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6.2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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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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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의 추격을 피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눈 덮인 고산 국경지대를 넘어 후퇴하는 세르비아군




고난의 후퇴

미트로비차의 함락과 동시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함께 붙어 싸워준 몬테네그로와의 연결은 차단되었고 이제 세르비아에게 남은 마지막 통로는 알바니아였다. 아드리아 해에 붙은 알바니아는 중립국이었으나 심정적으로는 동맹국에 가까웠다. 1913년 독립했지만 무슬림 비율이 높은 남부 지역은 오스만의 재지배를 원할 정도였고 가톨릭 교도가 상당수인 북부는 오스트리아 내의 크로아티아와 친한 편이었다.

1999년 발발한 코소보 내전 당시에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미 해병대 - 이 사건으로도 알 수 있듯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관계는 좋지 않다.

반면 패권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바다로의 통로를 확보하고자 노골적으로 알바니아를 탐내던 내륙국 세르비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알바니아계가 상당수인 코소보 지역의 지배권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다. 이러한 알바니아가 후퇴 중인 세르비아군의 피난처 노릇을 못마땅해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우호적인 그리스나 바다를 건너 연합국에 막 가담한 이탈리아로 가려 해도 알바니아를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협조를 얻을 가능성도 희박하고 외교적으로 교섭을 벌일 시간도 없었던 세르비아는 알바니아를 그냥 통과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뒤에서 동맹군이 추격해 오므로 별다른 대안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바니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최악의 경우 또 다른 전쟁도 고려해야 했을 만큼 세르비아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 신세였다. 자칫하면 알바니아가 세르비아군의 마지막 무덤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세르비아군은 비위생적인 상황과 영양실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티푸스까지 만연해 수많은 병사들이 고통을 받거나 목숨을 잃었다. 참모총장 푸트니크는 그동안의 격전으로 20여만으로 줄어든 지치고 병든 군대를 이끌고, 해발 2,694미터의 프로클레티예(Prokletije) 산을 정점으로 국경을 따라 길게 뻗은 산악 지대로 진입했다. 맨 뒤를 엄호하던 후위대는 추격해 온 동맹군을 드린(Drin) 강 교두보에서 막아내다가 장렬히 전멸했다.



전투가 막을 내리다

연일 이어지는 악천후에 보급품도 다 떨어진 상태로 암울한 탈출 길을 나선 군대에 용기를 준 이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묵묵히 지옥의 행군을 함께한 71세의 국왕 페타르 1세였다. 그리고 패주하는 군대를 따라 점령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수많은 민간인들이 기약도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이렇게 길을 가득 메운 피난민들은 본의 아니게 동맹군의 추격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후퇴하는 군을 따라 피난길에 오른 세르비아인들 - 박해와 보복을 두려워할 만큼 민족 간의 대립이 첨예했고 이런 감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2월 초가 되자 세르비아군을 쫓아 알바니아로 쇄도해온 동맹군은 비오서(Vjosë) 강까지 전진했다. 어느덧 약소국 알바니아는 서부전선의 벨기에처럼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월경을 막고자 했지만 알바니아의 실력으로는 물밀듯이 넘어오는 세르비아군과 이를 추격하는 동맹군을 그냥 지켜볼 도리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땅에서 외국 군대들 간의 격전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할 처지였다.

한편 연합국은 세르비아의 몰락을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알바니아의 두라초(Durazzo) 해안까지 밀려난 세르비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연합국 함대가 긴급히 출동했고 동시에 지상군을 투입해 알바니아 남쪽 국경 일대를 점거하며 동맹군을 견제했다. 그러는 사이에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병력은 연합국이 점거 중인 코르푸(Corfu)를 비롯한 에게해의 여러 섬들로 옮겨갔고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육상으로 국경을 넘어 그리스로 탈출했다.

알바니아를 가로질러 해안가로 이동 중인 세르비아군 - 교전뿐 아니라 질병과 기아로 많은 이들이 숨져간 이때의 후퇴 작전은 세르비아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아드리아 해에서 작전 중인 오스트리아 해군이 연합국 해군을 막기에 역부족이어서 가능했던 철수 작전이지만 그 와중에 많은 이들이 전사하거나 영양부족과 질병으로 병사했다.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처럼 동맹군의 대대적인 공세와 철수 과정 중에 세르비아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약 15~20만 정도가 죽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세르비아 현대사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 하나가 되었다.



패배로 끝난 항전

두라초 해안을 보루 삼아 동맹군의 진입을 막아내며 열흘 가까이 치른 철수전은 12월 12일 막을 내렸다. 자료마다 차이가 많지만 세르비아군의 피해 정도를 기준으로 파악하자면 불과 5만 정도가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들은 프랑스, 그리스 등으로 옮겨가 계속 항전을 벌였으며, 불굴의 신념으로 세르비아군을 이끌었던 참모총장 푸트니크는 1917년 망명지 프랑스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생을 마감했다.

불굴의 신념으로 세르비아군을 이끈 참모총장 라도미르 푸트니크 - 세르비아 함락 후 프랑스로 망명해 투쟁을 계속하다 승전을 끝내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항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1년 6개월 가까이 강대국을 상대로 끈질기게 항전을 벌여왔던 세르비아는 이렇게 처절하고도 완벽하게 패했다. 홀로 남게 된 몬테네그로도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모이코바츠(Mojkovac)에서 5배나 많은 오스트리아군을 붕괴시키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결국 동맹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1916년 1월 17일 항복했다. 그렇게 제1차 대전 최초의 전쟁터였던 세르비아 전역은 일단 막을 내렸다.

사라예보 사건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국지전으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세르비아 전역은 독일, 불가리아, 영국, 프랑스, 몬테네그로가 개입하고 주변의 그리스와 알바니아까지 본의 아니게 말려든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그 와중에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동맹국은 약 32만의 전사상자, 포로, 실종자가 발생했고 세르비아를 비롯한 연합국도 비슷한 규모의 손실을 입었다.

종전 후인 1919년 파리에서 벌어진 승전국 퍼레이드 행사에 등장한 세르비아군 - 비록 동맹군에게 패망했지만 세르비아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저항을 하면서 승전국의 위치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동서에서 거의 동시에 벌어진 연합국과 독일의 충돌이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세르비아 전역은 전쟁사의 구석구석을 훑어보아야 겨우 눈에 띌 만큼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실 양측 합쳐 65만여 명이란 엄청난 인명 피해도 당시에 벌어진 여타의 거대 전투들과 비교한다면 그다지 큰 수준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제1차 대전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발칸의 맹주로 부활하다

소국인 룩셈부르크를 예외로 치면 세르비아는 제1차 대전에서 어느 일방에게 완전히 점령되어 패한 최초의 나라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후 몬테네그로와 뒤늦게 연합국에 가담했다가 같은 길을 간 루마니아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연합국,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더 이상 이런 사례는 없었다. 하다못해 전쟁에서 패한 동맹국들도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을 뿐이지 항복 당시에 대부분의 영토를 보존하고 있을 정도였다.

동맹국 점령 시기에 불가리아군에게 학살당한 세르비아인들의 주검 - 패망 후에도 격렬한 항전을 계속한 덕분에 전후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의 맹주가 되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정복당했다는 사실은 패해도 결코 항복하지 않았을 만큼 세르비아의 저항이 대단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세르비아인들은 강점 기간 동안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무장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인상적인 활약상은 종전 후 세르비아가 당당히 승전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유고슬라비아를 건국하면서 발칸 반도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앓던 이 같았던 세르비아를 마침내 처단한 동맹국은 독일에서 오스만에 이르는 전략 통로를 완전히 확보하면서 동부전선의 전력을 러시아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현재의 슬로베니아인 카르니올라(Carniola) 지방을 놓고 이탈리아와 별도로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감당할 만해서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 1916년 봄을 기점으로 러시아는 완전히 전략적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세르비아군 야포를 노획한 후 승자의 기쁨을 누리는 오스트리아군 - 하지만 이들은 결국 제1차 대전에서 패했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애초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고 덕분에 세르비아도 항전을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멸망 후 러시아가 곤혹스러워졌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러시아도 세르비아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화약고인 발칸 반도의 불길은 이렇게 잡힐 운명이 아니었다. 제1차 대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중립국인 그리스와 루마니아가 참전 여부를 놓고 한창 저울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