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5.1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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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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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령에 따라 징집된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이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


현재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고 평화로운 영세중립국 정도의 이미지를 가진 나라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인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더불어 5대 강국의 위용을 뽐내며 중동부 유럽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도 국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만큼 과거의 영화는 훨씬 더 찬란했다.

정복보다 주로 혼인을 통해 영역을 넓혔지만 16세기 카를 5세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 지역은 물론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까지 통치했다.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이 통치한 오스트리아는 주변은 물론 한때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까지도 지배했다. 더불어 무려 350여 년간 게르만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세습하고 있어 유럽 가톨릭 세계의 유일한 황제국이기도 했다. 또한 발칸 반도를 석권하고 동유럽과 지중해를 통해 매섭게 세를 확산하던 오스만의 서진을 막아낸 유럽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였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 시대에 해체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지만 1814년 빈 회의에서 세계 체제의 재정립을 주도하면서 다시 강대국의 위상을 회복했다. 그랬던 오스트리아의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 통일과 관련이 많다. 게르만의 구심점으로서 무려 900여 년을 존속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수많은 군소 왕국과 제후국들, 그리고 여타 이민족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한 명목상의 제국이었다.

붉은색 실선으로 표시된 옛 신성로마제국 강역 내에 살던 게르만족의 통일을 놓고 청색의 프로이센과 황색의 오스트리아가 대립했다. <출처: (cc) User:52 Pickup at Wikimedia.org>

황제국인 오스트리아는 예전 같은 모습으로 계속 게르만의 큰 어른 노릇을 하는 것에 만족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부에서 국력을 키운 프로이센은 프랑스, 영국과 맞먹는 강력한 근대 통일 국가의 건설을 원했다. 결국 누가 게르만의 맹주가 될 것인지가 화두가 되자 오스트리아는 주변 이민족까지 아우르는 느슨한 형태의 대(大)독일주의를, 프로이센은 독일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게르만족 위주의 통합인 소(小)독일주의를 내세웠다.



저무는 제국


영국, 프랑스 같은 주변 열강들이 신대륙, 아시아, 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목도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이러한 대외 팽창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일이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주장하는 소독일주의를 무턱대고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민족이 전 국민의 6할 가까이 되는 오스트리아의 현실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1862년 당시의 비스마르크 여타 열강과 맞서려면 더 이상 통일을 늦출 수 없다고 보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겉으로는 공고해 보였지만 오스트리아는 마치 중세의 봉건 체제처럼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는 여러 민족들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통일을 위해 이민족들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제국을 해체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자신을 빼놓고 프로이센이 통일의 주체가 되는 것을 허락할 수도 없었다. 지난 수백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게르만의 맹주는 여전히 오스트리아가 되어야 했다.

결국 통일의 방법론을 놓고 양국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충돌은 불가피했다. 전쟁 개시의 명분을 찾던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1864년 덴마크를 함께 공격해 차지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권리를 전격적으로 거부하는 미끼를 던져 오스트리아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1866년 6월 17일,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전쟁이 바로 보오전쟁(普墺戰爭)이다.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참관 중인 국왕 빌헬름 1세를 비롯한 프로이센 지휘부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전쟁 선언은 오스트리아가 먼저 했지만 정작 싸울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던 것은 프로이센이었다. 결국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궤멸되었고 8월 23일 프로이센의 승리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가 그동안 아래로 보았던 프로이센에게 참패를 당한 이 전쟁의 여파는 실로 컸다. 오스트리아가 지배해 온 여러 이민족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


통일의 주역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조차 사라질 위기가 닥치자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구성원 중 두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헝가리에게 제국의 공동 운영을 제안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지난 1699년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헝가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때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헝가리는 1848년 독립을 위해 봉기를 일으켰을 만큼 자존심이 강한 요주의 대상이었다.

1849년 빌라고스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하는 헝가리군. 30년 후에 대타협을 이루며 같은 배를 타게 되지만 독립을 위해 무장 봉기를 했을 만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랬던 헝가리에게 독립국과 맞먹는 완전한 자치권을 주는 대신 외교, 군사 분야는 공동으로 처리하자는 파격적인 제의를 한 것이다. 헝가리 입장에서는 여타 민족들과 달리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우월적 지위를 받게 된다는 점이, 오스트리아로서는 두 번째 민족의 협력을 받아 제국의 안정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지면서 1867년 동군연합(同君聯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했다.

이를 오스트리아, 헝가리 역사에서는 ‘대타협(Ausgleich)’이라 한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체제를 정비한 오스트리아는 남부 독일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향력 확대를 인정하고 관계 개선에 나섰다. 결국 1879년에 이르러 신생 독일제국과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고 이를 발판으로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로의 영향력 확장에 들어갔다. 해군이 약한 내륙국이다 보니 여타 열강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고육책이었다.

1867년 6월 8일 열렬한 환영 속에 헝가리의 수도 부다를 방문해 헝가리의 왕과 왕비로 추대 받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 황제 부부. 이로써 두 나라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한배를 탔다 해도 제국 인구의 4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고 보헤미아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다. 하지만 헝가리가 순순히 한배를 탔던 것처럼 제국 내의 황실에 대한 충성심은 대체로 높았던 편이다. 600여 년 이상 통치했기에 익숙하기도 했고 오스만과 러시아에 대한 반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15개 언어로 작성된 포고문


이처럼 오스트리아는 많은 수를 차지하는 소수 민족들이 종교적, 감정적 이유로 서로 대립이 심해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현실을 적절히 이용하고,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서 2중 제국을 수립한 후 그럭저럭 꾸준히 국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수 민족들에 대한 러시아, 오스만, 이탈리아 등은 주변 세력의 간섭과 참견 때문에 불안한 기운도 함께 상존하고 있었다.

민족, 언어권별로 자치국을 세우고 오스트리아를 연방 국가로 만들려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구상안. 현재 대부분이 독립국으로 존재하고 있을 만큼 앞선 생각이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크게 대두되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어려운 여건에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고민에 빠뜨렸다. 오랜 세월 맹목적으로 합스부르크가에 충성하고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이들이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0세기 초에 바로 옆에서 벌어진 제1, 2차 발칸 전쟁으로 여러 약소민족들이 차례차례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목도하면서 동요는 더욱 커졌다.

암살당하긴 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제국을 민족, 언어권으로 나누어 자치권을 부여하고 일종의 연방국가로 만들려는 혁신적인 해결책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소수 민족들의 새로운 지배자 행세를 하며 오스트리아보다 더 탄압하던 헝가리가 이런 개방적 구상에 반대했을 정도였다. 결국 외적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고 내적으로 헝가리와 2중 제국을 구성했어도 제국의 불안정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사라예보 사건과 오스트리아의 개전 선언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보다 옆에서 계속 민족주의를 부추기며 들쑤시고 있던 세르비아가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본 오스트리아는 무려 15개 언어로 작성된 동원령을 5,200만 제국의 신민(臣民)들에게 하달했다. 그렇게 저물어 가던 노쇠한 제국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후통첩을 거부한 세르비아의 징벌에 나섰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