켰다"고 말했을 만큼 형식상으로는 국가 대 국가로서 이루어진 휴전(Armistice)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협정 장소와 형식부터가 프랑스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이벤트로 진행되었을 만큼 독일의 의사가 고스란히 반영된 일방적인 항복이었다. 그렇게 해서 6월 25일, 프랑스 전역의 총성은 멈추었다.


형식상의 독립국

곧바로 프랑스가 중립을 선언하면서 영불협상은 폐기되고 드골(Charles de Gaulle)이 런던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패했어도 프랑스라는 실체나 정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해외에 산재한 수많은 식민지를 여전히 거느리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6개월 전에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고 지구상에서 사라진 폴란드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독일은 프랑스가 항복했음에도 60퍼센트만 점령 통치했다. 나머지는 프랑스의 통치 구역으로 남겨 놓았으나 7월에 성립된 비시 정권은 독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출처: Eric Gaba at Wikimedia.org>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모습과 달리 프랑스가 생존하려면 철저하게 독일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다. 제1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군의 라인란트(Rheinland) 진주처럼 그 전에도 영토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사례는 흔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페탱도 당황했을 만큼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지난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을 너무나 가혹하게 옥죄었던 터라 혹독한 보복을 피하기가 어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우선 프랑스 정부가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휴전 당시 독일이 점령하지 못한 남프랑스 일대로, 국토의 4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는 명분으로 하루에 4억 프랑의 점령군 유지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휴전 조건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정전위원회는 무조건 독일 점령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따르도록 했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형식상의 독립국이었을 뿐이다.

비시 정권 수립 후의 프랑스군 열병 행사. 경례 모습만으로도 친독 색채가 농후함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겉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정치, 외교, 경제 행위도 이루어졌고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휴전 당시 생포한 200여 만의 포로를 수용소로 보내고 대부분의 장비를 노획했을 만큼 프랑스군을 해체에 준하는 수준까지 몰락시켰으나, 마치 베르사유 조약하의 바이마르 공화국군처럼 10만 정도의 정전협정군(Armée de l'Armistice)을 보유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일부 묘한 부분이 있었다.


프랑스 전역의 미스터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히틀러가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을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뒤의 설명처럼 히틀러가 프랑스의 반항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휴전 협정을 맺을 당시에 독일은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 함정을 확보하지 않고 단지 무장만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거두어갔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육군, 공군의 무기를 노획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항복 직전 영국으로 대피해 억류되었고 이후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 활약한 전함 쿠르베

이는 당시의 상황은 물론 이후 전쟁의 진행 과정을 상기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제1차 대전 당시만 해도 독일은 세계 2위의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지만 패전 후 연안 해군으로 축소되며 철저히 몰락했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전력 증강에 나섰지만 아직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그나마 구축한 전력도 바로 직전의 노르웨이 침공전에서 많은 손실을 본 상황이었다.

반면 당시 프랑스는 세계 4위의 해군 강국이었다. 전함 쿠르베(Courbet) 같은 일부 함정들이 패전 직후 영국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억류되었으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2년 후 이들을 차지하려 작전을 펼쳤던 점을 고려한다면 독일도 분명히 탐을 냈었다. 그런데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 다를랑(François Darlan)이 중립의지가 확고한데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력히 반발하자 독일은 애초의 요구를 거두어들이고 그냥 놔두기로 결정했다.

가뜩이나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그것도 곧바로 바다를 건너가 영국을 공격해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랬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래서 됭케르크 해안가에 연합군을 몰아넣고 3일 동안 공격을 중지시켰던 것과 맞먹는 프랑스 전역의 미스터리로 취급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함정들의 존재는 영국과 프랑스를 갈라놓는 원인이 된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