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5.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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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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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군의 슈코다 305mm 곡사포 - 불과 4문만 세르비아 전역에 투입되었을 만큼 중화기가 부족했다.

오스트리아의 준비


오스트리아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동원령이 발령될 경우 16만이었던 병력을 최대 330만까지 증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력의 쇠퇴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인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절감해 왔기에 단지 병력만 늘린다고 전력이 대폭 증가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의 국방비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25퍼센트 수준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질적 수준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부대를 사열하는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불과 10년 전 러일전쟁에서 망신을 당하고 덩치만 큰 약체라고 조롱받던 러시아조차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볼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도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러시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천명했을 때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와의 전면전도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강을 자부하는 독일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개시 직전에 일단 애초에 계획했던 병력의 60퍼센트 수준인 200만을 서둘러 편성할 수 있었다. 참모총장 회첸도르프(Franz Conrad von Hötzendorf)는 세르비아 침공에 50만, 북동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100만, 그리고 중앙에 예비대로 50만을 할당했다. 우선 목표인 세르비아에 집중하지 못한 모양새 같았지만, 50만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오히려 작전의 성패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얼마나 막을 수 있냐에 달려 있다고 낙관했다.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프라하에 집결한 오스트리아군 - 현재의 체코인 보헤미아 일대에서 징집된 병력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이처럼 병력의 상당수가 제국 내 소수 민족 출신이어서 지휘 및 통솔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15개 언어로 공표된 포고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병력의 60퍼센트 정도가 슬라브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이 세르비아나 러시아와 싸울 때 얼마나 충성심을 발휘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실제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의 병력인데, 이들도 평소에 제국의 지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자치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서 전투력이 미지수였다.


세르비아의 대응


사라예보 사건 이후 대응책을 놓고 갈팡질팡하던 세르비아는 러시아를 믿고 전쟁을 결심했으나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한 7월 25일에서야 동원령을 하달했고 전쟁 발발 후 열흘이 지난 8월 9일에 이르러 겨우 배치를 완료할 수 있었다. 위기가 눈앞에 닥쳤는데도 한 달 동안 눈치만 보다 전쟁에 뛰어들 정도로 안이했던 세르비아의 모습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전쟁을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전선으로 이동 준비 중인 세르비아군 포병 - 중포는 얼마 없었고 이런 작은 견인포들이 화력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초반에 승기를 잡기 위해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25년 후의 제2차 대전과 달리 이때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관습이 남아 있어 선전포고 같은 요식 행위를 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르비아를 돕겠다는 러시아도 그때서야 동원령을 하달할 정도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어이없는 모습으로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당시 세르비아의 인구는 300만으로, 오스트리아가 최종적으로 편성을 예정한 병력 330만보다도 적었다. 그런 인적 자원에서 동원령을 통해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이 45만이었고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추가로 충원할 수 있는 병력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기초적인 무기인 소총의 보유량마저 18만 정에 불과해 병력의 절반 정도만 겨우 무장시킨 열악한 현실이었다.

1914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지도 - 오스트리아는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할 수 있었고 세르비아는 전략적으로 남쪽으로만 후퇴가 가능했다.

소총이 이 정도니 여타 장비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편성된 3개 군 중 2개 군은 무기와 군복은 고사하고 그냥 밭을 갈다가 전선에 끌려온 농민군 수준이었다. 북쪽에서 서쪽으로 550km가 넘는 Γ자 형태의 국경선을 이런 전력으로 방어하기란 불가능했다. 세르비아군 참모총장 푸트니크(Radomir Putnik)는 고심 끝에 주력을 베오그라드 남쪽 수마디야(Šumadija) 일대에 배치해 놓고 있다가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난 곳으로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포성과 함께 시작된 전쟁


7월 28일, 오스트리아군이 발사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도심에 떨어지면서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오그라드는 현재 세르비아 영토의 중앙에 위치해 있지만 당시에는 보이보디나(Vojvodina)1)가 오스트리아 영토여서 국경선에 접한 외곽 도시였다. 따라서 이곳이 제일 먼저 타격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은 도심을 날려버리는 대대적인 화력 투사와는 거리가 먼 수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원령이 하달되기 직전의 상비군이 불과 16만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보유 장비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전역만 놓고 보았을 때 오스트리아는 구경 120mm가 넘는 중포(重砲)를 오늘날 1개 포병연대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40여문만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군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오스트리아군은 허우대만 큰 약골이었다.

그런데 8월 5일, 세르비아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형제국이라 할 수 있는 몬테네그로 왕국(이하 몬테네그로)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세르비아 편에 선 것이었다. 하지만 인구 30만에 불과한 몬테네그로가 참전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다음 날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뉴스였다. 덕분에 만에 하나 러시아가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사라져 버렸다.

동원되어 전선으로 향하기 전 가족들과 면담하는 몬테네그로 병사들 - 그다지 의미 있는 전력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잘 싸운 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먼저 전쟁을 개시했으면서도 사바(Sava) 강과 드리나(Drina) 강을 넘어 세르비아 영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계속 국경 밖에서 맴돌아야 했다. 참모총장 회첸도르프는 50만의 발칸군(Balkan Army)으로 공격을 개시한 후 곧바로 50만의 예비대를 후속 투입해 속전속결로 세르비아를 석권하려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북쪽의 갈리치아(Galicia)로 러시아군의 이동이 포착되자 예비대를 이곳으로 보내야 했다.


허점을 찌른 오스트리아


8월 10일경, 무려 120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군이 국경에 모습을 드러내자 오스트리아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이는 뒤를 봐주기로 한 독일도 당황한 부분이었다. 독일은 러시아군이 전선에 투입되는 데 한 달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해 동부전선은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혼자 세르비아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를 먼저 쳐서 서부전선을 안정화할 계획이었다.

군대를 사열하는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 - 예상보다 빠른 러시아군의 동원은 제1차 대전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처럼 예상을 벗어난 러시아군의 빠른 등장은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연합국이 제1차 대전에서 승리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매섭게 프랑스로 쇄도하던 독일의 발목을 잡아 전쟁이 장기화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은 양면 전쟁의 늪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또한 미시적으로는 세르비아라는 다윗이 오스트리아라는 골리앗에 맞설 수 있게 만든 결정타이기도 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러시아군이 세르비아 영내로 진입해 함께 싸워주는 것은 아니기에 직접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2년 후인 1916년에 루마니아가 연합군에 가담하게 되지만 당시까지는 중립국이어서 러시아가 루마니아를 거치지 않고 세르비아로 군대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세르비아를 지원하기로 천명한 러시아는 떨어져서 독일, 오스트리아와 별도로 전선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북쪽에서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압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러시아의 행동에 놀란 오스트리아는 국경 근처만 맴돌다가 무려 보름이 지난 8월 12일이 되어서야 강을 건너 세르비아 영내로 진입했다. 바로 직전까지 보스니아 총독이었던 발칸군 사령관 포티오렉(Oskar Potiorek)은 보이보디나에 배치된 제2군이 북쪽에서 세르비아군을 견제하는 동안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시르미아(Syrmia)에 전개한 제5군이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공격을 개시하는 성동격서식 작전을 수립했다.


각주

1) 유고슬라비아 북부 세르비아 공화국 북부의 자치주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