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9.2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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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벨리키예루키 전투 [2]

그들만의 스탈린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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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벨리키예루키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가 종결된 후 전복된 제3충격군 소속 영국제 마틸다 전차를 살펴보는 소련 장교들.

중간에 놓인 도시

스탈린의 야심 찬 공세가 좌절되면서 모스크바 전면에 위치한 전선 중앙부는 급속도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르제프와 데미얀스크 일대에 형성된 기묘한 돌출부는 양측 모두에게 앞으로 어떻게, 어디로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굳이 전략가나 군인이 아니더라도 지도 위에 그어진 울퉁불퉁한 전선의 모습만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독일과 소련 양측 모두 돌출부를 발판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선을 곧게 펴려 했다.

소련은 토로페츠를 발판으로 두 개의 돌출부를 제거하려 할 것이고 반대로 독일은 돌출부의 좌우를 연결한 드비나 강 일대의 소련군을 격멸하고 전선을 일직선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당장 공세로 나가기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은 때리다 지쳐가던 중에 예상치 못한 카운터블로를 맞고 휘청거리는 모양새였고 소련은 모스크바를 사수했지만 진이 완전히 빠진 상태였다.

즉 양쪽 모두 상대방의 돌출부를 제거할 욕심은 있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전선이 고착되어 변동이 크지 않았을 뿐 곳곳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연일 포탄을 주고받는 와중에 많은 병사들이 비명횡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지루한 대치가 계속 이어질 경우 보급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1942년 봄이 되면서 양측 모두 대규모 공세를 자제했으나 전선에서는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한 전투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일대의 전선으로 향하는 철도들이 모두 연결되는 벨리키예루키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지난겨울 소련의 공세를 바로 앞에서 저지시키며 이곳을 지켜낸 독일에게는 그야말로 반드시 사수해야 할 요충지가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벨리키예루키는 히틀러가 사수를 결심한 르제프와 데미얀스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련도 두 돌출부를 원활히 제거하려면 반드시 이곳의 점령이 필요했다.


물고 물리는 전선

지난겨울 공세 당시 벨리키예루키까지 약 100km 정도 전선을 일거에 밀어붙이고 이제는 바로 코앞에서 위협을 가하게 된 소련군은 제60군을 기반으로 1941년 12월 25일 창설된 약 10만의 제3충격군(3rd Shock Army)이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소련군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들 중 하나여서 전투력이 좋았고 사기도 높았다. 여담으로 이후 제3충격군은 베를린까지 진격하여 냉전시기에는 동독 주둔군으로도 활약했다.

제3충격군을 상대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위기가 고조되자 프랑스 주둔군 임무를 수행하던 제59상급사령부(Höheres Kommando LIX)를 기반으로 1942년 1월 20일 창설된 약 5만의 제59군단이었다. 이들은 2월 중순 동부전선으로 옮겨오자마자 제3충격군의 매서운 공격으로부터 요충지를 지켜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벨리키예루키는 새롭게 창설된 부대들의 결투장이 되었다.

제59군단은 도시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각종 시설들을 이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3충격군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냈다. 이렇게 선전하는 동안 독일에서 수송된 병력과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소련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공격을 계속하고는 있었지만 만일 후방인 셀리게르(Seliger) 호수와 오스타시코프(Ostashkov)를 독일이 점령한다면 엄청난 화를 당할 수 있어 조심스러운 형편이었다.

제59군단 예하 제8전차사단 소속 38(t) 전차. 벨리키예루키 전투 당시 불과 14대만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여기저기에 형성된 돌출부로 인해 전선이 서로 물고 물리는 형국이 되었는데, 이는 어느 일방도 배후의 안전 때문에 함부로 치고 나가기 어렵도록 만든 족쇄의 역할을 했다. 1942년 봄까지도 양측 모두 공세로 전환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해 당장은 자신들 앞으로 들어와 있는 상대 진영의 돌출부를 견제하는 데 좀 더 집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3충격군은 벨리키예루키가 뻔히 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제한적인 공격만 가했다.


소련의 공세가 시작되다

이처럼 전선이 정중동의 상태로 바뀌면서 독일, 소련 모두는 다음 작전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또다시 모스크바를 노릴 것이라 판단하여 상당한 전력을 전선 중앙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여차하면 선공을 펼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남쪽에서 불을 지폈고 그해 여름이 되자 스탈린그라드가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갔다.

1942년 8월 23일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고 불타는 스탈린그라드 도심. 처음에는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전투가 갈수록 격렬해져 갔다.

그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이곳에서 독소전쟁의 결판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양측 모두 엄청난 병력과 물자를 집중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스탈린그라드에 쏟아붓던 독일과 달리 소련은 이번 기회에 그동안 앓던 이 같았던 르제프 돌출부의 제거도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러한 엄청난 동원 능력의 차이는 소련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혹은 총부사령관) 주코프(Georgy Zhukov)는 자신이 직접 이끈 화성 작전을 위해 무려 70여만의 병력과 1,500여 대의 전차를 준비했다. 반면 모든 지원의 우선순위가 스탈린그라드가 되어 버린 독일의 전선 중앙부는 예전보다 약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반전을 이끈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이 성공한 지 이틀이 지난 11월 25일, 주코프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1942년 11월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외에 르제프에서도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교통 요충지인 벨리키예루키의 상황도 급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이번 공세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은 지난 10개월 가까이 벨리키예루키를 견제하고 있던 제3충격군이 먼저 쏘았다. 화성 작전이 성공해 데미얀스크 일대에서 저항 중인 독일군에게도 타격을 가하려면 배후의 보급로인 벨리키예루키를 먼저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성 작전 개시 전날인 11월 24일 제3충격군이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견제만 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완전 점령이 목표였다.


엄중히 포위된 도시

지난 1년 가까이 독일 제59군단을 상대한 푸르카예프(Maksim Purkayev) 제3충격군 사령관은 독일의 방어선이 충분히 강화된 정면으로 파고들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앙을 피해 도시의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져 진격한 후 벨리키예루키를 포위하기로 했다. 전쟁 발발 후 연이어 엄청난 희생을 겪은 소련군도 어느덧 독일군의 섬멸전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3충격군이 로바트 강 서쪽을 장악하면서 벨리키예루키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7,500여 명의 제277연대는 도시에 고립되었다.

11월 27일이 되었을 때, 소련은 독일 제3산악사단과 제83사단 사이의 공간을 소련 제2기계화군단으로 돌파해 도시에 몰려있던 7,500여 명의 제277연대를 포위한 후 제59군단 본진을 서남쪽으로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다. 푸르카예프는 후속한 3개 사단으로 포위망을 더욱 강화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탈린그라드와 같은 국면이 되었다. 독일은 완전히 허를 찔린 상황이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Günther von Kluge)는 일단 벨리키예루키를 포기하고 제277연대를 탈출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선 남부에서는 스탈린그라드가 엄청난 위기였고 중부에서는 제9군이 르제프 방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수세였기에 전선을 최대한 단순화하는 것이 좋다고 본 것이었다.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도 이런 수순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내심으로는 데미얀스크와 르제프의 포기까지도 원했다.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탈출 기회를 놓친 제277연대는 고립 방어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엄명하고 나섰다. 그는 르제프를 지키려면 보급로 확보가 절대적이므로 반드시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비록 제277연대가 포위되었어도 제59군단 본진과의 거리가 가까운 곳은 5km 정도여서 상황이 호전되면 충분히 연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스탈린그라드와 르제프는 물론 이토록 작은 벨리키예루키조차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