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9.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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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최전선에서의 기묘했던 전쟁

채널 제도 점령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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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투기에서 촬영된 건지 섬의 세인트피터포트 부두 폭격. 주민들에 대한 보복 위험이 있었지만 전쟁 내내 꾸준한 전투 행위가 이어졌다.

히틀러의 속셈

이미 열흘 전 독일군이 노르망디와 코탕탱 반도를 점령했기에 바로 코앞의 채널 제도에 대한 6월 28일의 공습은 사실 그리 빠른 군사 행동이라 할 수는 없었다. 6월 중순만 해도 아직 프랑스가 항복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독일은 계속해서 밀어붙여야 했다. 당연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점령해도 되는 인근의 섬들은 일단 시야 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가 항복하고 3일이 지나서야 움직인 것이었다.

파리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는 독일군.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잠시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채널 제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그런데 그보다는 당시 히틀러가 영국을 잠재적인 동맹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어 행동이 늦었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즉각 공격을 가하자는 내부 의견에도 불구하고 채널 제도뿐 아니라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잠시 지체된 가장 큰 이유는 총통의 명령이 하달되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화친을 맺자는 당근과 더불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가할 채찍도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채널 제도는 영국에게 독일의 생각을 강력히 어필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 되었다. 무주공산과 다름없었지만 점령을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 독일군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또한 피난을 가지 않은 6만의 영국인들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치의 우월함을 과시함과 더불어 영국이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들 편에 붙으면 각별히 대해 주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남기려 했다.

점령 직후 저지 섬에 배포된 독일군 포고문. 이로써 채널 제도는 독일에게 최초로 점령당한 영국의 영토가 되었다.

처음에 독일은 팔슈름예거를 투입해 제도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6월 30일, 본대 투입 전에 정찰대를 태운 제3항공군 소속 수송기 3기가 건지 섬에 내렸다. 이때 이들을 맞이한 이는 ‘국왕 폐하의 명령으로 채널 제도는 무방비 도시가 되었다’고 알리는, 일종의 항복 문서를 가지고 온 영국 경찰이었다. 이에 공수작전을 취소한 독일은 다음 날 채널 제도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선언하고 7월 4일, 자치 정부와 공식적으로 항복 조약을 체결했다.


신사적인 통치의 이면

이처럼 쉽게 저항을 포기하고 군사적으로도 의의가 적은 곳은 대개 소규모 2선급 부대를 주둔시켜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바로 그즈음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이곳을 전초이자 선전 대상으로 삼기 위해 점령군으로는 너무 과한 한 개 사단(제319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여타 지역, 특히 동부전선과 달리 주민 착취 행위를 금하고 구매 물품 대금과 숙박비를 즉시 지급하는 등의 신사적인 방법으로 통치를 했다.

저지 섬 중심가를 활보하는 독일군. 독일의 여타 점령지와 달리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당시 무려 1만 명 정도의 외지인이 일거에 들어오자 일시적으로 특수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본토와의 단절로 인해 곧바로 물품이 바닥났고 종전 때까지 생필품과 식량의 부족으로 많은 주민이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독일이 선전 효과 등을 노려 비록 강압적으로 억누르지는 않았어도 식량배급, 통행금지, 수시로 가해지는 체제 선전 행위 등으로 말미암아 주민들은 일상을 유지하는 데 불편한 점이 많았다.

1941년이 되어 독일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수건을 던지고 영국 점령을 포기한 후 독소전쟁을 개시하자 채널 제도의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히틀러가 해군력이 앞선 영국이 채널 제도를 탈환하고 유럽 대륙으로의 진공 거점으로 삼지는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해방도 가장 늦게 되었을 만큼 군사적으로만 본다면 영국이 이곳을 탈환해도 당장의 전략적인 효과가 크지 않았기에 독일의 이런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환으로 토트(Todt)라 불린 건설대 조직에 의해 해안가에 지어진 독일군 방어 시설. 점령지의 많은 주민들이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결국 히틀러의 근심 때문에 채널 제도 점령군은 한 개 군단 규모인 4만으로 대폭 증강되었는데, 이는 주민 3명당 독일군이 2명일 정도의 엄청난 수준이었다. 또한 대대적으로 주민들을 동원해 곳곳에 감시 초소, 벙커 같은 수많은 방어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통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비둘기 사육을 엄금하는 등의 수많은 제약도 가해졌다.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

1941년 말 영국군이 비시 프랑스령 시리아를 점령한 후 현지 독일인을 추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2,200여 명의 채널 제도 주민이 추방되어 프랑스에 위치한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수시로 유태인 색출도 벌어졌다. 1942년에는 많은 독일 점령군 병사들이 사망했을 만큼 발진티푸스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쥐 죽은 듯이 지냈지만 이처럼 어려움이 커지자 바다를 건너 탈출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은밀히 침투한 영국 정보대원에 의해 살포된 선전물. 비록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는 없었지만 주민들의 의지 함양에 도움이 되었다.

순순히 섬을 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국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점령 직후인 1940년 7월부터 1944년 초까지 적진 탐색과 선전 활동을 위해 소규모의 코만도 대원들이 침투해 공작 활동을 벌였다. 탈출 경로가 좋지 않아 주로 독일군의 배치 형태와 방어 시설의 위치 등을 은밀히 정탐하거나 신문을 비롯한 선전물을 살포한 후 퇴각하는 소극적인 활동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해안가의 군사 시설을 제거하기 위해 공군의 폭격이나 해군의 포격이 실시되기도 했다. 민간의 피해와 독일군의 보복 우려 때문에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총 22차례의 작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93명의 사망자와 25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 항구 인근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1942년 이후에는 원주민뿐 아니라 독일 점령지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강제 노역을 위해 섬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전쟁 내내 주민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은 고질적인 식량 부족이었다. 프랑스로부터 물자가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공급 우선순위가 주둔군 다음이다 보니 절대량이 부족했다. 역설적이게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이 유럽에 교두보를 확보한 1944년 6월 초에 식량난이 가장 극심했다. 채널 제도에 주둔한 독일군 대부분이 철군하면서 식량 공급도 함께 차단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해방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끝난 그들만의 이야기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약 1만 정도의 수비대가 주민들을 인질 삼아 저항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이 섣불리 섬으로 진입하기도 곤란했다. 하지만 생필품 공급이 차단된 상태로 대치가 길어질수록 이로 인해 받는 고통은 독일군보다 주민들이 더욱 컸다. 채널 제도 자치 정부가 공동 식량 조달과 분배 등을 통해 근근이 버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1945년 5월 9일 영국 구축함 불독(HMS Bulldog) 함상에서 벌어진 채널 제도 주둔 독일군 대표의 항복 장면.

결국 기아 상태까지 우려되자 독일 주둔군이 적십자에 주선을 요청하면서 연합군과 물밑 접촉을 시작했고 11월 5일, 자치 정부, 독일 점령군, 영국 정부, 적십자사가 참여한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에서 지원한 식량과 생필품이 독일 점령군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적십자를 통해 채널 제도에 공급되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채널 제도의 독일 주둔군은 단지 항복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적진에 고립된 패잔병과 다름없었다.

민간인의 사상을 우려한 연합군은 최대한 교전을 삼가고 항복을 종용했지만 독일군은 본국의 지시 없이 응할 수 없다며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히틀러는 채널 제도에 홀로 떨어진 군대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상태였다. 결국 이들이 총을 내려놓은 것은 독일이 항복한 뒤 이틀이 지난 1945년 5월 9일이었고 연합군이 상륙해 독일군의 무장 해제를 완료한 시점은 5월 20일이었다.

건지 섬에서 살다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3명의 유태인에 대한 추모비. 이처럼 조용해 보였던 채널 제도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 8월까지 300여 명이 치료 중 사망했을 정도로 당시 독일 주둔군의 영양 상태가 몹시 나빠서 무장 해제가 아니라 사실은 패잔병 구출에 가까웠다. 이렇게 해서 영국 영토 중 가장 먼저 빼앗겼지만 가장 늦게 해방된 채널 제도에서의 전쟁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지금까지 알아 본 것처럼 가장 오래갔던 전쟁터였음에도 채널 제도에서의 제2차 대전은 단지 그들만의 그런저런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제2차 대전은 거대한 전쟁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