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2.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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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하늘에서의 전쟁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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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낙관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주도하며 독일에게 치욕을 안겨준 프랑스에는 적개심을 품었지만 영국은 같은 게르만 민족으로 생각해 특별히 여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영국 본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잉글랜드의 주류인 앵글로색슨의 본향이 현재의 독일 북부이고, 영국의 왕실도 1714년 하노버 가문의 조지 1세(George I)가 등극한 이후 계속 독일계였을 만큼 역사적으로 밀접한 사이였다.

1937년 독일을 방문한 윈저 공(엘리자베스 2세의 백부) 내외의 영접 행사에 참석한 히틀러. 의외로 히틀러는 영국을 전략적 협력 대상자로 고려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소련을 불가촉 국가로 생각할 만큼 적대적으로 대했기에, 독일이 영국과 전략적으로 연대를 맺는다면 동유럽과 러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도 했다. 사실 나치가 인종주의까지 거론하며 영국과 가까운 사이라고 추파를 던지고 있었지만 단지 1940년 6월 말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영국이 독일의 제안을 따를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한마디로 영국은 독 안에 든 쥐였다. 해군 덕분에 해외의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물자를 공급받아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런 상태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미국이 호의적이었고 많은 영연방 국가들이 힘을 보태주고는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프랑스 항복 후 영국 홀로 독일과 맞선 상황이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외교적으로 적당히 타협을 보고 생존을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전쟁을 대비해 런던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을 시골로 소개시키는 모습. 영국은 항전 의지가 높았지만 그만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독일 군부 내에서 즉각 공세를 가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결정은 히틀러의 몫이었다. 그는 독일이 강화를 제의하면 결국 영국이 마지못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여,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며 느긋하게 나왔다. 당시 영국 주재 미국 대사였던 케네디(Joseph Kennedy)가 이제 영국은 희망이 없다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으니 히틀러의 이러한 여유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항전을 선택한 처칠


하지만 독일을 유화적으로 대했던 수상 체임벌린이 1940년 5월 10일 사임하며 새롭게 구성된 전시 거국내각을 이끈 이는 대독 강경파인 처칠이었다. 그는 히틀러의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취임 초기부터 의회 연설과 대국민 방송 등을 통해 독일의 겁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임을 천명했다. 선전 효과를 노린 것이지만 안전지대로 집무실을 옮기지 않았을 만큼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사실 5월 20일경, 독일군이 연합군의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을 포위할 것이 확실시되자 처칠은 프랑스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와 면담한 프랑스 수상 레노(Paul Reynaud)가 대안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는 졌다며 넋두리만 늘어놓을 정도였다. 항전 의지가 사라진 프랑스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었던 처칠은 영국 혼자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둘러 됭케르크 등을 통해 탈출시킨 병력은 이후 영국 본토 방어의 주축이 될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영불 해협을 건너 영국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상당수의 장비를 프랑스에 버리고 허겁지겁 몸만 빠져나온 상태였다. 영국은 제1차 대전 당시에 사용한 후 창고에 방치해 두었던 여러 구닥다리 무기들까지 꺼내 이들을 무장시켜야 했을 만큼 상황이 나빴다.

향토방위를 위해 40이 넘는 중장년층과 징집 면제자로 구성된 영국의 민방위조직 홈 가드(Home Guard). 현역들도 상황이 나쁠 정도여서 이들을 무장시킬 장비는 절대 부족했다.

만일 이때 독일 육군이 영국 본토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현실적으로 영국이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이 곧바로 영국 본토 침공을 실시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여러 현실적 제약과 영국을 전쟁 없이 굴복시키기 위해 여유를 부린 히틀러의 오판이 어우러지면서 발생한 약간의 공백은 영국에게 그야말로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다. 영국은 모든 생산 능력을 풀가동하여 무기 제작에 착수했다.
 


바다사자 작전


물론 히틀러도 영국이 제안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별도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다. 6월 30일, 그는 OKW(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작전부장 요들(Alfred Jodl)을 불러 구체적인 침공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라이벌인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총통의 결정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이제 막 프랑스를 점령했고 또한 별도 지시에 따라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 착수한 상황이라서 전면에 나서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작전을 논의 중인 히틀러와 카이텔, 요들(좌로부터). OKW의 총사령관은 카이텔이었지만 작전과 관련된 부분은 요들이 담당했다.

사실 지난 노르웨이 침공전의 결과가 썩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OKW가 상륙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해 보았으니 히틀러의 결정은 나름대로 타당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당시 독일의 전쟁 준비가 생각보다 상당히 허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나 다름없다. 폴란드 점령 직후부터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을 결심한 이상 독일은 영국과도 곧바로 싸워야 할 운명이었음에도 정작 영국 침공 계획은 프랑스 항복 이후에나 착수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그 정도로 빨리 무릎 꿇을 줄 예상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적어도 독일이 영불 연합군과 싸움을 벌인다면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까지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미리 계획을 준비하는 것이 맞았다. 물론 대략적인 시안은 오래전에 잡아 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했지만 너무 허술한 면이 있었다. 당장 선박이 부족해 라인 강을 운항하는 바지선까지 동원해야 했을 만큼 독일의 상륙전 능력은 지나치게 부족했다.

제1차 대전 당시 사상 최대의 함대 간 해전을 직접 경험했던 해군 총사령관 레더는 영국에 대한 복수 의지가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침공전에서 많은 손실을 본 후 영국 본토 상륙 계획 수립 시 소극적으로 나왔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어쨌든 OKW가 주도하여 약 70만의 육군을 상륙시켜 영국 본토를 점령하려고 수립한 계획이 이른바 바다사자 작전(Unternehmen Seelöwe)이다. 노르웨이 침공전에서 손실을 많이 입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레더(Erich Raeder)는 히틀러가 영국 본토 침공을 선언했을 때, “우리는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다”고 한탄했을 정도로 독일 해군의 능력은 절대 부족했다. 하지만 OKW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괴링의 야욕


그것은 바로 공군이었다. 비록 독일은 바다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재무장 선언 후 가장 괄목상대할 발전을 이룬 공군은 지금까지 있었던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침공전에서 지상군의 진격로를 앞장서서 개척한 전격전의 첨병이었다. OKW는 막강한 독일 공군이 영국 해군과 공군을 제압해 준다면 침공군이 바다를 건너 영국 본토로 쳐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전역 당시 휴식 중인 JG53 소속 병사와 정비 중인 기체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사실 이는 당시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전투 부대를 수송기 등으로 직접 수송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정도 역량까지는 되지 않았고 특히 전차와 야포 같은 중장비의 공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OKW는 육해공군을 아우르는 상부 조직이지만 군령권이 없어 각 군에 협조를 구해야 했다. 히틀러가 명령을 내렸으므로 부대 동원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각 군의 이기심 때문에 종종 어려움을 겪곤 했다.

다행히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독일 공군의 총사령관 괴링(Hermann Göring)은 전공을 차지하기 위해 안달이 난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전역 당시에 바다를 통해 도망치는 연합군의 격멸에 실패해 안팎으로 비난을 받던 중이었다. 그래서 자존심 회복의 기회를 잡으려 노심초사하면서 OKW의 계획이 히틀러에게 보고되기 이전부터 영국 본토 침공의 선봉장이 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공군 총사령관 괴링은 군인이기 전에 나치의 2인자 중 하나였던 권력 실세였다. 그는 영국 침공전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덕분에 OKW는 공군의 절대적인 지원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나치당의 제2인자 노릇을 하며 정치적 위상도 컸던 괴링은 단지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하고자 했다. 사실 작전이 개시되면 육군과 해군은 공군이 영불 해협을 장악하기 전까지 대기해야 할 입장이니 괴링의 욕심이 무리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공군에 의한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