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9.01 18:07

글자크기

[전쟁사]

최전선에서의 기묘했던 전쟁

채널 제도 점령전 [1]

0 0
채널 제도를 점령한 독일군 장교와 현지 치안을 담당하던 영국 경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2차 대전에서 영국과 독일의 관계를 상기한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모습이다.

독일이 점령한 영국 영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직후인 1939년 9월 3일 전쟁에 뛰어든 영국은 1945년 5월 8일에 이르러 미국, 소련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승전국이 되었다. 사실 소련은 전쟁 초반엔 독일의 동맹이었고 미국, 이탈리아는 중립이었다. 프랑스는 전쟁의 시작을 영국과 함께했지만 1940년 6월 25일 항복한 이후 역사의 뒤편으로 한동안 사라졌다. 따라서 영국은 제2차 대전의 발발부터 마지막까지 독일과 쉼 없이 교전을 벌인 유일한 나라였다.

1945년 3월 24일 라인 강을 도하하는 영국군. 이처럼 영국은 제2차 대전의 시작과 끝을 독일과 함께한 호적수였다.

물론 지리적 구조로 말미암아 6년 내내 육지에서 전선을 맞댄 채 밀고 당긴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과 독일은 노르웨이, 프랑스,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는 물론 대서양과 지중해에서도 치열하게 맞붙었다. 단지 이 둘이 주먹을 섞은 장소들만 놓고 본다면 영역이 가장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정도로 넓은 공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싸웠던 독일과 영국은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였다.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에서 초유의 위기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영국의 존재는 독일이 제2차 대전에서 패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미국이 상당히 큰 역할을 담당하긴 했지만 만일 1940년에 영국이 굴복했다면 유럽에서 독일에 대항할 수 있는 안전한 교두보를 찾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만큼 영국의 생존이 갖는 의의는 대단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안전하게 살아남아 반격의 초석이 되었던 영국의 일부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영국 본토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인데, 전쟁 초기인 1940년에 빼앗겼고 놀랍게도 독일이 항복하고 난 이후에야 해방이 되었다. 시간상으로 이보다 오래 독일에게 점령당한 곳은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밖에 없었다. 바로 영국의 채널 제도였다.


영국 왕실의 땅

채널 제도는 영불해협의 노르망디(Normandy) 인근에 위치한 일군의 섬들을 말하는데, 현재 저지(Jersey), 건지(Guernsey), 올더니(Alderney), 사크(Sark), 험(Herm), 제투(Jethou), 브레쿠(Brechou)의 7개 유인도와 한때 사람이 거주했던 리우(Lihou)를 포함한 여러 무인도와 암초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제2차 대전 직전에 주민이 10만에 가까웠지만 면적은 200km2에 불과해 인구밀도는 높은 편이었다.

7개의 유인도와 다수의 섬으로 이루어진 채널 제도는 영국의 영토지만 프랑스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출처: (cc) User:Cnbrb, User:UKPhoenix79, User:TomPhil at Wikimedia.org>

그런데 지도상으로 보자면 채널 제도는 저지 섬을 기준으로 영국 본토까지 거리가 160km인 반면 프랑스의 코탕탱(Cotentin) 반도까지는 25km에 불과하다. 따라서 관심을 두지 않으면 이곳을 프랑스의 영토라고 생각할 이들이 많지만, 유명한 지브롤터(Gibraltar)처럼 엄연한 영국령이다. 일부 인근의 무인도를 놓고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얼굴을 붉힐 만큼 심각한 영토 분쟁은 없었다.

이처럼 프랑스에 훨씬 가까운 채널 제도가 영국령이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곳을 포함한 이른바 노르망디 지역은 911년 약탈을 일삼던 노르만 족의 횡포에 진저리가 난 서프랑크의 샤를 3세(Charles III)가 해당 지역을 하사하고 추장인 롤로(Rollo)를 영주로 봉하면서 노르망디 공국이 되었다. 그러던 1066년 롤로의 후손인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바다를 건너가 영국을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 캉 생테티엔 성당에 안치된 윌리엄 1세의 무덤. 노르망디 공작인 그가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 채널 제도가 영국의 역사에 편입되었다. <출처: (cc) Supercarwaar at Wikimedia.org>

이렇게 탄생한 영국의 왕조가 바로 노르망디(House of Normandy) 왕가다. 잠시 분리되기도 했었지만, 이후 약 1세기 동안 노르망디 공작은 영국의 왕을 겸임했다. 따라서 영국의 영토가 프랑스에 위치한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1259년 루이 9세(Louis IX) 때 노르망디가 프랑스에 정식 편입되었지만 채널 제도만큼은 노르망디 공, 즉 영국 국왕의 영지로 남게 되었다.


사수냐 포기냐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견원지간이 되도록 만든 100년 전쟁은 물론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채널 제도는 변함없는 영국령이었다. 굳이 형식으로만 따진다면 영국의 영토라기보다는 여전히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는 영국 왕의 속령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영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의회가 자치를 행사하며 문화나 생활 방식은 프랑스에 가깝다. 단지 외교, 국방 등을 영국에 의탁할 뿐이다.

2012년 5월 9일에 저지 섬 중심가에서 있었던 해방기념일 행사. 독일 점령 기간은 채널 제도의 주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외부에서는 이곳의 섬들을 모두 합해 채널 제도로 지칭하지만, 별개의 입법기관을 가진 저지 관할구(Bailiwick)와 여타 섬들로 이루어진 건지 관할구로 나뉘며 당연히 개별적인 취급을 받는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하고 조만간 유럽연합(EU)을 탈퇴할 예정이나 채널 제도는 이전부터 유럽연합의 예외 지역이었다. 한마디로 독특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프랑스의 문화권에 속하게 된 영국의 예외적인 영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940년 5월 10일 침공 이후 쾌속의 진격을 하던 독일에게 아직 점령하지 못한 프랑스 영토는 프랑스 정부의 항복과 함께 자연스레 발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채널 제도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었지만 이미 영국과 독일이 교전 상태였기에 그냥 놔둘 수도 없었다. 따라서 독일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전역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음에도 별개의 점령 작전을 벌여야 했다.

됭케르크 해안가에 정박한 철수선에 올라타는 영국군 병사들. 영국은 프랑스에 가까운 채널 제도를 놓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랑스를 완전히 포기하고 본토 방어에 전념하기 위해 6월 4일, 됭케르크(Dunkirk)에서 원정군 주력 부대의 철수를 완료한 영국에게도 채널 제도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영국령이라 해도 본토에서 멀다 보니 군사적으로 방어하기가 어렵고, 또한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0만에 가까운 국민들을 고스란히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민들의 선택

고심 끝에 영국 정부는 채널 제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당장 본토를 지키기 위해 단 한 명의 병사도 아쉬운 판에 굳이 전력을 나누어 방어도 어려운 이곳에 배치할 수는 없었다. 또한 지역이 워낙 협소하고 주민들이 집중되어 있어서 교전이 벌어질 경우 많은 피해가 예상되었다. 다만 오랜 세월 자치를 해온 곳이어서 전적으로 주민들에게 피난에 관한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채널 제도에서 본토로 피난한 어린이들에게 구호품을 지급하는 모습을 담은 영국의 전시 선전 사진. 하지만 주민의 2/3는 현지 잔류를 선택했다.

6월 15일, 영국 정부는 주민들에게 섬의 포기를 알림과 동시에 원할 경우 본토로의 피난을 돕겠다고 통보했다. 투표를 통해 전 주민이 피난을 결정한 올더니 섬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어린이를 제외한 9만 7천 명의 주민들 중 6만 6천 명이 채널 제도에 남기로 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오랫동안 살아 왔던 고향을 등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영국 정부도 이들의 의사를 존중해 피난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들이 독일에게 부역을 하거나 선전 행위에 동원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정부가 국민과 영토를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기에 책임을 묻거나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독일이 이곳을 점령해봐야 영국 본토를 공격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점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만일 영국의 생명선이었던 지브롤터나 몰타(Malta) 같은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많은 주민이 고통스러울 수 있는 잔류를 선택했지만 4/5의 어린이들은 안전한 본토로 피난을 보냈다.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

채널 제도 자치 정부는 비상사태로 전환했고 민간의 피해를 막기 위해 6월 16일, 무방비 도시(Open city)를 선언했다. 하지만 통신망 미비 등으로 인해 이 내용이 독일군에게 미처 접수되지 않았다. 그래서 6월 28일, 건지 섬을 살피던 독일의 정찰기가 세인트피터포트(St. Peter Port) 부두에 주차된 트럭들을 군사용 장비로 오인하고 폭격하는 바람에 44명의 주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