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1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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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 소총

드라이제 바늘 총

(Dreyse Needle 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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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841 혹은 후기 형인 M1862로 추정되는 드라이제 소총 <출처: (cc) PHGCOM at Wikimedia.org>

1866년 6월 17일, 옛 신성로마제국(제1제국) 내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보오전쟁(普墺戰爭)을 시작했다. 게르만족 위주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프로이센과 주변의 이민족까지 포함해 느슨한 형태의 거대 제국을 유지하려는 오스트리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벌어진 일종의 통일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겐 나폴레옹 전쟁 후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이 눈엣가시 같았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후 나폴레옹에 의해 제국이 해체되기 전까지 350여 년간 오스트리아는 유럽 가톨릭 세계의 유일한 황제국이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도 여전히 황제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동양처럼 조공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국력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아직은 그들의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7월 3일, 보헤미아의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에서 양국은 각각 25만의 대군을 동원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내선 기동의 이점을 누릴 수 있고 포병이 강력한 오스트리아가 우세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승자는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약 1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오스트리아는 4만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며 붕괴되다시피 했다. 8월 23일 오스트리아가 결국 항복했을 만큼 이 전투의 결과는 실로 대단했다.

프로이센이 불리한 가운데서도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은 치밀한 준비 덕분이었다. 특히 철도를 이용해 군대를 신속히 이동 전개시킴으로써 위치의 이점을 누렸던 오스트리아군을 절단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보다 전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병 간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5배 이상 강력한 소총을 사용했기에 오스트리아군이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소총이 바로 드라이제 바늘 총(Dreyse Needle Gun)이었다.

M1841 혹은 후기 형인 M1862로 추정되는 드라이제 소총 <출처: (cc) PHGCOM at Wikimedia.org>


강력한 총에 대한 의지


총포(銃砲)가 정확히 언제 탄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국에서 화약을 무기로 이용하기 시작했던 9세기경 출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은 편이다. 가장 오래된 실전 기록은 1132년 덕안(德安)성 공방전 당시 송(宋)군이 금(金)군을 물리치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약의 전파와 함께 총포도 널리 퍼져나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이 휴대하기 편리한 총이 포에서 분리되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이 총을 사용해 프로페셔널인 기사(騎士)들을 쉽게 제압하게 되었어도 칼, 창, 활로 대표되는 냉병기(冷兵器) 시대를 일거에 끝낼 수는 없었다. 조금씩 위력이 강해지고 사거리도 늘어났지만 사용이 어려웠고 제약도 많았다. 최초의 총으로 여겨지는 수총(手銃)은 도화선에 불을 붙여 총알을 발사하는 단순한 구조였음에도 사격 절차가 번거롭고 위력도 형편없었다. 한마디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15세기 중반에 방아쇠를 이용해 보다 편리하게 사격할 수 있는 화승총(火繩銃)이 등장하면서 총은 진정으로 무서운 무기가 되었지만 이 역시 불편한 점이 많았다. 탄환을 넣고 화약을 부은 후 심지에 불을 붙여 준비를 하는 동안 차라리 칼이나 창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보다 강력한 총을 갖고자 하는 인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아 오늘날의 자동소총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화승총으로 사냥 중인 티베트인을 묘사한 20세기 초의 기록화. 그림에서 보듯이 화승총은 준비도, 사격도 어려운 총이다.

혁명적인 기술들의 등장


이처럼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마치 장난감 같은 초기의 조악한 총에서 오늘날의 고성능 총이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총은 화약의 폭발력으로 탄환을 날리는 기본 메커니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부적으로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그러던 중 19세기 들어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엄청난 변화를 이끈 기술이 연이어 등장했다. 바로 강선(腔線)과 후장식(後裝式) 장전법, 탄피(彈皮)였다.

L7 105mm 전차포에 새겨진 강선의 모습. 강선이 등장하면서 총포의 정확도는 비약적으로 향상했다. 로켓 발사관이나 전차포처럼 일부 특정 목적이 아니면 거의 모든 총포에는 강선이 파여 있다. <출처: (cc) baku13 at Wikimedia.org>

강선은 사격의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기술이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19세기 이전의 총격전을 보면 선형진을 이루며 다가오는 적군을 향해 총격을 가해도 저지하는 데 그다지 효과가 없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그만큼 강선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총은 정확도를 장담할 수 없었다. 현재 소총을 의미하는 단어인 라이플(Rifle)이 원래 ‘강선을 만들다’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점만 보아도 강선이 총기 역사에 끼친 영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총은 총구를 통해 화약과 탄환을 넣고 꽂을대로 다진 후 사격하는 방식, 즉 전장식(前裝式)이었다. 당연히 사격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절차가 복잡해 숙련된 사수라도 1분에 1발을 발사하기 어려웠다. 또한 서서 탄환을 삽탄하는 부대와 엎드려 하는 부대 간의 전투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명확하다. 19세기 들어 철강 가공 기술이 발달하고 강도가 증가된 노리쇠와 약실이 나오면서 후장식 총이 본격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탄두와 탄피가 일체화된 총탄이 탄생하면서 신속한 장전과 사격이 가능해졌다. 탄피 안에 보관된 화약은 외부의 습기로부터 안전해 장기간 보존이 가능했다. 또한 탄피는 사격 시 발생하는 충격과 열의 일부를 흡수해 총의 성능을 향상시켰다. 제식화에 실패한 G11 소총처럼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연사가 가능한 대부분의 총도 탄피가 없었다면 등장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름종이 등을 이용한 초창기 탄피로 화약과 탄두를 일체화하여 후장식 장전이 가능해진 1860년대 총탄. (좌에서 우로) 드라이제 소총용, 샤스포 소총용, .56-56 스펜서 림파이어


가치를 알아본 자


드라이제 소총은 최초의 볼트액션 방식 소총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총기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었다.

1841년부터 본격 보급된 드라이제 소총은 4조 우선의 강선을 총열에 새겨 정확도와 사거리를 늘렸다. 또한 최초로 실전 배치된 후장식 장전 방식 총이자, 작은 볼트(Bolt)로 손쉽게 탄피의 추출과 장전이 가능한 볼트액션 방식을 최초로 채택한 총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기름종이 탄피로 탄자, 뇌관, 화약을 감싼 일체형 탄환을 사용했다. 한마디로 당시까지 등장한 총과 관련된 거의 모든 최신 기술이 접목된 총이었다.

1909년 촬영된 니콜라스 폰 드라이제의 동상. 100년 전에 동상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독일에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를 선도한 이 소총은 마인츠(Mainz) 출신의 발명가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Nikolaus von Dreyse)가 개발한 것이다. 그는 1809년부터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총기 업무에 종사하면서 차세대 소총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최신 기술들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824년 고향으로 돌아와 뇌관 제작회사를 설립한 그는 그동안 구상한 새로운 소총의 제작에 착수해 1836년 마침내 시제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드라이제 소총은 사수가 총신 후미 약실에 기름종이 탄피로 감싼 총탄을 장전하고 노리쇠를 닫은 뒤 방아쇠를 당기면 뾰족하고 긴 바늘 모양의 공이가 총탄 속의 뇌관을 격발시켜 탄자를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바늘 총이라는 명칭도 바로 이 특징적인 공이의 모양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장전과 격발이 신속한 만큼 당시까지 등장한 대부분의 소총보다 최소 5배 이상의 사격이 가능했다.

총을 완성한 드라이제는 판매에 나섰는데 그중에는 나중에 엄청난 굴욕을 당한 오스트리아도 있었다. 하지만 성능을 제대로 알아본 나라는 이를 게베어(Gewehr) M1841이라는 이름으로 제식화한 프로이센 밖에 없었다. 이후 1855년 독일어로 바늘 총의 의미를 가진 Zündnadelgewehr M1841로 개칭되었으나 야전에서는 발명자인 드라이제의 이름을 붙여 드라이제 소총, 혹은 드라이제 바늘 총이라고 불렀다.

방아쇠를 당기면 뾰족하고 긴 바늘 모양의 공이가 총탄 속의 뇌관을 격발시켜 탄자를 발사한다. 바늘 총이라는 명칭도 바로 이 특징적인 공이의 모양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출처: (cc) Benedikt.Seidl unter Anleitung von Avron at Wikimedia.org>


짧지만 굵었던 전성기


드라이제 소총은 1849년 5월, 드레스덴(Dresden)에서 벌어진 폭동 진압에 처음 사용되었고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도 일부 사용되었다. 따라서 1866년 보오전쟁 발발 당시엔 새롭게 등장한 비밀 무기는 아니었고 당연히 오스트리아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채택을 외면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엄폐나 은폐 상태로 누운 채 신속한 장전과 사격이 가능한 드라이제 소총을 사용하는 프로이센군에게 궤멸되었다.

5년 후에 전쟁을 벌이는 사이가 되지만 1864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을 후원했다. 오스트리아 병사가 독일 병사의 드라이제 소총을 바라보고 있다.

자국산 로렌츠(Lorenz) 전장식 소총을 장비한 오스트리아군은 재장전이 워낙 어렵다 보니 최초의 한 발을 발사한 후 착검을 하고 돌격하는 것 외에는 사용할 전술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드라이제 소총을 이용해 그렇게 무작정 돌격해 오는 오스트리아군을 방어선 50m 이전에서 모두 격퇴시켰다. 그 상태로 전쟁을 지속해봐야 이길 가능성이 전무했던 오스트리아는 결국 이런 격차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항복에 이르렀다.

이 결과에 놀란 유럽 각국은 드라이제 소총처럼 탄피로 일체화된 총탄을 사용하는 후장식 소총을 앞다퉈 도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샤스포(Chassepot) 소총처럼 성능이 월등한 후발 주자들도 나타났다. 사실 엄청난 족적을 총기사에 남긴 드라이제 소총에도 단점은 있었다. 몇 번 쏘면 고온의 가스가 새어 나와 사수의 얼굴에 화상을 입히곤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절삭가공 기술이 그만큼 정교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독일도 마우저사에서 개발한 M1871(Gewehr 71)로 제식 소총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드라이제 소총의 실제 전성기는 불과 10년 남짓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10년은 총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그야말로 짧고 굵었던 시간이었다. 이때부터 볼트액션 소총은 제1, 2차 대전을 거치며 자동소총이 등장한 20세기 중반까지 전장의 주역으로 맹활약했다. 어쩌면 인류사 최대 전쟁의 비극성을 더욱 증폭시킨 잔인한 도구였다고도 할 수 있다.

M1857 모델의 노리쇠 부분


제원

탄약 15.4mm (0.61 in) 종이탄피탄 / 작동방식 브린치로딩, 볼트액션 / 전장 1,420mm / 중량 4.7kg / 발사속도 분당 10발 / 유효사거리 600m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