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과도 같은 나치 시대와의 단절을 위해 현재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육군, 해군과 달리 여전히 루프트바페(Luftwaffe)가 정식 명칭인 독일 공군은 제2차 대전 당시에 상당한 활약을 펼친 무력 집단이었다. 전략 폭격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부족해 낭패를 보기도 했고 전쟁 말기 들어 연합국의 물량 공세에 밀려 제대로 역할을 못했지만, 전쟁사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전쟁 초기에 집단화된 기갑부대와 함께 독일군의 전격전(Blitzkrieg)을 이끈 주역이 되면서 새로운 전쟁 방식을 선도했다. 전략, 전술이 탁월한 측면도 있었지만 사실 훌륭한 작전기를 개발하고 보유했기에 이런 업적이 가능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좋은 작전기의 보유 여부가 전력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만큼 공군은 질적인 우세가 중요하다.

그래서 독일 공군 하면 Bf 109, Fw 190 같은 인상적인 전투기와 Ju 87, Ju 88, He 111 같은 폭격기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더불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시대를 선도한 Me 163, Me 262 같은 실험작들도 무기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동시대의 경쟁국들도 이에 맞설 수 있는, 혹은 더욱 뛰어난 군용기를 생산했기에 최고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여러 기종들은 지금도 마니아나 모델러에게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반면 이들만큼 전선에서 맹활약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군용기가 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전투기, 폭격기처럼 인상적인 활약상을 보이기 어려운 수송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수송기는 제2차 대전 관련 에피소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숨은 주인공이었다. 바로 Ju 5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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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장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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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인류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역사가 제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KLM이 설립되면서 자유롭게 하늘길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여객과 화물의 항공 운송이 좋은 사업 아이템임이 입증되면서 우후죽순처럼 많은 항공사들이 탄생했다. 당연히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항공기 제작사들에게도 사업을 확장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1895년 설립된 융커스(Junkers)는 제1차 대전 당시인 1916년 최초의 전 금속제(全金屬制) 비행기인 J 1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투기를 개발해 전선에 공급한 항공기 제작사였다. 전후에는 실험적인 항공기를 꾸준히 개발하면서 기술력을 축적해오다가 1924년 10인승의 G 24 여객기 개발을 필두로 민항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군용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Ju 52도 처음에는 민간 시장을 목표로 1930년 개발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이었고 베르사유 조약이 힘을 발휘하던 시절이라 융커스가 군용 항공기 개발에 신경을 쓸 일은 없었다. Ju 52는 민수용이어서 처음부터 신뢰성, 안정성, 경제성 등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처음에 목표로 했던, 약 15명 내외의 여객이나 2톤 정도의 화물을 싣고 시속 150km의 속도로 800km 정도의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은 사실 그다지 특이하거나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개발팀을 이끈 진델(Ernst Zindel)은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기 위해, 자사가 1927년부터 생산해 재미를 보았던 W 33 수송기를 기반으로 개발에 착수했다. W 33은 제2차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았던 Ju 87 급강하 폭격기를 만든 폴먼(Hermann Pohlmann)의 작품으로, 단발에 저익이었고 짧은 거리에서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보조익이 분리된 2중 날개 구조를 갖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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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과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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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33은 철골 구조에 기체 전체를 금속 외피로 둘러 든든한 내구성을 자랑했는데,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특징은 마치 골판지 같은 듀랄루민 재질의 주름진 외피였다. 어쩌면 융커스 기체의 특징과도 같은 이런 구조는 중량을 늘리지 않고 강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공기 저항이 늘어나 속도를 높이는 데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애초에 개발에 착수했을 때부터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Ju 52는 전반적으로 W 33을 확대시킨 형태여서 BMW VII 엔진을 기체 전방에 부착한 단발 시제기의 개발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1930년 10월 13일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완성도가 높아 당국의 형식 승인도 곧바로 이루어져 이듬해 곧바로 판촉에 들어갔다. 하지만 힘이 약하다는 평가와 함께 내심 기대했던 루프트한자(Lufthansa)의 외면을 받은 후 연이어 수주에 실패했고 이는 융커스에 심각한 경영 압박으로 돌아왔다.

이에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한 진델은 1932년 강력한 미국의 프랫 앤 휘트니(Pratt & Whitney) R-1340 엔진을 기수와 주익 양측에 부착한 삼발식으로 기체를 개량했다. 힘이 좋아진 만큼 승객과 화물 탑재량이 늘어났고 비행 성능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곧바로 주목을 끌어 소량이지만 볼리비아 민항사를 필두로 대외 판매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루프트한자도 구매에 들어갔다.

이 모델은 이전의 단발식 기종과 구분해 Ju 52/3m으로 명명되는데, 이후의 Ju 52는 이를 기반으로 파생된 기종들이다. 융커스는 민항사의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곧바로 개량형을 출시하는 기민함을 보였고 덕분에 1935년이 되었을 때 유럽, 남미는 물론 중국에서도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Ju 52의 진정한 명성은 군용으로 사용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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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로도 사용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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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히틀러는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다. 하지만 지난 16년간 많은 제약을 받아왔던 관계로 전력을 증강시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바로 이때 Ju 52가 새롭게 창설된 루프트바페의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수송기였고 구조가 튼튼해 Ju 52를 군용으로 전용하는 데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1932년 콜롬비아와 페루의 국경 분쟁 당시 이미 콜롬비아군이 병력과 군수품 수송에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독일 공군은 Ju 52를 수송기 외에도 폭격기로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융커스를 비롯한 여러 제작사가 이미 폭격기 개발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당장 전력의 공백을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제2차 대전 초기에 활약한 독일 공군의 Do 17, Ju 86, He 111 같은 폭격기들도 민항기를 기반으로 탄생한 것이니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기체 하부에 폭탄창을 설치하면 1.5톤 정도의 폭장이 가능했다.

이렇게 임시변통으로 450여 기의 Ju 52가 폭격기로 개조되었고 1936년 스페인 내전에 투입되어 실제로 폭탄을 투하했는데, 피카소의 역작으로 유명한 <게르니카>도 바로 Ju 52에 의한 비극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속도가 느려 적진 한가운데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폭격기로는 부적합하다고 판명되었고, 폭격기 전력이 새롭게 구축되면서 1937년부터 수송기로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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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에서의 눈부신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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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 52의 진정한 전설은 애초의 개발 목적대로 수송기로 사용되면서부터 쓰여졌다. 1939년 제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Ju 52는 든든한 기체와 짧은 이착륙 거리 덕분에 필요한 물자를 최전선까지 적시에 공급해 주는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송기가 병력이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전쟁사에 기록된 그들의 활약상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비무장이고 속도가 느린 수송기는 비행 안전지역 내에서 운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Ju 52는 독일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적기와 대공포가 난무하는 위험지역의 임무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던 전선의 마당쇠였다. 총 4,800여 기가 생산되어 독일이 싸웠던 모든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거대하고 치열했던 독소전쟁에서는 그야말로 신화를 써 내려갔다.

농성전의 진수를 보여준 데미얀스크 전투, 르제프 전투 당시에 쉴 새 없이 보급품과 병력을 실어 날랐다. 비록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고립된 제6군이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항전을 펼칠 수 있게 만든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또한 공수부대의 든든한 날개가 되어 주기도 했다. 목적을 달성했지만 내용상으로는 참사에 가까웠던 크레타 공수작전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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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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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처음 언급처럼 수송기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더불어 Ju 52의 경우는 못생긴 외관도 무관심을 조장하는 데 한몫을 했다. 멋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라 개개인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Ju 52는 매력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물론 무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성능이지만 첫인상이 관심을 끌기는커녕 뭔가 부족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주둥아리가 뭉뚝하게 잘린 것 같은 기수도 그렇지만 외피의 주름도 마치 양철판을 대충 얼기설기 붙여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 든든함과 충실함에 매료된 전선의 병사들은 ‘유 아줌마(Tante Ju)’, 혹은 ‘강철의 애니(Iron Annie)’라고 부르며 신뢰를 보냈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생산했고 전쟁 당시 활약한 대부분의 군용기들이 박물관행이 된 지금도 일부가 현역으로 사용될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인상적이고 멋진 군용기를 많이 만든 독일의 경우는 Ju 52 같은 수송기가 당대를 상징하는 기종으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회의 근간을 책임지고 묵묵히 이끌어가는 이들은 정작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다수인 것처럼, 거대한 전쟁 당시 소리 소문 없이 제 역할을 다한 마당쇠였던 Ju 52가 어쩌면 무기사에서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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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Ju 52/3m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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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 18.90m / 전폭 : 29.25m / 전고 : 6.10m / 최대이륙중량 : 9.210kg / 최고속도 : 시속 271km / 전투항속거리 : 950km / 상승한도 : 5,2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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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