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5.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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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국군 기갑의 역사를 열다

M8 정찰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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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박물관에 전시 된 M8 정찰장갑차. 비록 같은 시기에 활약한 여타 기갑 비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년 동안 5,000대 이상 생산되어 전선에 공급되었다. <출처: (cc) Janez Novak, Ljubljana, Slovenija at Wikimedia.org>

오늘날 국군의 기갑전력은 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서 미국 다음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이며 질적으로도 제3세대 전차를 1,000대 이상 보유할 만큼 막강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시되는 이 전력은 창군 이후 끊임없이 닥쳐온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이룬 결과다. 국군 기갑의 시작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이 242대의 T-34 전차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심심찮게 묘사될 정도로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지만, 독립 기갑연대(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라는 부대가 있었다. 하지만 명칭만 그럴 뿐 통상적인 기갑부대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전력이 극히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 부대가 당시 국군의 모든 연대 중 최강의 전력으로 평가받았을 정도로 국군의 전력은 미약했다. 부대 이름에 비록 기갑이 붙긴 했지만 성격이 상이한 장갑대대, 기병대대, 도보대대로 구성된 혼성부대였고 실질적으로 기계화 전투 장비는 장갑대대만 소수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장갑대대도 M2 하프트랙(Half Track)과 지프(Jeep)를 장비한 2, 3중대를 제외하면 1중대만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국군 기갑부대는 독립 기갑연대의 장갑대대 제1중대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제1중대가 보유한 27대의 장갑차는 미군이 제2차 대전 당시 전방 수색에 사용하던 정찰차량이어서 기갑부대의 주력 장비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장갑차들은 북한의 남침이 개시되자 적을 막기 위해 망설임 없이 전선으로 달려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바로 M8 정찰장갑차다.

비록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차륜형 소형 장갑차인 M8은 밀리터리 마니아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출처: (cc) Minnesota Historical Society at Wikimedia.org>




적 전차를 격파하라


1940년 6월, 독일의 완승으로 끝난 프랑스 전역은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사용 방법과 용도를 놓고 말이 많았던 전차는 이제 전선의 주역임이 확실해졌다. 곧이어 벌어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독소전쟁은 더 이상 전차를 빼놓고는 전쟁을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렸다.

아직까지는 전쟁이 남의 이야기였지만 미군 당국도 이런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신예 전차 개발에 나섰지만 당장 성과를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전차 개발과 별도로 적 전차를 요격하는 대전차 공격 수단의 확보도 병행하기로 했다. 미군은 이제 막 양산이 개시된 37mm M3 대전차포(이하 M3)로 당시 독일의 전차를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M3가 보병이 견인하고 다닐 정도이기는 했지만 격렬한 기갑전에서는 아무래도 기동력이 뒤진다는 점이었다.

37mm M3 대전차포를 장착한 M6 구축전투차. 기존의 무기와 차량을 이용해 쉽게 제작했지만 실전에서의 기대 효과가 미흡해 구축장갑차의 제작이 시도되었다.

미군은 M3를 3/4트럭 화물칸에 탑재한 구축전투차(驅逐戰鬪車)의 제작에 착수했다. 단순히 포를 장착하고 사격 시 발생하는 반동을 제어할 수 있도록 약간의 개량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개발은 곧바로 완료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구축전투차는 M6로 명명되어 일선에 공급되었다. 하지만 보호막 없이 단지 포만 탑재한 트럭으로는 격렬한 기갑전을 치르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훈련 결과 기동하며 싸우려면 최소한의 장갑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던 것이다.

이에 1941년 7월, 육군 병기국은 M3을 장착하고 전면 장갑으로 12.7mm기관총탄을, 측면 장갑으로는 소총탄을 막을 수 있는 새로운 구축장갑차(驅逐裝甲車)의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얼마 후 진주만 급습을 당한 미국의 전격적인 참전이 이루어지자 사업은 속도를 냈고 3개 자동차 제작사의 치열한 경쟁 끝에 1942년 4월, 포드(Ford)가 제안한 6X6 차체에 6기통 가솔린 엔진으로 110마력을 낼 수 있고 판 스프링 서스펜션을 장착한 T22가 채택되었다.

포드에서 제안한 T22. 6X6 차체를 이용해 야지 주행 능력을 향상했다.


정찰용으로의 변신


그런데 이렇게 양산 모델을 선정하고 본격 제작에 착수할 무렵 화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M3로는 팬터(Panther)나 티거(Tiger) 같은 독일 최신예 중전차의 격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37mm 구경의 포로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전차는 1호, 2호 전차처럼 1930년대에 제작된 초기의 전차들 밖에 없었다. 3호, 4호 전차도 측면이나 후면의 취약부를 노려서 격파하지 않는 한 요격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M3보다 강력한 대구경의 포를 탑재하려면 차체를 완전히 변경하고 뜯어고쳐야 했다. 시간이나 비용을 고려할 때 차라리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것이 합리적일 정도였고, 실제로 당시 M4 전차의 양산이 개시되어 전선에 공급되고 있었다. 결국 야심만만하게 시도한 구축장갑차는 발걸음도 내딛기 전에 좌초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변화는 T22가 다른 용도로의 변신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M1919 기관총 대신 M2 중기관총을 장착해 공격력을 강화한 M8. 하지만 주포가 37mm의 M3여서 기갑전을 펼치기에는 화력이 부족했다. <출처: (cc) Minnesota Historical Society at Wikimedia.org>

일선에서 수색부대의 신속한 기동력 향상이 요구되면서 가볍고 날렵한 T22가 눈에 들어 온 것이었다. 정찰장갑차는 적 주력부대와의 전면 교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M3 정도의 화력과 소화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력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약간의 설계 변경을 거쳐 1943년에 M8이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고 양산이 개시되었다. 이후 불과 2년 동안 8,500여 대가 제작되어 이탈리아 전선을 필두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더불어 연합국에도 대량 공여되었는데, 특히 이전부터 차륜형 장갑차에 관심이 많았던 영국군은 M8에 그레이하운드(Greyhound)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큼 애용했다. 최고 시속 90km 가까이 되는 속도로 앞장서서 적진을 살피고 정보를 획득하면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충분한 물량의 전차와 여타 기갑장비를 전선에 공급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굳이 M8을 다른 임무에 투입할 필요도 없었다.

37mm 주포와 조준경의 모습. 전쟁이 개시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차들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대전차 화기로서의 능력이 미흡해졌다. <출처: (cc) The Minnesota Historical Society at Wikimedia.org>



전사에 남은 소소한 흔적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약한 장갑 능력으로 인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20mm 이상의 기관포는 물론, 보병들이 휴대하는 각종 대전차 화기에도 쉽게 격파되어 나갔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차체 하부가 일반 트럭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해 대전차 지뢰 공격에 무기력했다. 사실 이런 단점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일선에서 지휘관들이 정찰장갑차의 임무와 능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마구 전선에 투입하다 보니 피해가 커진 것이기도 했다.

또한 차륜형 주행 시스템은 도로에서는 고속으로 주행할 수 있지만 야지에서 기동력 저하를 불러오곤 했다. 산지가 많아 도로 사정이 나쁘고 잦은 비로 인해 툭하면 진흙 구덩이로 변하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특히 많은 애로가 발생해 일선 부대들은 전선 정찰 임무에 접지력이 좋은 하프 트랙을 투입했을 정도다. 따라서 미 육군은 이제 막 공급이 개시된 1943년 말부터 M8을 대체할 정찰장갑차의 도입을 신중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파리 해방 후 개선문 인근을 통과하는 미군 소속 M8 장갑차

이처럼 유럽 전역에서는 평가가 좋지 못했지만 태평양 전역에 공급된 M8은 장갑이 빈약한 일본군 전차를 손쉽게 격파했다. 기갑부대가 전면에 나서는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태평양 밀림에서 M8은 애초의 개발 목적처럼 구축장갑차의 역할을 충분히 담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선에서 묵묵히 임무를 다한 M8은 종전이 되자 점령군의 치안 유지용으로 임무를 변경해 사용되었다.

겉모습이 전차와 유사하고 사실 최초 구상 단계에는 전차와의 교전이 주목적이었기에 상당히 강력해 보이지만, 정찰용으로 변경되었을 만큼 M8의 활동 영역은 처음부터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많은 수량이 전선에 공급되었지만 전투의 향방을 크게 바꿀 정도의 인상적인 활약을 전쟁사에 기록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빈약한 장갑차와 함께 한국 육군의 기갑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44년 9월 벨기에의 불타는 민가를 지나가는 M8 장갑차. 이처럼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출처: 미 육군>



역사의 밀알이 되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북한군이 남침 전면에 내세운 T-34와 비교도 되지 않는 빈약한 M8 27대가 당시 국군이 보유한 유일한 기갑장비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장갑대대에 집중되지 못하고 전선에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전방의 각 사단에 3~4대씩 분산 배치했다. 물론 당시에도 그 정도의 M8로는 전력 향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이처럼 얼마 안 되는 귀한 전력 자산을 굳이 나누었던 이유는 화력지원이 아닌 통신용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의 통신 사정은 몹시 열악했고 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육군본부의 남산통신소와 전방 사단간의 통신에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의 8사단에 배속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남산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자산을 뿔뿔이 나눈 것이다.

M8 장갑차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 창군 초기에 국군의 주요 통신 네트워크를 담당하기도 했다. <출처: (cc) The Minnesota Historical Society at Wikimedia.org>

그런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었다. M8은 북한의 T-34를 막기 위해 전선으로 출동했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의정부 방어선에 출동한 M8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을 겪으며 적의 반격에 차례차례 희생되었다.

이런 수모에도 M8은 김포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쳤고, 옥천 전투에서는 적 전차의 무한궤도를 끊어버리는 선전을 펼쳤다.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은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에도 참여했지만 흥남 철수 당시 적재품목에서 발견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M8이 뿌린 노고는 오늘날 세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국군 기갑부대의 밀알이 되었다.

6.25전쟁 이전의 시가 행진에 선보인 국군 기갑연대의 M8 장갑차. 국군 최초의 기갑장비였다. <출처: 군사편찬위원회>


제원



중량 8.6톤 / 전장 5.00m / 전폭 2.53m / 전고 2.26m / 항속거리 600km(도로), 250km(야지)/ 최대속도 89km/h/ 승무원 4명 / 무장 37mm M3포 1문, 7.62mm M1919 기관총 1문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