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6.0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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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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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갈리치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지나 행군하는 독일군 - 오스트리아군의 전투력에 실망한 독일은 직접 세르비아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오스만의 참전


1914년 말이 되자 최초의 당사자들인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는 물론, 이들을 돕겠다고 달려들어 판을 키워버린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그 어느 누구도 이제는 전쟁이 쉽게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규모가 커지고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벨기에처럼 어쩔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간 나라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도 어느 쪽 편을 들어 전쟁에 가담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럽 원정 전에 토론토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캐나다군 - 이처럼 전쟁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자 여러 나라들이 참전을 고려했다.

사실 이런 고민은 자발적이라기보다 기존의 참전국들이 동참을 요청해 생겨난 문제였다. 유럽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30년 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처럼 모든 강대국들이 뒤엉켜 싸운 후에는 반드시 질서의 재편이 일어났다. 나중에 그림자 취급을 당하며 배제되지 않으려면 참전 요청을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강대국 주변에서 힘겹게 살아온 약소국들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기는 편에 숟가락을 얹어야 되는데, 양측이 팽팽히 맞선 전쟁 초기에는 누가 승자가 될지 알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의 공세가 좌절되었지만 서부전선은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의 진격을 막아낸 상황이어서 전쟁의 향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바로 그즈음인 11월 1일, 양측으로부터 구애를 받아오던 오스만이 동맹국 가담을 전격 선언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오스만의 동맹국 가담 직후 발행된 독일의 선전물 - (좌에서 우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 독일의 빌헬름 2세, 오스만의 메흐멧 5세. <출처: (cc) anonymous, differents at Wikimedia.org>

이번 기회에 독일의 도움을 받아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으로 세를 뻗어 오던 영국과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발칸 반도와 크림 반도, 코카서스를 놓고 수차례 전쟁을 벌인 러시아와 사이가 나빴던 점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한배를 타게 된 오스트리아도 지난 수백 년간 발칸 반도를 놓고 싸워 온 사이였다. 미운 상대와 맞서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덜 미운 상대와 같은 편이 된 것이다.


독일의 결심


오스만의 동맹국 가담은 전쟁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전략적으로 연합국에 포위된 형국이었던 동맹국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반면, 역으로 지중해와 연결되는 러시아의 남쪽 통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오스만은 1915년 1월 이집트의 수에즈(Suez)에서 영국군에게, 아나톨리아 동쪽의 사리카미쉬(Sarikamish)에서 러시아군에게 패했다. 독일은 어렵게 참전시킨 오스만을 조속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리카미쉬에서 오스만군을 격퇴한 러시아군의 활약상을 묘사한 선전화

하지만 중간에 마치 알박기를 한 것처럼 세르비아가 자리 잡고 있어서 베를린에서 이스탄불을 연결하는 철로가 단절되어 있었다. 우회해서 오스만에 물자와 고문단을 공급하고는 있었지만 좀 더 확실한 통로를 확보해야 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에게 즉시 세르비아를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굴욕을 안겨준 고슴도치를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스트리아도 굴뚝같았지만 당장 갈리치아가 위기여서 대책이 없었다.

러시아는 반대쪽에서 프랑스, 영국과 싸우느라 전력이 분산된 독일에게도 연일 얻어맞으며 굴욕을 겪고 있었지만 바로 아래에 있는 오스트리아는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제1차 대전사를 통틀어 허우대만 큰 약골 이미지가 강했던 러시아군보다 더 형편없는 군대가 바로 오스트리아군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가 계속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고 있었기에 세르비아는 고립된 상황에서도 버틸 수가 있었다.

사실 오스트리아군은 위상과 규모에 비해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이는 약소국 세르비아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항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독일은 신발 속의 작은 돌 같았던 세르비아를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당시 군권을 잡은 참모총장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정치권과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1915년의 전쟁 전략에서 동부전선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요충지인 동프로이센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도 목적이었지만 현재처럼 동부전선의 상당 부분을 맡기기엔 오스트리아가 못 미더웠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의 참전


이에 따라 서부전선은 현 상태로 고착화시켜 영국과 프랑스의 공세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주력의 일부를 동부전선으로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르비아 처단에 투입할 전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온 불가리아에 손을 내밀었다. 흑해의 서쪽에 위치한 불가리아는 제1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지리적으로 연합국과 동맹국 모두를 연결하는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놓이게 되었다.

차르 페르디난드 1세가 영도하는 불가리아는 가담 여부에 따라 동맹국 혹은 연합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일 불가리아가 연합국에 가담하면 세르비아와 러시아를, 반대로 동맹국에 참여하면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을 연결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양측이 서로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불가리아인은 투르크계의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혼혈로 여겨질 만큼 중간자적 위치였지만, 오랜 지배자였던 오스만과는 적대적인 반면에 주민 대부분이 정교를 믿어 문화적으로는 러시아와 가까웠다.

하지만 1913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의 여타 남슬라브족들과 사이가 나빴는데, 특히 세르비아는 지난 30년 동안 2번이나 전쟁을 벌인 상대였다. 국왕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 of Bulgaria)는 영국의 왕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Sachsen-Coburg und Gotha)가의 방계 출신이지만 빈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오스트리아와 각별한 인연이기도 했다. 이런 여러 배경 때문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리아는 고민 끝에 동맹국에 가담하기로 했다. 이로써 동유럽을 가로질러 독일에서 오스만에 이르는 동맹국 벨트가 형성되었다.

그러던 1915년 중반 들어 동맹국이 갈리폴리(Galipoli)와 고를리체(Gorlice)에서 대승을 거둘 것이 확실해진 데다, 독일이 마케도니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언질을 주자 불가리아는 9월 23일 4번째 동맹국으로 전격 가담했다. 이제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오스만이 하나의 벨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이것은 지금까지 놀랍도록 끈질기게 버텨온 세르비아에게 재앙의 전주곡이 되었다.


풍전등화의 세르비아


그동안 세르비아의 후방이었던 동쪽 국경이 위험해진 것이었다. 루마니아는 여전히 중립이었고 남쪽의 그리스는 참전 여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어 어정쩡한 입장이었다. 서남부에 위치한 알바니아는 건국 당시 오스트리아로부터 지원을 받은 데다가 세르비아와는 종교적으로 갈등 관계였다. 그 위에 한배를 탄 몬테네그로가 있었지만 워낙 약소국이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군이 워낙 무능했고 러시아가 동부전선 동맹국 전력의 대부분을 잡아 놓고 있었지만, 끈질긴 저항이 세르비아가 국권을 유지하도록 만든 첫 번째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약 18만의 전력이 손실된 반면 보충된 자원은 3만에 불과해, 전쟁 발발 1년이 지난 1915년 9월이 되었을 때 세르비아군 전력은 개전 당시의 2/3에 불과한 30만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독일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난 4월에 독일 제11군을 이끌고 동부전선의 요충지 고를리체를 함락시킨 마켄젠(August von Mackensen)이 세르비아 점령의 중책을 지고 9월 말 새롭게 창설된 마켄젠 집단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그는 말굽 모양으로 형성된 전선 서쪽에서 오스트리아 제3군이, 북쪽에서는 독일 제11군이, 북동쪽에서 불가리아 제1군이, 남동쪽에서 불가리아 제2군이 동시에 진격해 일거에 세르비아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1915년 11월 16일 점령지인 세르비아에서 회합을 가진 독일군과 불가리아군 지휘관들 - 우측이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 좌측이 이번 공세를 주도한 마켄젠.

세르비아가 사방에서 동시에 진격해 들어올 60여만의 동맹군을 막기는 물리적으로 곤란했다. 러시아는 바로 직전에 독일에게 호되게 당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던 중이어서 세르비아에 가해지는 압력을 덜어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가 2개 사단을 10월 5일 살로니카(Salonika)에 상륙시켰으나 그리스의 협조를 받지 못해 무단으로 점거한 상태가 되어 버려 적시 투입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