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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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만용이 부른 참극

1942년 2차 하르코프 전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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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속에서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하는 독일군. 소련군이 덫에 빠지자 즉시 독일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출처: Bundesarchiv>



독일의 반격


하지만 독일은 티모셴코에게 충분히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소련군이 한계를 드러낸 5월 15일이 되었을 때, 이미 그는 기회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동안 전선의 남쪽 견부를 튼튼하게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부대는 기갑부대의 명장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가 지휘하는 제1기갑군이었다. 이처럼 묵묵히 방어 상태로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시간을 보내던 그들이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독일 최초의 야전군 급 기갑부대였던 제1기갑군은 1940년에 프랑스, 1941년에 유고슬라비아를 함락시킨 일등 공신이었고 바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에서도 남부집단군의 선봉장을 맡아 우만(Uman)과 키예프(Kiev)에서 기념비적 대승을 이끈 강력한 철퇴였다. 그들은 6월에 개시될 청색 작전에서 지난 겨울 점령에 실패한 요충지 로스토프를 함락시킨 후 코카서스로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충실히 전력을 증강하던 중이었다.

5월 17일, 제6항공군단의 지원을 받는 제3장갑군단과 제44군단이 바르벤코보(Barvenkovo)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그동안 공격에만 매몰되어 있던 소련군의 배후로 진격한 이들은 하루 만에 10km나 파고 들어갔고 순식간에 전방에 있던 소련 남부전선군의 주력 부대들이 크라스노그라드 일대에 포위될 위기에 빠졌다. 티모셴코는 무너진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크라스노그라드로 전진하던 소련 남부전선군의 배후를 독일이 절단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티모셴코는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출처: (cc) Grafikm fr at English Wikipedia at Wikimedia.org>

그러자 스탈린은 “병력은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답하며 지원을 거부했다. 이처럼 공세 이후 닥칠 수도 있는 위기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을 정도로 소련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즉각 공세로 나가라는 스탈린의 조급한 명령이 자초한 결과였다. 이에 티모셴코는 후퇴를 요청했지만 이 또한 거부당했다. 모스크바 방어에 성공한 자부심이 그 사이 자만심으로 변한 스탈린이 또다시 현지 사수 엄명을 내리는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소련의 대패로 막을 내리다


이처럼 운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소련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독일군은 포위망을 완성했고 곧이어 엄청난 폭탄의 비가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들을 구원할 소련 남서전구의 여타 부대들은 독일군의 강력한 압박에 가로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 19일이 되자 그동안 굳건히 전선을 버텨주던 독일 제6군이 외곽에 있던 소련 남서전선군을 멀리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공격을 가하는 독일군. 스탈린이 상황의 위급함을 깨닫고 방어로 전환시키고자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스탈린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방어로 전환할 것을 허락했으나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5월 22일 티모셴코는 후퇴를 명했지만 독일군이 탈출로를 엄중히 차단하고 있었다. 극히 일부의 소련군이 기적적으로 사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으나, 포위망 안에 갇힌 30만의 소련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1년 전 독소전쟁 초기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자 스탈린과 STAVKA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이 이번 공세에 나섰을 때 기대한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지만 정작 비참하게 당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아직까지도 대포위 공세는 독일의 전공과목으로, 소련에게는 낯선 분야였다.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저항에 나섰지만 일주일의 격전 끝에 더 이상 항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서 5월 28일 항복했다. 이로써 2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독일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2차 하르코프 전투 당시 포로가 된 소련군. 불과 보름간의 전투로 무려 30만의 소련군이 붕괴되었다.

소련군은 17만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고 10만의 부상자와 더불어 2,000여 문의 야포와 1,000대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노획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손실로 말미암아 그동안 철옹성 같았던 벨고로드(Belgorod)에서 로스토프 일대의 소련군 전선이 순식간에 허술해졌다. 반면 기습을 당한 상태로 전투를 시작한 독일군의 피해는 2만 정도에 불과했다.


스탈린의 판단 착오


소련은 독일을 흉내 내어 기동전으로 포위 섬멸전을 펼치려 했지만 종심 깊게 진격할 경우 측면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미처 알지 못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찾아오기에는 소련군의 준비와 실력이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무려 500만의 병력을 소모시키고 엄청난 패배를 반복했으면서도 아직 소련은 아픔을 통해 배워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다. 2차 하르코프 전투가 바로 그 증거였다.

항복한 소련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독일군. 지난 1년 동안 소련은 500만의 전력 손실을 보았지만 아직도 겪어야 할 아픔이 많이 남아 있었다. <출처: Bundesarchiv>

격분한 스탈린이 티모셴코를 2선으로 좌천시켰지만 사실 이는 책임 회피였다. 한마디로 이 전투의 참패는 시작부터 끝까지 스탈린의 판단 착오가 가져온 결과였다. 소련은 지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처음 겪는 엄청난 혹한에 당황해하는 독일군을 멀리 밀어붙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르제프, 데미얀스크(Demyansk) 등지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던 독일군을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만큼 독일이 강했지만 모스크바 전투의 승리에 도취된 스탈린이 이를 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잠시 주춤했던 군부에 대한 간섭이 재개되면서 간신히 맞추어 놓았던 전선 남부의 균형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과오를 범했다. 결국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스탈린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군부의 작전에 간섭을 하지 않게 되었고 소련은 STAVKA의 주도 하에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2차 하르코프 전투의 패배로 좌천되어 후방의 북코카서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복무 중인 티모셴코(왼쪽)

2차 하르코프 전투는 하르코프 주(Kharkov Oblast)가 전장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투는 대부분 크라스노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하르코프 시는 엄밀히 말해 교전 지역 밖에 위치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2차 하르코프 전투로 알려진 이유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대승에 감격한 국방군 총사령관 카이텔(Wilhelm Keitel)이 전사국(戰史局)에 지난 1941년 10월의 전투에 이은 승전보라며 2차 하르코프 전투로 명기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의 역할


소련은 지난 1941년 여름과 가을에 전쟁사에 두고두고 남을 만한 경악스러운 패배를 연이어 당했다. 기동력을 앞세운 독일군의 신속한 양면 포위에, 현지 사수를 명령하며 철수를 불허한 스탈린의 옹고집이 어우러진 참사였다. 소련도 당한 만큼 되돌려주고 싶어 한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1941년 동계 전투에서 전세를 반전시키자 이제 승기를 잡은 것으로 착각한 소련은 공세를 시도했다.

독일 점령 당시 파괴된 하르코프 도심.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소련 국민들의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이 보여준 기동전을 여기저기서 어설프게 흉내 내다 낭패만 당했고, 그 절정이 바로 2차 하르코프 전투였다. 소련이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를 거머쥔 것은 8개월 후인 1943년 2월 치열한 격전 끝에 막을 내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였는데, 여기에는 그동안 소련이 엄청나게 당하면서 반면교사로 터득한 모든 노하우가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그만큼 소련은 아픔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반대로 독일이 방어에 성공한 하르코프는 청색 작전을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더해졌고 도심 곳곳에 독일군의 대규모 보급소와 보충대가 설치되었다. 더불어 탈출하지 못하고 도심에 남아 근근이 삶을 이어가던 소련인들에 대한 수탈과 착취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리고 2차 하르코프 전투가 막을 내린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1942년 6월 28일, 독일이 대대적인 공세를 야심 차게 시작하며 지옥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개시되었다.

종전 직후 스탈린과 함께한 소련군 주요 장성들. 2차 하르코프 전투 패전 이후 스탈린은 자신의 군사적 무능을 깨닫고 군부의 작전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다시피 했다.

전투 기간이 보름 정도였고 역사를 바꾼 거대한 격전이 곧바로 이어졌기에, 2차 하르코프 전투는 그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통사(通史) 수준의 전쟁사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갈 정도다. 하지만 양측 합쳐 무려 100만의 대군이 격돌해 30만의 소련군이 붕괴된 이 전투는 결코 가볍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선 이런 숫자가 의미 있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독소전쟁의 규모가 워낙 컸다고도 할 수 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