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3.0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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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하늘에서의 전쟁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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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전을 통해 얻은 경험


독일 공군은 바다사자 작전의 실행에 앞서 좀 더 많은 경험을 쌓길 원했다. 기회를 노리던 그들에게 영불 해협 일대를 항해하는 영국 함정이나 상선들은 좋은 미끼가 되었다. 군함들이 이곳에서 초계 활동을 벌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후방의 안전지대로 항해해도 충분한 상선들을 영국 정부가 굳이 이곳으로 통과시킨 이유는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 독일 공군은 이들을 공격하여 영국 공군의 대응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프랑스 전역 당시에 프랑스 루브르 기지에 배치된 제73전투비행중대의 허리케인 전투기. 비록 Bf 109에게는 역부족이었지만 여타 독일 공군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영국 공군은 충분한 전투기를 확보할 때까지 최대한 교전을 삼가야 했지만 국민의 사기 앙양, 본토 방어를 위한 조종사들의 경험 확보 등을 위해 제한적인 대응 출격에 나섰다. 그래서 6월 내내 영불 해협 일대에서 1~2개 편대 간의 공중전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곤 했다. 수적으로 앞섰던 독일 공군은 공중전을 최대한 많이 벌여 경험도 쌓으면서 영국 공군을 소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왔다.

반면 독일의 유인책에 흥분한 일부 조종사들이 해협을 건너 프랑스 부근까지 날아가 싸우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영국 공군은 본토 부근에서 제한적인 공중전을 벌이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면서 양측은 서서히 상대방의 실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주먹을 섞는 과정을 통해 양측 조종사들이 상대방 전투기의 성능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항구 인근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이는 Bf 109와 스피트파이어. 1940년 6월 내내 영불 해협 일대에서 소규모 공중전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조종사의 능력에 따라 승패가 갈렸을 만큼 Bf 109와 스피트파이어의 성능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그때만 해도 마치 남의 떡이 커 보이듯 막연히 상대가 강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특히 그동안 Bf 109가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독일 조종사들의 충격은 컸다. 그렇게 서로의 실력에 대한 탐색과 눈치 보기가 계속 이어지던 7월 10일, 영국의 레이더망에 독일 공군의 대규모 출격이 포착되었다.



마침내 시작된 새로운 전쟁


이때 출격한 70여 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는 종전에 비해 5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규모가 늘어나면 영국이 어떻게 나올지를 점검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여전히 독일 공군의 목표는 영불 해협에서 활동하는 영국 해군과 상선의 제거에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 이전에 입구라 할 수 있는 이 일대의 평정을 완벽하게 끝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해안가에서 100마일 내륙까지 감시할 수 있는 영국의 레이더. 이들이 독일 공군의 움직임을 확인하면 이후 영국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반면 영국은 이를 본격적인 침공 신호로 판단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총사령관 다우딩은 강력 대응을 결심하고 그동안 아껴두었던 50여 기의 전투기를 독일의 접근 방향으로 출격시켰다. 곧바로 영불 해협 상공에서 맞닥뜨린 대규모의 양측 공군기들은 상대의 꼬리를 물기 위해 산개하며 전투에 들어갔고 하늘은 기동을 하는 전투기들의 굉음과 기관총 발사 소음으로 가득 찼다. 역사적인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양측의 공중전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료에서는 이 전투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시작으로 꼽는다. 선박을 공격하는 독일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영국 전투기가 달려들자 독일 전투기들이 저지에 나서면서 곳곳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전투는 영국이 3기, 독일이 4기의 손실을 보고 30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공군 간에 벌여야 할 전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격렬한 공중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비행운. 이제 영국에서 이런 모습은 일상으로 바뀌어 갔다.

독일은 생각보다 강력한 영국의 대응에 놀랐지만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영국이 그런 식으로 대응할수록 영국 상공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전체 전력상 자신들이 우위에 있으므로 이날의 교전처럼 같은 수로 격추비를 교환만 해도 결국 자신들이 이기는 싸움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독일의 자만 혹은 방심


사실 규모에 상관없이 교전이 지속된다면 양측 전투기의 소모는 피할 수 없었다. 독일은 양측이 비슷한 수준으로 피해를 당해도 유리하다고 낙관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투기 생산에 박차를 가한 영국과 달리 정작 독일은 전력 증강은 고사하고 소모된 물량의 보충도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런 조짐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연이은 대승에 묻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격당해 리에주 부근에 불시착한 Bf 109. 그동안 독일 공군의 손실량도 많았지만 이를 보충하기 위한 즉각적인 노력이 부족했다.

프랑스 침공전 당시에 독일 공군은 주 전선도 아닌 네덜란드에서 방공망과 연합국의 대응에 막혀 60여 기의 전투기를 포함한 무려 500여 기의 각종 항공기를 상실했을 만큼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전력 증강은 고사하고 당장 손실분을 보충해야 했지만 군용기 생산량은 전쟁 전과 동일했다. 이를 심각하게 우려한 케셀링 같은 이들도 있었으나 대승에 도취된 독일 공군의 대응은 안이했다.

더불어 조종사의 수급 상황도 차이가 컸다. 여건만 되면 쉽게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전투기와 달리 양성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조종사는 단기간 내에 늘리기가 어렵다.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에서 지원 온 조종사들은 물론 망명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노르웨이 출신의 조종사들도 투입했다. 반면 독일은 조종사 확충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수립하지 않고 전쟁 전의 교육 체계에 그대로 의존했다.

망명한 체코슬로바키아 조종사들로 구성된 제312전투비행중대의 모습. 이처럼 많은 자원자들이 영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날부터 이 정도 규모의 전투가 계속 벌어지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양측 공군의 간 보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열흘 동안 매일 양측이 동원한 수십 기의 전투기들이 영불 해협 일대에서 같은 패턴으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고 후에도 규모가 줄었을 뿐 공중전은 계속되었다. 특별히 이곳 일대에서 8월 11일까지 벌어진 일련의 공중전을 별도로 ‘해협 전투(Kanalkampf)’라 부른다.



해협 전투의 결말


이렇게 해협 일대에서 본격 개시된 초기의 전투들은 양측에 많은 숙제를 안겨주었다. 자신만만하던 독일은 정작 이 기간 동안 영국의 2배가 넘는 손실을 보았다. 대부분이 속도가 느린 폭격기와 2선 급 전투기인 Bf 110이었지만 그런 격추비를 유지하다가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에서 작전을 벌이려면 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장거리 전투기인 Bf 110. 폭격기 호위 임무를 맡으며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영국 전투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영국도 결코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 목표가 독일 전투기가 아니라 폭격기여서 수적으로는 더 많은 전과를 얻었지만 독일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는 우세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전역 이후 계속해서 맞부딪치곤 있었지만 아무래도 실전 경험만 놓고 보면 독일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 조종 능력의 개인별 차이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부대 단위의 공중전 능력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편대 대형부터 영국은 제1차 대전 이후 이어져 내려온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지만 독일은 부단한 연구와 실전 경험을 통해 로테(Rotte), 슈밤(Schwarm) 대형처럼 효율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별도로 시간을 내어 새로운 전술을 연구할 시간이 없었던 영국은 독일의 전술을 벤치마킹하여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체면은 차후의 문제였다.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는 영국 선단. 다우딩이 전투기의 소모를 막기 위해 대응을 포기하면서 해협 전투는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독일의 페이스에 말려 소모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독일이 적극적으로 나오다 보니 이전처럼 대결을 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전투기 손실량이 생산량보다 급격히 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다우딩은 처칠과 해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협 전투의 포기를 선언했다. 이렇게 영국 본토 항공전 최초의 충돌은 일단 독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