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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소련군의 전술

히틀러는 1942년 봄의 홀름 농성전이나 데미얀스크 전투를 통해 끝까지 사수하면 결국 포위망을 뚫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얻었다. 때문에 군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빠진 스탈린그라드와 벨리키예루키의 사수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결정했다. 문제는 현재의 소련군이, 포위망을 형성해 놓고도 어떻게 소탕할지 몰라 쩔쩔매다가 낭패를 본 6개월 전의 소련군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3충격군은 포위를 완성한 3개 사단으로 사방에서 돌파를 시도했으나 제277연대의 강력한 저항에 막혔다. 예전의 소련군이라면 제풀에 무너져 내렸겠지만 제3충격군 사령관 푸르카예프는 보병을 일단 뒤로 물린 후 포병과 공군을 동원해 도심을 대대적으로 강타했다. 남쪽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지던 상황이 그대로 동시 상영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규모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그라드는 150만의 소련군이 33만의 독일군을 포위한 것이고, 벨리키예루키는 3만의 소련군이 7,500명의 독일군을 가둔 것이다. 비행장도 없는 도심에 포위망이 국한되었기에 낙하산 투하 방식 정도를 제외하곤 공수를 통한 보급이나 병력 충원이 어려웠다. 제59군단 본진과 아직은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장갑 열차를 강행 돌파시켜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제277연대는 탈출을 허락받지 못했으므로 외부에서 파고들어가 이들을 구출해야 했다. 헤팔레리(Kurt von der Chevallerie) 제59군단장은 북서쪽에서 공격에 나선 제8전차사단이 소련군에게 막히자 중부집단군에서 지원받은 제20차량화사단을 남서쪽에서 진격시켰다. 하지만 이 또한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고 오히려 12월 초가 되자 일대의 소련군이 2배 가까이 증강되어 어느덧 제59군단과 제277연대를 10km 이상으로 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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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이 끊기고 혹한이 시작되다

확고한 우세를 점한 소련군이 12월 13일부터 포위망을 압축해 도심으로 진입하면서 치열한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제277연대는 도심의 폐허를 방패 삼아 소련군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헤팔레리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했지만 소련이 벨리키예루키를 포위하며 구축한 진지는 너무나 깊고 강력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북극에서 북풍한설이 불어오면서 소련군의 공격이 조금 둔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겨울 혹한은 충원이나 보급이 없었던 도심의 제277연대 병사들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단지 날씨로 인해 교전 행위가 드문드문 중단되며 그만큼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나 이로 인한 현실적인 이익은 없었고, 어느덧 병력은 4,000명 선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12월 20일, 르제프 돌출부 제거에 나선 주코프의 야심만만한 화성 작전이 엄청난 실패로 막을 내리면서 독일 중부집단군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간의 격전이 워낙 치열했기에 벨리키예루키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당장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전력을 회복하고 해당 지역으로 증파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제277연대는 마냥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2월 26일, 소련군은 남쪽에서 공격을 가해왔으나 제277연대는 유일한 생명선과 다름없는 노보소콜니키(Novosokolniki)로 향하는 철도를 사수해냈다. 하지만 잠시 막아낸 것일 뿐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거대한 제6군에 비한다면 이들은 그저 무의미한 수준으로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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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내린 격전

해가 바뀐 1월 4일, 독일은 제6공군사단, 덴마크 자유군단(Frikorps Danmark)처럼 급하게 차출된 부대들을 앞세워 토틸라(Totila)로 명명된 구원 작전을 개시했다. 한때 도심 5km까지 다가갔으나 소련군의 반격에 막혀 돌파에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에 1,500명으로 줄어든 제277연대는 로바트 강 동쪽의 기차역과 서쪽의 성채 일대로 쪼개졌다. 이렇게 포위망이 좁혀지자 컨테이너에 담아 낙하시킨 보급품의 상당수가 소련 점령 지역으로 떨어졌다.

1월 10일, 여기저기서 모은 전차와 돌격포를 앞세운 1개 보병대대가 구출 작전을 다시 시작했다. 소련군의 외곽 저지선을 넘어 벨리키예루키로 내달린 이들은 오후 3시에 마침내 성채에 도착했다. 아사 직전이던 제277연대 병사들은 환호했으나 곧바로 절망에 빠졌다. 구원군들이 소련군의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오히려 자신들 쪽으로 몸을 피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1월 14일에는 팔슈름야거 대대가 심야 구출 작전을 개시했지만 너무 서둘러 낯선 곳에 투입되다 보니 길을 잃고 헤매다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다. 이때 성채에서 상황을 살피던 150여 명의 병사들이 히틀러의 엄명을 무시한 채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본진에 구출되었다. 같은 날 역 주변에서 저항하던 병력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전멸됐고 이제 남은 곳은 요새화된 성채밖에 없었다.

1월 16일, 지금까지 놀라운 항전을 이끈 제277연대장 사스(Eduard Freiherr von Saß) 중령은 부하들에게 알아서 탈출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후 항복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이어진 벨리키예루키 전투는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소련군 사상자가 약 6만 정도인데 반해 독일의 피해가 10만 정도였을 만큼 일방적인 패배였다. 1,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으나 종전 후 살아서 독일로 돌아간 이는 단지 11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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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작았을 뿐이다

벨리키예루키 전투에서 소련은 침착하고 끈질긴 대응으로 승리를 거머쥔 반면 독일의 구출 작전은 너무도 엉성했다. 어차피 히틀러의 고집으로 제277연대의 후퇴는 불가한 상황이라 외부에서 구출하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전사를 살펴보면 상황을 너무 낙관했던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확실하게 포위망을 뚫으려면 구원부대를 충분히 준비시켜 일거에 작전을 펼쳐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제277연대의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아니면 소련군을 얕잡아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눈에 보이는 부대부터 마구 밀어 넣었다. 그래서 돌파 중 탄약 부족으로 중간에 되돌아오거나 팔슈름야거 대대처럼 지형을 제대로 숙지 못해 낭패를 본 경우까지 나왔다. 독일은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너무 쉽게 봤지만 이번에 포위를 완성한 소련군은 전쟁 초기의 어리숙했던 소련군과 분명히 달랐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격전이 벌어졌던 시기와 진행 상황 때문에 벨리키예루키 전투는 ‘작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불린다. 최초로 포위당했을 때 자력으로 탈출할 능력이 있었으나 총통의 명령으로 인해 현지 사수를 해야 했던 점, 장담과 달리 충분한 지원을 못 받고 굶주리며 농성전을 펼쳐야 했던 점, 그리고 구원이 실패하며 결국 비참한 상태로 항복했던 점 등이 마치 축소판과도 같았다.

종종 전투가 소규모면 덜 고생스러웠을 것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규모에 상관없이 병사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승자건 패자건 결과나 의의 따위는,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병사들에겐 관심사항이 될 수 없다. 양측 합쳐 16만의 인명 피해가 있었음에도 벨리키예루키 전투가 그들만의 작았던 스탈린그라드로 취급되는 것은 굳이 경중을 나누고 의의를 찾고자 하는 후세의 오만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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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