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0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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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새 시대를 이끈 조용한 개척자

드 하빌랜드 뱀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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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쇼에서 시범비행 중인 뱀파이어. 1952년 제작되어 영국 공군 제219비행대에서 활약하다 1969년 퇴역한 기체다.

어느덧 전투기의 역사가 한 세기를 넘으면서 이제 공군을 빼놓고는 전쟁을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각국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좋은 전투기를 개발하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그 발전 속도는 실로 대단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고찰하면 커다란 변화를 이끈 순간은 따로 있었다. 제트 전투기의 등장도 역사의 놀랄 만한 변곡점 중 하나였다.

전투기의 역사에서 제트 전투기의 등장은 그 이전과 이후로 시대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차이가 엄청났다. 학문적으로 정의된 것은 아니지만 흔히 전투기의 세대를 언급할 때 Me 262를 비롯한 초창기의 제트 전투기를 제1세대로 칭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 프로펠러 전투기가 사실 전쟁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마치 기원전의 역사처럼 취급될 정도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해 무기사의 영원한 라이벌로 등극한 MiG-15와 F-86은 제트 전투기의 역사를 활짝 열어젖힌 제1세대 전투기 시대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이들이 실전을 통해 명성을 쌓아 그럴 뿐, 여타의 많은 전투기들도 이 시기에 나름대로 활약을 펼쳤다. 지금과 달리 전투기 개발과 관련된 기술 수준과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드 하빌랜드 뱀파이어(de Havilland Vampire, 이하 뱀파이어)는 한마디로 소리 소문 없이 제1세대 전투기 시대를 풍미한 숨은 강자였다. 비록 규모가 큰 전쟁이나 전역에서 활약하지 못해 동시대의 여타 경쟁 기종에 비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무려 3,000여 기 이상 생산되어 30여 개국 이상에서 주력기로 활약한 베스트셀러였다.

요르단 공군 마킹을 하고 시범비행 중인 뱀파이어.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요르단 공군 소속 뱀파이어가 실전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Mike Freer - Touchdown-aviation at Wikimedia.org>



제트 시대를 선도한 나라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제트 전투기인 Me 262와 앞에서 소개한 MiG-15, F-86 등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흔히 제트 시대의 여명기를 이끈 나라로 독일, 소련, 미국이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사실 이들 못지않은, 아니 더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했던 나라가 영국이었다. 프로펠러기와 제트기의 기본적인 차이가 엔진이라는 점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제트 엔진은 가장 중요한 장비였다.
뱀파이어와 글로스터 미티어에 탑재된 드 하빌랜드의 고블린 엔진. Me 262의 심장이었던 Jumo 004 엔진보다 추력이 60퍼센트 더 강력했다. 이처럼 영국은 초기 제트 엔진의 역사를 선도한 핵심 국가였다. <출처: (cc) Rept0n1x at Wikimedia.org>

영국은 1937년에 휘틀(Frank Whittle)이 세계 최초의 제트 엔진을 만든, 이 분야를 선도한 나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 미국도 개발을 하긴 했지만 이후 소련에 제공되어 동구권 전투기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한 롤스로이스 넨(Rolls-Royce Nene) 엔진에서 보듯 영국은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실전 투입을 목표로 제트 전투기 개발을 시작했을 만큼 움직임도 빨랐다.

비록 Me 262가 먼저 데뷔했지만 영국은 전황이 우세하다 보니 실전 배치를 서두르지 않았을 뿐, 오히려 엔진의 성능이 훨씬 뛰어난 글로스터 미티어(Gloster Meteor)의 개발을 이미 끝낸 상태였고 뱀파이어도 같은 시기에 탄생한 제트 전투기였다. 당시 영국 당국은 실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력 공백을 막기 위해 여러 업체에 차세대 제트 전투기의 개발을 의뢰했었다.

이처럼 당국의 움직임이 신중했다는 것은 그만큼 제트 전투기가 생소한 분야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새로운 심장이 채택되면서 어떤 형태의 기체 구조가 적합한지부터 연구를 새롭게 해야 했다. 때문에 이후 호사가들에 의해 나치의 미완성 비밀무기 등으로 거론되는 독일 항공기 업체들의 여러 프로토타입이나 습작들처럼, 영국도 업체별로 상이한 모습으로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졌다.

영국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글로스터 미티어. 뱀파이어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발이 완료되어 비행에 성공했다.


시대를 앞선 디자인


고속 경폭격기인 모스키토(Mosquito)를 만든 드 하빌랜드는 기체의 중량을 줄이고 엔진의 배치가 용이하며 배기가스의 배출이 원활하도록 쌍동체(Twin-boom) 방식의 신예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DH.100으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를 이끈 엔지니어 비숍(Ronald Bishop)은 비행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커다란 주익과 자세 제어를 위한 수평 미익을 쌍동체로 연결해 기체를 짧게 만들 수 있었다.
주익과 미익을 매끄럽게 연결한 쌍동체 구조여서 기동성이 좋았다. <출처: Phil Vabre at Wikimedia.org>

얼핏 미국의 P-38과 비슷하지만 엔진의 위치와 쌍동체가 지지대 역할을 하는 점을 고려할 때 기술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만일 오늘날처럼 컴퓨터로 자세 제어가 가능해 미익과 쌍동체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면 DH.100은 마치 B-2 폭격기 같은 전익기가 될 만한 구조였다. 그만큼 시대를 앞섰던 이 디자인은 후속기인 베놈(Venom), 시빅슨(Sea Vixen)으로 이어지는 드 하빌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한창 전쟁 중이어서 빠른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어 1943년 9월 초도 비행에 성공했는데, 이는 글로스터 미티어에 불과 6개월 뒤졌을 뿐이었다. 각종 실험에 만족한 당국은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부여했으나 정작 일선 배치가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3월부터였다.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양산 단계에서 발주를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범비행을 위해 이륙 중인 모습. 쌍동체를 사용하면서 기체를 짧게 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문을 연 개척자



이처럼 기술적 문제라기보다 정책적인 사정에 의해 데뷔가 늦춰진 만큼, 최초 개발 당시의 핼포드(Halford) H.1 엔진 대신에 추력이 대폭 강화된 고블린(Goblin) 엔진이 장착되는 등 세부적인 개선이 이루어져 양산형의 성능은 더욱 향상되었다. 쌍발인 글로스터 미티어에 비해 속도는 조금 뒤졌지만 탁월한 기체 구조 덕분에 기동성이 좋고 정비가 손쉬워 일선에서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뱀파이어는 해군 역사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함재기의 제트화가 시대의 흐름임을 직감한 영국 해군은 양산 전부터 뱀파이어에 관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함재기형으로 개조된 시뱀파이어(Sea Vampire)가 탄생하여 1945년 12월 3일 항공모함 HMS 오션(R68)에서 착함과 이함에 성공했다. 이는 제트기로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이후 주력기가 되지는 못하고 소수가 제작되는 데 그쳤지만 이처럼 뱀파이어는 바다에서 새로운 문을 연 개척자였다.

항공모함 오션에서 이함하는 시뱀파이어 시제기. 항공모함에서 이착함에 성공한 최초의 제트기가 되면서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영국 공군은 전투기형을 시작으로 전폭기형, 훈련기형을 대량 도입해 주력기로 사용했다. 또한 캐나다, 호주, 인도 같은 영연방 국가를 비롯해 30여 개국에서 직도입 혹은 라이선스 생산했는데, 그중에는 제1세대 전투기 시절 나름대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프랑스와 스웨덴도 있었다. 이들은 제2차 대전 전후 급속히 제트 전투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발생한 전력 공백을 막기 위해 뱀파이어를 도입했다.

뱀파이어는 스웨덴에서 운용한 최초의 제트 전투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국산 J29로 대체되었지만 그간의 전력 공백을 충실히 메워주었다.

짧고 굵었던 자취


뱀파이어는 여러 나라에서 운용되면서 제1차 중동전쟁, 말레이 내전, 로디지아 분쟁처럼 실전에도 투입되었으나 제한적인 활약에 그쳐 인상적인 전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이처럼 평가도 좋고 실전 경험도 있었지만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해 약 10년이 지난 1950년대 중반부터 영국을 시작으로 주력기에서 내려왔다. 초기 제트 전투기의 발전이 급격하다 보니 활약을 계속하기에는 순식간에 성능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스위스 공군이 운용했던 뱀파이어 Mk.6. 약 30여 개국에서 도입하거나 라이선스 제작하여 사용했다. <출처: Aldo Bidini at Wikimedia.org>

이는 비단 뱀파이어에만 국한된 사례가 아니라 제1세대 전투기 시대의 전성기를 개막한 MiG-15나 F-86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2선급 작전기나 훈련기 등으로 임무가 변경되어 1980년대 이전에 전량 퇴역했다. 영국은 이를 운용하면서 얻은 기술을 바탕으로 베놈과 시빅슨 같은 후속기를 개발했으나 국력의 쇠락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전투기 자력 개발을 포기한 상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뱀파이어는 동시대에 활약한 미국, 소련의 전투기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의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쉽게 재현하기 어려운 수준인 3,000여 기 이상이 제작되어 활약했다. 또한 함재기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이끌기도 했고, 지금도 주요 전투기 제작국인 프랑스, 스웨덴 같은 나라의 제트기 역사를 선도하기도 했던 조용한 개척자라 할 수 있다.

호주에서 면허 생산된 T.35 모델. 10여 년간 3,000여 기 이상이 제작된 베스트셀러 전투기다. <출처: Chris Finney at Wikimedia.org>

제원(FB.6)




전장 9.37m / 전폭 11.58m / 전고 2.69m / 최대이륙중량 5,620kg / 최대속도 882km/h / 항속거리 1,960km / 작전고도 13,000m / 무장 20mm 기관포 4문, 3인치 로켓 8발 또는 500파운드 폭탄 2발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