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5.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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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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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으로 향하는 세르비아군의 행진 모습 - 동원령이 하달되면서 당시 300만 인구의 10퍼센트가 훨씬 넘는 40만의 병력이 소집되었다.

남슬라브의 우두머리 세르비아


인구 300만의 소국인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의 여러 남(南)슬라브 민족들 중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랜 세월 이어진 외세에 대한 투쟁 경력과 최초로 남슬라브 왕국을 세웠다는 자긍심 때문이었다. 또한 오스만과 오스트리아의 오랜 지배로 인해 이슬람과 가톨릭을 믿는 이들이 많은 문화의 교차로에서 그리스 정교의 일파인 세르비아 정교를 받들어 비잔틴 제국(이하 비잔틴)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9세기 중반의 발칸 반도 - 세르비아인들의 주 활동 영역이 오늘날의 세르비아보다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쪽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현재도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 일대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슬라브족의 일파인 세르비아인들이 발칸 반도에 등장한 시기가 대략 6세기 중반이다. 앞서 유럽으로 이동했던 게르만족처럼 이들도 처음에는 약탈을 일삼아 선주민들에게 상당히 골칫거리인 존재였다. 이후 현재의 세르비아 일대에 정착한 이들은 비잔틴을 비롯한 주변 세력에 눌려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8세기 말 비체슬라브(Višeslav)의 주도로 블라스티미로비치(Vlastimirović) 왕국을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최초의 세르비아 왕국이자 최초의 남슬라브인 왕국으로 이때 차지한 강역은 현재의 세르비아 외에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킨 배후 세력이었던 ‘검은 손’을 비롯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뿐 아니라, 20세기 말에 내전과 인종 청소라는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던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도 차지하려 했던 영역이다.

대세르비아 건설을 주장하며 극악한 학살극도 서슴지 않았던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대통령 -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는 인류사의 범죄자다.

그러나 블라스티미로비치 왕국도 얼마 못가 멸망하고 이후 여러 왕국들이 독립과 멸망을 반복하다 14세기 중반에 잠시 황금기를 맞이했다. 1331년 부왕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네만리치(Nemanjić) 왕조의 제10대 군주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Stefan Dušan)이 다뉴브 강에서 그리스까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차르에 올라 발칸 반도의 터줏대감인 비잔틴과 팽팽히 맞서기도 했다.


독립에 대한 의지


하지만 세르비아 역사의 최전성기였던 이때의 영광도 황제의 급서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이후 세르비아는 북쪽에 있던 헝가리의 간섭과 박해를 받다가, 비잔틴을 멸망시키고 동유럽으로 매섭게 북상하던 오스만에게 1459년 완전히 멸망당했다. 이후 400년간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였는데 보스니아, 코소보, 알바니아 일대에 거주하던 슬라브인들과 달리 개종하지 않고 끝까지 정교를 지켰다.

1806년 오스만을 상대로 벌인 독립 전쟁 당시의 미사르 전투를 묘사한 그림 - 이처럼 끊임없는 투쟁 덕분에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 내 남슬라브인들의 맹주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같은 슬라브인이지만 종교 문제로 주변과 사이가 좋지 않아 수시로 충돌이 벌어졌고 그러한 여파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세르비아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고 수많은 탄압에도 독립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1817년에는 자치권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바로 이때 슬라브의 맹주를 자임한 러시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는 18세기 말부터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발판으로 서서히 강대국의 위상을 드높이며 팽창을 시도했는데 그중에는 슬라브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발칸 반도도 있었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세르비아의 후견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1877년 러시아와 오스만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세르비아는 러시아 편에 붙어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1848년 열린 자치 의회의 개회식을 묘사한 그림 - 세르비아인들은 자치권에 만족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해 마침내 1882년 독립 왕국을 건국했다.

1882년 오브레노비치(Obrenović)가의 밀란 1세(Milan I of Serbia)를 군주로 하여 마침내 세르비아 왕국이 탄생했다. 티토(Josip Tito)가 통치한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 약간 소원하기도 했지만 이런 민족적, 역사적 관계 때문에 지금까지도 러시아(소련)는 세르비아의 가장 중요한 맹방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왕국을 세운 세르비아인들은 이를 반쪽짜리 독립이라 생각했다.


거대 국가 건설의 야심


세르비아는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곳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보스니아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곳은 1878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으로부터 권리를 넘겨받은 곳이어서 쉽게 넘볼 수는 없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오스만과 앙숙이었기에 세르비아의 독립에도 나름대로 도움을 준 외세였다. 이후 친위 쿠데타로 전제 왕권 체제를 구축한 알렉산다르 1세(Aleksandar Obrenović, 1876~1903)같은 경우는 친오스트리아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친오스트리아 행보를 보인 세르비아 제2대 국왕 알렉산다르 1세 - 이후 사라예보 사건의 배후가 되기도 한 '검은 손'에 암살되었다.

당시 보스니아의 총인구 250만 중 110만이 세르비아계로, 독립국인 세르비아의 인구가 300만(이중 세르비아인 250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세르비아계의 거주 지역도 보스니아의 40퍼센트 가까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 막 독립 국가를 세워 어수선한 상황임에도 과거의 영광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반면 보스니아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를 받아오다 보니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중 일부는 대국의 일원으로 계속 함께하기를 바라며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오래전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오스트리아의 국교인 가톨릭을 믿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반면 세르비아와의 통합에 적극적인 이들도 있었고 일부는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비밀 결사인 ‘검은 손’의 초기 모습 - 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국왕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과격했고 결국 세르비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이끌고 들어갔다. <출처: (cc) Unknown photographer, 1910s at Wikimedia.org>

이들에게 모국이라 할 수 있는 세르비아는 가장 큰 지원 세력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눈치를 보느라 여러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지원이 이루어졌는데 그중에는 인기가 없는 알렉산다르 1세를 1903년에 암살하고 정권을 교체할 정도로 과격했던 ‘검은 손’같은 결사체의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과격 단체의 이러한 과도한 개입은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이들은 이후 전쟁을 불러온 죄목으로 세르비아 내부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전쟁으로 가는 길


세르비아는 심정적으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통합을 원했지만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결코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이처럼 보스니아를 놓고 소원해진 두 나라의 관계는 1908년 오스트리아가 점령지였던 보스니아를 전격 합병하자 적대적으로 변했다. 세르비아가 소국이었음에도 이처럼 정책을 강경하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노골적으로 후원에 나선 러시아의 존재 때문이었다.

행차 중인 페타르 1세 -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자신을 옹립한 민족주의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한계가 있었고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저항을 이끌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자칫 세르비아가 아닌 러시아와의 충돌도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교차되는 보스니아는 그야말로 가장 위험한 화약고로 변했다.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이후 새로운 국왕에 옹립된 페타르 1세(Petar Karađorđević)는 이런 긴장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를 국왕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검은 손’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들로부터 방해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에도 이러한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려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비운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였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시녀 출신의 조피(Sophie)와 결혼했을 만큼 개방적이었던 그는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모든 민족들에게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제국을 연방 국가화하려는 혁명적인 시도를 구상했다. 그는 추후 황제 등극 시를 대비한 예비 내각 후보 상당수를 슬라브인으로 예정했을 만큼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행보는 오스트리아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이 독립의 주역이 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오히려 위기로 다가왔다. 마침내 역사를 격랑 속으로 몰고 갈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고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러시아가 도와주기로 했어도 당장 싸울 준비는 세르비아 스스로 해야 했다. 동원령이 하달되었고 전 국민의 10퍼센트가 넘는 40만의 병력이 소집되어 전선으로 달려갔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