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5.0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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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잊혀진 조연들의 전쟁

세르비아 전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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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는 순간을 묘사한 당시 이탈리아 신문의 삽화. 인류사의 비극을 잉태한 총성이기도 했다.


사라예보의 총소리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의 독립을 주장하는 비밀 결사체 ‘젊은 보스니아’의 대원 프린치프(Gavrilo Princip)의 총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바로 제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사건의 배후로 세르비아 왕국(이하 세르비아)을 지목했다. 보스니아는 지난 400년간의 지배자였던 오스만 제국(이하 오스만)이 물러난 1878년 이후 오스트리아가 새로운 주인 행세를 하는 지역이었다. 민족의 모자이크라는 별명이 붙은 발칸 반도 내에서도 종교적, 민족적으로 상이한 이들이 가장 빽빽하게 모여 살고 있어 반목이 유독 심한 곳이었다. 그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는 갈등의 중심이었다.

그 이유는 보스니아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르비아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들은 대(大)세르비아 건설을 주장하며 음으로 양으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통합을 시도했다. 이를 주도한 세력 중에는 1911년 결성된 ‘검은 손’ 같은 결사체도 있었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가 의심했던 대로 ‘젊은 보스니아’를 지원하며 사라예보 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처럼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오스트리아를 자극한 눈엣가시였다.

1914년 12월 5일 재판 중인 프린치프(가운데)를 비롯해 사건을 주도한 ‘젊은 보스니아’ 대원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하지 않았으나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발칸의 새로운 실력자 행세를 하는 세르비아의 국력은 당대 유럽의 5대 강국인 오스트리아와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노골적으로 적대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 있는 러시아 때문이었다. 슬라브인들의 맹주를 자처하는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며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러시아가 후견인을 자처하는 상황이라도 이번 사건의 파장은 너무 컸다.



판을 키운 전쟁


오스트리아가 책임을 묻자 세르비아 정부는 사적 조직의 관여 가능성을 제기하며 사건과 무관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격노한 친오스트리아 보스니아인들이 세르비아계에 대해 벌이는 테러 행위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만큼 전전긍긍했다. 이번 기회에 저항 세력을 완전히 격멸하고자 결심한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10가지 요구사항을 전하고 만일 세르비아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친오스트리아 보스니아인들이 사라예보 시내에서 벌인 세르비아계에 대한 테러의 현장. 사건의 배후로 세르비아 왕국이 공공연히 거론될 만큼 분위기가 나빴다.

세르비아는 ‘반오스트리아 단체의 즉시 해산’을 포함한 9개 사항은 수락했으나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와서 사건을 직접 조사하겠다는 요구는 내정 간섭이라며 거부했다. 오스트리아는 도발의 명분을 잡았고 전쟁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인류사에서 흔히 봐왔던 수많은 전쟁들의 발발 양상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고 나름대로 개전의 이유도 충분했다.

예고대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침공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다. 백주대낮에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백 년간 유럽의 강대국을 자부해 온 오스트리아의 대응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오스트리아나 세르비아는 물론 이 과정을 지켜보던 주변국들도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세계대전이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었다.

오스트리아의 전쟁 개시를 보도한 워싱턴타임스의 1914년 7월 28일자 기사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날,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러시아가 동원령을 하달했다. 이것을 러시아의 참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국지전이 될 수도 있었던 전쟁의 판을 키운 불쏘시개가 되었다. 7월 31일,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독일이 러시아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나섰고 한술 더 떠 다음 날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8월 3일에는 러시아와 한배를 탄 프랑스에게도 선전포고를 하고 침공을 개시했다.



아직도 논쟁 중인 주제


전쟁 개시 전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삼국동맹(Dreibund)’과 ‘삼국협상(Triple Entente)’으로 편을 나누어서 팽팽히 대립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런 외교적 약속이 반드시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열흘 만에 당대의 강대국들인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편을 갈라서 처절하게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미국과 일본처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대륙의 나라들까지도 전쟁에 뛰어들었다.

연합국의 단결을 선전하기 위한 미국의 출판물. 이처럼 유럽 이외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도 참전을 했다.

물론 이전에도 제1, 2차 발칸 전쟁, 제1, 2차 모로코 사건처럼 충돌이 벌어질 뻔한 위기는 있었다. 당시에도 강대국 간의 전면전이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을 보았으나 적대 관계가 근본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은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들에게 찾아온 호기였는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미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국지전으로 끝날 전쟁이 어떻게 장장 4년 동안 최소한 1,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거대한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하지만 당시 참전을 선언한 나라치고 국민들이 환호를 보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상대를 증오하고 전쟁을 반기는 분위기였다는 점은 많은 추론을 가능하게 해준다. 어쩌면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었어도 세계대전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버킹엄 궁 앞에 모여 조지 5세의 개전 선언에 환호하는 영국 국민들. 전쟁을 반기는 미친 시대상이 당대를 지배했고 이는 국지전이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많은 자료에서 사라예보 사건이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도록 만든 첫 번째 원인으로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며 오스트리아의 후견인을 자임한 독일을 지목한다. 여러 이유로 세르비아 침공을 망설이던 오스트리아를 부추긴 정황까지 있을 정도로 독일은 전쟁 개시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다


반면에 러시아의 성급한 동원령이 더 큰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가 강력하게 나갔을 때,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런 행보를 대체로 이해하는 편이었다. 암살자들의 명분이 어떻든 황태자 부부가 저격 당했다는 사실은 유럽 주류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삼국협상의 당사국이던 영국과 프랑스마저 세르비아에게 요구 사항을 가급적 수용하라고 권고했을 정도다.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장례식. 왕족에 대한 직접 테러여서 처음에는 세르비아에게 오스트리아의 압력을 수용하라는 권고가 많았다. <출처: (cc) Unknown photographer, 1910s at Wikimedia.org>

그런데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의 강경파들이 적극 개입을 주장하고 이에 차르 니콜라이 2세(Nicholas II)가 맞장구를 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만일 이때 러시아가 나서지 않았다면 세르비아는 외교적 굴욕을 겪었겠지만, 세계대전은커녕 국지전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자 세르비아의 태도가 바뀌었다. 러시아를 믿고 일전도 불사하겠다며 강경하게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여겼지만 뒤에 있는 독일의 존재는 애써 외면했다. 삼국협상의 일원인 프랑스 때문에 독일이 함부로 움직이기는 힘들다고 본 것인데,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을 작성하던 바로 그때 프랑스 대통령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가 외무장관을 대동하고 러시아를 방문 중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낙관과 달리 독일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전쟁의 판이 커졌다.

격전지 중 하나였던 샤바츠 시내의 파괴된 모습. 그런데 정작 전쟁을 시작한 당사자인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는 제1차 대전의 조연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때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영국이 전쟁의 주역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들이 정면으로 충돌했기에 이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정작 불씨를 제공한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가 벌인 혈전은 곧바로 전쟁사의 뒤편으로 숨어 버렸다. 앞으로 소개할 세르비아 전역(Serbian Campaign)은 대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지만 금방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