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9.0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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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실전 운용 기록이 많은 탄도미사일

R-17(스커드-B) 탄도미사일의 운용 현황과 실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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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은 집중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을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운용 현황

R-17은 1962년 제159미사일여단부터 첫 배치가 시작되었는데, 실전적 발사태세를 갖춘 것은 1964년부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부터 소련의 열병식에 등장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미사일과 혼합발사를 시도한 것은 1968년 5월이다. 최초의 합동훈련에서 소련군은 R-11과 R-17, 그리고 TR-1 미사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을 섞어서 발사했다. 증언에 따르면, 이 훈련에서 R-17은 무려 70발이나 발사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R-17 여단은 복잡한 발사 절차로 인해 무려 3,500여 명과 차량 700여 대로 구성되었다. 여단 휘하의 1개 대대만 해도 745명과 차량 265대(오토바이 포함)로 구성된다. 여단은 지휘부와 2개 발사대대, 기술 포대, 기상관측 포대, 정비 포대, 보급 포대, 공병차량중대, 화학방호소대, 의무소대 등으로 구성된다. 주요 차량으로는 2P19 발사차량 6대, 2T3 미사일 트레일러 8대, 9F21 핵탄두 운반차량 3대, 지휘차량 10대, VAZ-452 관측차량 6대, 8T210 크레인 차량 4대, 8G1 연료트럭 3대, 8G17 산화제트럭 4대 등이다.

그러나 1967년부터 스커드 여단은 재편성을 통해 3개 발사대대 체제로 전환되었다. 1개 대대가 2개 포대로 구성되고 포대당 이동식 발사차량을 2대 배치하여 여단의 이동식 발사차량은 총 12대에 달한다. 대신에 인원은 1,200명으로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9P117 장륜형 이동식 발사차량이 배치되면서 지원 소요가 눈에 띄게 줄어든 덕분이다.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에는 NATO와 대치 중인 최전선의 스커드 여단들은 대대당 3개 포대로 증강되어, 여단 하나에 발사차량 18대가 배치되기도 했다. 동독에 배치된 2개 스커드 여단은 1970년대 말에는 포대당 발사차량 3대로, 여단 하나가 스커드 발사차량을 무려 27대나 보유하기도 했다. 소련은 1991년 해체 당시에 스커드 여단 35개에 발사차량 450여 대를 보유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2000년대 중반까지 스커드를 보유한 기록이 있으나, 더 이상은 운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옛 소련권 국가들은 아직도 상당수 스커드 미사일을 운용하고 있다. 이는 소련 시절에 배치했던 것들인데, 단 핵탄두만큼은 러시아가 모두 회수했다. 소련은 모두 7,000~10,000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생산했는데, 이 중에 1,000발 이상이 수출되었다. 현재 여전히 스커드 계열을 사용 중인 국가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알제리, 콩고, 이집트, 오만, 리비아, 시리아, 북한, 이란, 예멘, 베트남 등이다. 특히 북한은 화성-5(스커드-B)와 화성-6(스커드-C)를 이란, 시리아, 이집트, 예멘, 리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베트남 등에 수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 러시아군은 스커드 미사일을 일선에서 퇴역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미국이 스커드 미사일을 약 30발 보유하여 표적탄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미 공군>

실전 기록

역사상 단일 전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탄도미사일은 V-2 로켓이다. 독일은 영국에 대한 보복공격에서 V-2를 무려 3,000여 발이나 발사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편 현대의 전쟁사 속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미사일은 스커드다. 스커드 미사일은 10여 개의 분쟁에서 총 4,000발 이상이 발사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발사된 탄도미사일로 기록된다.

- 최초의 사용, 욤 키푸르 전쟁

스커드-B 미사일은 현존하는 탄도미사일 가운데 실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미사일이다. 스커드-B를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한 것은 이집트군이다. 이집트는 1973년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을 앞두고 6월부터 소련으로부터 스커드 미사일 18발과 이동식 발사차량 9대를 도입했다. 이스라엘군 첩보부는 이집트의 스커드 도입 사실을 알았지만, 이집트군이 교육훈련을 통해 운용하기까지는 11~12개월이 걸려 1974년 1/4분기에나 전력화될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10월 6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이집트군은 스커드를 포트 사이드(Port Said) 등 나일(Nile) 강 삼각주 지대에 배치하여 텔아비브(Tel Aviv)를 위협했다. 당시 이집트군은 교육훈련이 안 되어 스커드 운용이 불가능했고, 실제로는 소련군이 운용을 맡았다.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무적불패의 신화가 무너졌지만, 전쟁 2주차 이후 승리의 여신은 점점 이스라엘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 서안에서부터 교두보를 형성하고 이집트 영토로 밀고 들어오면서 이집트의 패배는 명백해졌다. 결국 10월 20일에 이르러서 이집트는 스커드 발사대를 나일 강 삼각주 지대에서 수에즈 운하 인근으로 이동시켰다.

10월 22일 휴전협정 발효를 앞두고 아랍 측의 억제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소련군은 국방장관의 허락을 얻어 스커드 3발을 발사했다. 1발은 미국의 전쟁지원물자가 반입되는 아리시(Arish)에 떨어졌고, 2발은 수에즈 운하의 교두보 인근에 떨어져 7명이 사망하고 물자수송트럭들이 파괴되었다. 폭발로 인해 깊이 4m 폭 15m의 탄공이 형성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스커드 미사일 발사를 걱정하여 이집트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타격을 자제했다.

한편 스커드의 최초 도입국이었던 이집트는 북한의 스커드 복제에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북한이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준 대가로 무바라크가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스커드 미사일과 발사차량을 넘겨줌으로써 북한의 스커드 개발을 도왔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집트는 북한에 스커드 미사일을 전달하여 개발을 도왔다. 사진은 무바라크(Hosni Mubarak) 이집트 당시 부통령과 김일성의 회담 장면이다. <출처: Public Domain>

- 북한제 스커드가 사용된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부터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도 스커드가 사용되었다. 프로그(FROG)-7 로켓을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이라크군은 1982년 10월 27일 이란의 데즈풀(Dezful)로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여 민간인 21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스커드 공격은 이듬해에도 이어졌고, 1985년에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는 모두 100발 이상의 미사일을 이란으로 발사했다. 이라크의 공격에 대항하여 이란도 미사일 보복공격을 계획했지만, 보유한 탄도미사일이 없었다. 이란은 1985년이 되어서야 리비아로부터 스커드-B 미사일을 소량 도입하여 바그다드(Baghdad)와 키르쿠크(Kirkuk)를 공격했다.

수도가 공격당하자 격노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도 테헤란(Teheran)에 대한 보복공격을 지시했다. 스커드-B의 사정거리로는 테헤란 공격이 어렵게 되자, 이라크는 소련에 TR-1 미사일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이라크는 스커드를 개량하여 사거리를 늘린 알 후세인(Al Hussein) 미사일을 개발했다. 한편 그사이 이라크와 이란은 모두 탄도미사일 재고가 바닥났는데, 이라크는 소련으로부터 스커드-B 300발을 수입했다. 소련 수입선이 없는 데다가 리비아마저 스커드 제공이 어렵게 되자,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스커드-B 복제품인 ‘화성-5’를 도입하는 한편 미사일 국산화를 추진했다.

한편 이란-이라크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양측은 서로에게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전술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1988년 2월 29일부터 4월 20일 사이 양측은 탄도미사일을 주고받는 ‘도시들의 전쟁(war of the cities)’을 수행했다. 2개월간 이라크는 미사일 189발을 이란 주요 도시 6개소에 발사했다. 발사한 미사일의 대부분은 사정거리가 긴 알 후세인이었고, 테헤란에 135발, 곰(Qom)에 23발, 에스파한(Isfahan)에 22발 등이 떨어졌다. 심지어는 이라크가 미사일에 화학무기를 장착하겠다고까지 협박하자, 테헤란의 인구 30%가 피난길에 나섰다. 이에 대항하여 이란은 미사일 104발을 이라크로 발사하며 보복에 나섰다(일부 자료에 따르면 ‘화성-5’ 75~77발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틀어 이라크는 스커드와 알 후세인 미사일을 합쳐 약 520발을 발사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이란은 약 177발을 발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는 무려 520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출처: Public Domain>

- 스커드의 소모장, 아프가니스탄 내전

실제로 스커드 미사일이 가장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1989년에서 1992년 사이에 펼쳐진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였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은 마치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처럼 엄청난 내상을 입고 급기야는 1989년 철군을 결정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1,000발 이상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 바 있다. 한편 철수 과정에서 소련은 자신들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에 엄청난 양의 스커드-B형 미사일과 C형 미사일을 제공했다. 소련은 1989년 초반에만 500발을 이전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게 스커드를 이전하면서 철군에도 불구하고 고문단만큼은 남겨두었다. 아프가니스탄군은 완편된 스커드 포대를 운용했는데, 이 스커드 포대는 포대당 이동식 발사차량 3대, 미사일재장전차량 3대, 기상관측차량 1대, 각종 급유차량과 지휘통제차량 등으로 구성되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은 곧바로 내전에 빠져들었다. 무자헤딘(mujahedin)으로부터 수도 잘랄라바드(Jalalabad)가 공격당하자 정부군은 소련군 고문단의 지원 하에 3월부터 6월 사이에 무려 438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칸다하르(Kandahar)로 향하는 살랑(Salang) 협곡 등 주요한 지역이 모두 스커드 미사일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스커드 공격은 정밀하지 못하여 주로 지역제압용으로만 사용되었는데, 특히 심리적 효과가 컸다고 알려져 있다. 스커드 공격을 받은 반군들은 크게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이후에는 스커드 공격에 살아남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병력을 분산함으로써 사상자를 최소화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스커드를 응징보복용 무기로도 사용했다. 1991년 3월 호스트(Khost) 지역이 반군에게 점령당하자, 정부군은 곧바로 스커드 미사일 4발을 발사하여 1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스커드 공격으로 최대 사상자를 기록한 것은 아사다바드(Asadabad) 공습으로, 스커드 2발이 시장 구역에 떨어지면서 30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애초에 이슬람 반군 지도자를 겨냥한 이 스커드 미사일 발사로 공격 대상 중 한 명인 자밀 알 라흐만(Jamil al-Rahman)이 사망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기간 동안 약 1,700~2,000발의 스커드 미사일이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V-2 공격 이후 한 전쟁에서 미사일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사용된 전례는 없다. 1992년 1월 소련군 고문단이 귀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미사일 공격능력은 심하게 저하되었고, 무자헤딘 반군이 스커드 보급기지를 점령하면서 더 이상 발사는 없었다. 이렇게 공산 정부는 무너졌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각 군벌끼리 정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에 들어가면서 결국 내전은 더욱 커졌고, 스커드 미사일도 각 군벌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미사일 운용 관리를 못 해서 1992년부터 1996년 사이에 발사된 스커드는 겨우 44발에 불과했다. 1996년 탈레반(Taliban)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은 스커드 미사일들을 다 수거했지만, 운용능력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2001년까지 겨우 5발이 발사되었을 뿐, 남아 있던 운용 가능한 스커드 5기는 2001년 10월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습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기간 동안 1,000여 발, 철수 후 내전 기간 동안 정부군을 통해 2,000여 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총 3,000발에 가까운 발사 기록을 세웠다. <출처: Public Domain>

- 스커드의 위력을 전 세계에 알린 걸프전

걸프전에서 이라크는 스커드 미사일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다국적군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개전 당시 이라크는 스커드와 알 후세인 미사일 이외에도 알 후세인의 단축형인 알 히자라(Al-Hijarah) 미사일과 고정 발사대에서 운용되는 장거리 미사일인 알 아바스(Al-Abbas)를 보유했었다. 이라크는 이러한 탄도미사일 전력을 바탕으로 미군 주력부대를 전략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스라엘로부터 반격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당시 쿠웨이트를 탈환하자는 명분으로 대다수의 아랍국가를 포함한 다국적군이 형성되었는데, 이라크군은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면 아랍국가들이 다국적군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라크군은 스커드 계열의 탄도미사일을 모두 88발 발사했다. 이 가운데 46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군사목표를 향해, 그리고 42발이 이스라엘의 도시와 민간인을 향해 발사되었다. 스커드 미사일에 대한 크고 작은 피해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에 발사된 미사일 가운데 38발이 이스라엘 영토 내로 떨어져 2명이 사망하고 2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피해는 대부분 텔아비브에서 발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다란(Dhahran)의 미 육군 기지에 스커드 미사일이 명중하여 펜실베이니아 주방위군 28명이 사망하고 110여 명이 부상을 입어 가장 큰 피해를 기록했다.

걸프전에서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전략적인 견제에 나서 스커드 미사일의 위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 <출처: 미 국방부>

다국적군은 스커드 미사일이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커다란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패트리어트(Patriot) PAC-2 미사일을 전진배치하여 이라크군의 스커드 공격을 방어하고자 했다. 수동적인 방어보다는 적극적인 수색격멸을 위해 스커드 이동발사대를 탐지하여 격멸하는 ‘스커드 대규모 사냥(Great Scud Hunt)’ 임무가 실시되었다. 다국적군은 무려 2,500여 회를 출격했지만, 실제로 스커드 미사일의 이동식 발사대를 직접 공격한 것은 215회 정도에 불과하며, 파괴된 발사대는 80여 기에 불과한 것으로 걸프전 항공력 조사 보고서(Gulf War Air Power Survey)는 밝히고 있다. 특히 스커드 미사일 발사는 80% 이상이 야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천후 주야간장비가 부족했던 다국적군 항공전력은 탐지와 추적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제2차 걸프전’이라고도 불리는 2003년의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lraq Freedom)에서도 이라크군의 탄도미사일 발사가 있었다. 이라크군은 걸프전 이후 유엔(UN)의 규제를 지키기 위해 탑재중량 300kg에 사거리 150km 이내의 아바빌(Ababil)-100 미사일과 SA-2를 개량하여 만든 알 사무드(Al Samoud) 미사일을 보유했다. 2003년 전쟁이 개시되자 이라크는 모두 14발을 발사했으나, 요격 범위 내에 있던 미사일들은 모두 패트리어트 PAC-2와 PAC-3에 의해 요격되었다.

- 스커드 잡는 패트리어트의 요격 성능을 보여준 예멘 내전

가장 최근에는 예멘이 스커드 미사일의 경연장이 되었다. 예멘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다가 1990년 양측의 합의로 통일을 이뤘다. 그러나 결국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994년에 내전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공산권이었던 남예멘 측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적 우위를 점하던 북예멘이 남예멘의 수도 아덴(Aden)까지 점령함으로써 상황은 종료되는 듯했다. 하지만 2015년 1월 시아(Shiah)파 무장단체인 후티(Houti)가 수도 사나(Sanaa)에서 대통령궁을 점령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전국은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가 득세하자,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 시아파를 저지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했다.

2015년 4월 사우디아라비아가 공습으로 후티를 겨냥하자, 후티는 6월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지를 향해 발사했다. 대부분의 미사일은 요격되었는데, 예멘의 마리브(Marib) 지역에서는 미사일 기습으로 아랍에미리트군을 포함하여 83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다만 이 공격에 사용된 미사일은 스커드가 아니라 스캐럽(SS-21 Scarab)이었다. 예멘에는 소련과 북한에서 도입된 스커드 계열 미사일 300여 발이 있는데, 상당수가 후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란에서 생산된 스커드 변종인 부르칸(Burkan)-1(부르칸은 화산이라는 뜻)이 2016년 9월부터 식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란의 탄도미사일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티는 2016년 10월 9일 사우디아라비아 메카(Mecca) 지역의 킹 파하드 공군기지(King Fahad Air Base)를 목표로 부르칸-1 미사일 4발을 발사했다. 3발은 사우디아라비아군의 패트리어트 PAC-3 포대에 의해 요격되었고, 1발은 520km를 날아와 기지 인근에 떨어졌으나 피해는 없었다. 10월 12일에는 사우디아라바이 카미스 무샤이트(Khamis Mushayt)의 킹 칼리드 공군기지(King Khalid Air Base)에 미사일 공격이 있었으나, 역시 패트리어트 포대에 의해 요격되었다. 한편 10월 28일에는 후티의 미사일이 메카 방향으로 날아들어 메카로부터 65km 지점에서 요격되기도 했다. 2017년 7월 27일에는 후티가 쏜 미사일이 또다시 메카를 향해 비행했는데, 메카로부터 69km 떨어진 알 와슬리야(Al-Wasliya) 지역에서 요격되었다. 최근의 스커드 공격은 패트리어트에 의해 모두 요격되면서 PAC-3의 신뢰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예멘군의 스커드 미사일 <출처: Public Domain>

- 기타 전장

스커드는 이외에도 제1·2차 체첸 전쟁,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 등에서 사용되었다. 제2차 체첸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250여 발을 발사하기도 했다. 시리아 내전에서는 2012년 12월 12일 정부군이 처음으로 스커드 계열의 탄도미사일 6발을 발사한 후 미사일 공격이 계속되었다. 특히 2013년 2월 22일에는 정부군의 스커드 공격으로 알레포(Aleppo)와 탈리파트(Tell Rifaat) 등의 지역에서 어린이 71명을 포함하여 1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리아군의 스커드 미사일 <출처: Public Domain>

한편 2013년 8월 21일 구타(Ghouta)에 대해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이 있었는데, 여기에 사용된 것이 방사포탄이나 스커드 미사일로 추정되었다. 화학무기로는 VX가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어린이 등 민간인을 포함하여 1,400여 명(미국 추산)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이 시리아의 화학무기 제작을 돕고 현지의 스커드 제작 시설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아사드 정권의 전투에 북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학무기 공격의 배후에 북한도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스커드 탄도미사일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 북한이 깊게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화성-6형(스커드-C)의 발사 장면 <출처: Public Domain>

* 다음 회는 R-17(스커드-B) 탄도미사일의 마지막 편으로 다양한 파생형을 소개합니다.


저자 소개

양욱 | 군사전문가
서울대학교 법대를 거쳐 국방대학교 국방관리대학원에서 군사전략을 공부했고, 줄곧 국방 분야에 종사해왔다. 중동지역에서 군 특수부대를 훈련시키기도 했고, 아덴만 지역에서 대(對)해적 업무를 수행하는 등 민간군사요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컨설팅과 교육, 훈련을 제공하는 민간군사서비스(PrivateMilitary Service) 기업인 AWIC(주)의 대표이사다. 또한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수석연구위원이자 국방부·합참·방위사업청 자문위원, 해·공·육군 정책자문위원으로 우리 국방의 나아갈 길에 대한 왕성한 정책제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