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3.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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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하늘에서의 전쟁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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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승부수


전투기 조종사들은 행동을 구속당한다며 불만을 표출했지만 폭격기를 근접에서 보호하도록 조치한 OKL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이전보다 많은 폭격기들이 목표 지점까지 다가가 폭탄을 던질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영국의 피해는 급속도로 늘어갔다. 이때만 해도 독일은 군사적으로 효과가 큰 대상을 선별해 타격을 가했을 만큼 영국의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공습으로 완파된 미들 월롭 비행장의 격납고. 8월 후반에 독일은 전략 시설을 선별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효과를 얻었다.

많은 사가들이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 공군은 장거리 중폭격기가 없어 구조적으로 적 후방의 주요 거점을 타격하는 전략 폭격 능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전력 확충에 힘쓰다가 전쟁 전 사고로 순직한 참모총장 웨버(Walter Wever)처럼 독일 공군 내에서도 전략 폭격 능력의 확충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지만, 육군을 근접에서 지원하는 전술 공군으로 철저하게 특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영국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이 이루어진 1940년 8월에 독일 공군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적어도 출격 횟수와 양만 놓고 본다면 그때까지 공군이 벌인 역사상 최대의 폭격 작전이었다. 특히 공군 비행장을 비롯한 군사 시설에 대한 선별적인 공습은 영국의 항전 의지를 급속도로 저하시켰다. 괴링은 그동안 영국의 대응이 예상보다 거세어 많이 애를 먹었지만 결국 굴복할 것으로 자신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독일 공군의 3대 폭격기 중 하나인 Ju 88. 영국 전투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귀환 확률이 가장 높았던 폭격기로 알려진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반면 시간이 흐를수록 영국의 손실과 피로도는 커져 갔다. 약 열흘이 흘러 8월 말이 되자, 공급되는 전투기보다 상실되는 전투기의 수가 2배에 이를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여러 방법으로 조종사들을 계속 충원했기에 수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대부분 비행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초임자들이었다. 독불전쟁 개시 이후 지난 두 달 동안 비행대대 지휘관의 8할이 전사상당했기에 이처럼 질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영국, 패전의 위기에 몰리다


8월 31일, 독일은 파괴된 영국의 방공 감시망 일각을 뚫고 쉴 새 없이 비행대를 출격시켜 4,500여 톤의 폭탄을 투하하며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 남아 있는 영국 공군의 전투기들이 날아올랐지만 상공에 대기 중인 더 많은 독일 전투기들이 달려들어 오히려 피해만 커졌다. 결국 독일은 하루 동안 40여 기의 영국 전투기를 격추시키며 영국 본토 항공전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격추되어 완파된 스피트파이어. 8월 말이 되었을 때 영국 공군은 피해를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다우딩 총사령관은 제11전투비행단 관할 비행장 중에서 사용 가능한 곳이 이제 몇 군데 안 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홈코트의 이점과 방공 감시망을 최대한 살려 부족한 전력으로 독일의 공격을 근근이 차단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저항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제 영국 남부 영공은 완전히 독일의 차지가 되다시피 했다.

전과를 통보받은 OKW(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이제 바다사자 작전의 실행일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판단했다. 이미 프랑스 북부에는 70만에 이르는 육군의 정예 부대들과 독일 및 점령지에서 징발한 수많은 선박들이 집결한 상태였다. OKW 작전부장 요들은 공군이 이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면 지상군이 영불 해협을 건널 수 있겠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해군 총사령관 레더는 여전히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상륙작전 개시 예정일이 9월 21일로 정해졌다.

영국 본토 상륙을 목적으로 징발된 각종 바지선들. 하지만 이 정도 수단으로 영불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는 무리였다. 경험이 없었던 독일은 상륙전이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독일이 자신만만했던 만큼 영국의 상황은 암담했다. 처칠이 여전히 항전을 외치고 있었고 전시 통제를 받는 영국의 보도 매체도 적들을 격퇴시키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공군 지휘부는 난감해했다. 비록 대놓고 의견을 공개할 수는 없었지만 다우딩이나 파크는 내부 회의에서 더 이상 독일 공군을 저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극적인 반전의 계기가 생겨났다.


오폭이 부른 나비효과


8월 24일 야간에 템스 강 하구의 공장지대 폭격에 나선 폭격기 중 일부가 항법 실수로 인해 등화관제로 칠흑 같이 어두웠던 런던 시내에 진입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건물이 파괴되면서 수십 명의 런던 시민이 죽거나 다쳤는데, 사실 이는 거대한 전쟁 중 벌어질 수 있는 흔한 오폭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독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던 영국 본토 항공전의 향방을 바꾸는 단초가 되었다.

폭탄을 투하하는 He 111 폭격기. 8월 24일 심야에 2기의 He 111기가 런던 시내를 오폭했는데,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향방을 바꾸는 단초가 되었다.

사실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처럼 영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꺾기 위해 애초부터 런던 폭격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히틀러나 괴링은 이를 금지했고 철저하게 폭격을 군사 시설에 한정시켰다. 당시 히틀러가 왜 그랬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이는 상당히 옳은 판단이었다. 공습에서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려면 상징적인 곳보다 군사적인 효과가 큰 목표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내심 영국의 전쟁 지도부도 이왕 당할 거면 차라리 런던이 낫다고 생각했다. 분노한 국민을 대동단결하게 만드는 심리적 효과도 있었지만 당장 제11전투비행단 관할 지역에 가해지는 압박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런던에 폭탄이 떨어지자 어떻게든 대응을 해야만 했다. 영국도 그것이 오폭임을 알았지만 심장부에 상처를 입은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처칠은 베를린 보복 공습을 명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예상 밖의 베를린 공습을 단행한 영국 공군의 휘틀리 폭격기.

영국 본토 항공전 개시 이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던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 총사령관 포털(Charles Portal)은 다음 날 밤 95기의 휘틀리 폭격기를 출격시켜 베를린 중심가의 템펠호프 공항을 비롯한 다수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 지금까지 영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베를린 시민들은 자신들의 심장부가 갑자기 폭격을 받는 상황에 경악했다.


런던 공습이 개시되다


이때만 해도 독일은 전날의 런던 폭격에 대한 영국의 통상적인 대응이라 보았지만 9월 4일까지 4차례의 공습이 더 이어지자 상황이 돌변했다. 히틀러는 공개 행사에서 영국에 백 배, 천 배의 보복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베를린이 공격을 당하면 자신을 아줌마로 부르라고 공언했다가 망신을 당한 괴링은 직접 프랑스로 가서 예하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런던 대공습을 명했다.

칼레 인근에서 지휘관들과 조종사를 모아 놓고 런던 대공습을 명하는 괴링. 그는 베를린이 폭격을 당해 몹시 약이 올라 있는 상황이었다.

9월 7일 아침, 프랑스 각지에 배치된 800여 기의 폭격기와 이들을 호위할 600여 기의 전투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사에 '번개(Blitz)'로 기록되는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목표나 시간별로 분산되었던 지금까지의 공습과 달리 이들은 거대한 하나의 대형을 유지하며 런던으로 향했다. 이들의 낯선 행동을 분석한 다우딩은 독일의 목표가 런던임을 알아차리고 경악을 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폭탄의 비가 영국의 심장부로 떨어져 내릴 것이 확실했다. 주요 거점별로 산개하여 매복한 제11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들로는 이들을 막기가 어려웠다. 상대의 어마어마한 규모도 그렇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향하는 바람에 달려가기엔 너무 늦었던 것이다. 런던을 담당하던 제12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들이 속속 출격했지만 이들도 출격 시기를 놓친 건 마찬가지였다.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 9월 7일 아침, 런던 이스트엔드 일대의 공장 지대 공습에 나선 He 111.

이 때문에 폭격기들은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런던 상공에 도착했다. 구닥다리 대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은 선도기를 시작으로 일제히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목표물을 정확히 골라서 했던 이전의 폭격과 달리 런던의 파괴가 목적이다 보니 그저 적당한 곳에 폭탄을 쏟아 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런던의 곳곳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