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6.1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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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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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친을 점령한 불가리아군이 후속하여 도시로 진입하는 독일군을 환영하고 있다.



다시 불타오르다


10월 7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대대적인 포격으로 콜루바라 전투 이후 잠잠했던 세르비아 전역이 10개월 만에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세르비아의 방어 거점인 사바 강, 드리나 강을 도하해 일사천리로 베오그라드까지 밀고 들어갔다. 세르비아군은 도시 외곽에 구축한 참호를 이용해 격렬히 저항했으나 새롭게 마주한 독일군은 지금까지 겪었던 오스트리아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베오그라드를 지나는 사바 강 인근에 방어선을 구축한 세르비아군의 모습 - 하지만 새롭게 마주한 독일군의 전투력은 지금까지 겪어 온 오스트리아군과 차원이 달랐다.

화력은 물론 보병 부대의 전투력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베오그라드는 10월 9일 함락되었다. 지난번에 세르비아군은 즉시 반격을 시도해 탈환했지만 이번에는 기약도 없이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세르비아는 가까운 그리스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군이 있었기에 희망을 잃지는 않고 있었다. 세르비아군 참모총장 푸트니크는 남쪽의 마케도니아로 이동해 전력을 추스르기로 했다.

그리스 국내에서는 이 당시를 ‘대분열(National Schism)’로 표현할 만큼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수상이 이끄는 친연합국 참전파와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e I) 국왕이 중심인 친독일 비참전파의 대립이 극심했다. 때문에 아직 중립이긴 했지만, 그리스가 세르비아와 가까운 살로니카에서 연합군의 무단 상륙과 점거를 막지는 않았으므로 희망을 걸어볼 만했다. 하지만 10월 14일, 불가리아가 선전포고를 하고 국경을 넘어 쇄도하자 꿈은 산산조각 났다.

1915년 10월 12일 전선 투입을 위해 준비 중인 불가리아군 - 그동안 강력하게 저항하던 세르비아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결정타를 날렸다.

사실 이번 대공세의 주역은 그동안 격전을 치러 피곤했던 오스트리아나 독일보다 30여만의 싱싱한 전력을 동원한 불가리아였다. 제1, 2차 발칸 전쟁 참전으로 교전 경험도 풍부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적개심이 컸기에 전투 의지도 높았다. 불가리아는 전쟁 선포와 함께 소피아(Sofia) 북쪽에 전개한 제1군이 코소보를, 남쪽에 배치된 제2군이 마케도니아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비록 베오그라드를 내주었지만 지연전을 펼치며 남쪽으로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던 세르비아군에게 갑자기 퇴각로 동쪽에서 나타난 불가리아군은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최악의 경우 그리스로의 탈출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이는 마지막 보루가 차단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래서 푸트니크는 위에서 밀고 내려오는 독일, 오스트리아군보다 등 뒤에서 나타난 불가리아군을 먼저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출몰한 불가리아군을 막기 위해 긴급히 이동하는 세르비아군 -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는 전투력이 가장 좋은 세르비아 제2군을 국경 인근의 니슈시(Niš)로, 추가로 3개 사단을 좀 더 남쪽의 오브체 폴레(Ovče Pole)로 긴급 전개시켰다. 계곡과 구릉이 이어진 험준한 지형이지만 긴급 투입한 15만의 정예 병력으로 약 350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을 완벽히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스테파노비치 세르비아 제2군 사령관은 주요 통로 위주로 예하 부대를 분산 배치했다.

곧바로 격전이 시작되었으나 두 배나 많은 불가리아군과의 대결은 승패가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없었다. 현대전은 양보다 질이고 당시에도 탄넨베르크 전투나 고를리체 전투의 독일군처럼 적은 병력으로 상대를 제압한 경우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병력이 많은 쪽이 이길 가능성이 높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모두 상대를 압도할 만큼의 중화기는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과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남쪽으로 후퇴하던 세르비아군의 동쪽에서 불가리아군이 공격해 들어오자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불가리아군의 공격에 니슈시, 피로트(Pirot), 모라바(Morava) 일대에 구축한 세르비아군 방어선 곳곳이 붕괴되었다. 스테파노비치는 병력을 이끌고 남서쪽의 코소보 방향으로 후퇴하며 지연전을 펼쳤다. 이때 11월 초부터 연일 이어진 폭우는 후퇴에 나선 세르비아도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지만 불가리아군의 공격을 지연시킨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그렇게 세르비아 제2군은 불가리아 제1군의 매서운 공격을 열흘 가까이 받아냈다.



이해가 걸린 땅, 마케도니아


남쪽의 오브체 폴레 일대의 전황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가리아 제2군은 이곳을 거쳐 스코페(Skopje)를 점령함으로써 마케도니아를 신속히 석권할 예정이었다. 당시 세르비아의 영토였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 직접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여서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요지였다. 세르비아군 참모총장 푸트니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브체 폴레 방어를 위해 4만의 정예 3개 사단을 급파할 정도였다.

푸트니크는 7만 명의 영불 연합군이 국경을 넘지 못하고 열흘 가까이 무단으로 그리스 영토 내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들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싸워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브체 폴레 일대의 불가리아 제2군이 약 10만 정도였으므로 연합군과 세르비아군을 합치면 얼추 대등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에 집착이 강했던 불가리아군의 전투력은 단순한 숫자 이상이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불가리아인들은 문화와 언어의 유사성을 이유로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의 일부로 여겼다. 반면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이런 갈등은 제2차 발칸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독일과 연합국이 불가리아를 자기편에 가담시키려고 치열한 외교전을 펼칠 때 내세운 대표적 조건이 마케도니아 할양일 정도였다.

점령 후 마케도니아에서 민사 작전을 벌이는 불가리아군 - 불가리아를 자기편으로 가담시키기 위해 연합국과 동맹국이 제시한 조건이 마케도니아의 할양이었다.

제1차 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로 흔히 민족간, 종교간의 대립을 들지만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오스만이 한배를 타고, 삼국동맹이던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가담한 것만 보더라도 자국의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처럼 이 기회에 지난 전쟁의 복수극을 연출하고 마케도니아를 병합하려 한 불가리아의 의지는 대단했고, 지쳐있던 세르비아보다 전투력도 당연히 좋았다. 그러던 10월 19일, 절망에 빠진 세르비아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좌절된 구원


2개 사단으로 구성된 4만의 프랑스 원정군이 마침내 국경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진입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절망에 빠졌던 세르비아인들의 사기가 올라가면서 각지에서 연일 자원입대자들이 속출했고 정부도 미트로비차(Mitrovica)로 수도를 옮겨 항전 의지를 새롭게 했다. 그렇지만 악천후로 말미암아 11월 2일이 되어서야 스코페 남쪽 50킬로미터에 위치한 크르나(Crna) 강을 향해 진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살로니카에 상륙한 프랑스군 - 세르비아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토도로프(Georgi Todorov) 불가리아 제2군 사령관은 서쪽으로 패주하는 세르비아군의 추격을 멈추고 크리포라크(Krivolak)에서 주력을 남쪽으로 돌려 프랑스군을 상대하기로 결심했다. 현지 지형이 낯설었던 프랑스군은 바르다르(Vardar) 강이 지나는 좁은 협곡을 통해 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계곡 양쪽에 매복하고 있던 불가리아군이 친 덫에 스스로 빠져든 자살행위였다.

결국 습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 후퇴해야 했다. 말이 후퇴지 무질서한 패주에 가까웠다. 결국 세르비아의 사기도 급전직하해 11월 15일이 되었을 때 북부의 모라바, 남부의 오브체 폴레를 비롯한 모든 거점에서 사수를 포기하고 전면 후퇴에 돌입했다. 동맹국, 특히 불가리아의 공세는 상당히 매서워 순식간에 코소보와 마케도니아를 석권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스코페에 임시로 마련된 야전 병원을 찾아 부상병을 위문하고 나오는 페타르 1세 - 전쟁 발발 후 수시로 현장을 찾아가 세르비아군을 격려해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세르비아를 지원하기는커녕 30퍼센트의 전력 손실을 입고 대부분의 중화기를 협곡에 내팽개친 채 도주하기 바빴던 프랑스군은 11월 21일, 살로니카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영국군 제10아일랜드 사단의 도움을 받아 궤멸을 면하고 위험 지역을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11월 23일에는 그리스와 세르비아를 연결하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고 임시수도였던 미트로비차가 동맹군에게 점령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