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2.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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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하늘에서의 전쟁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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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홀로 남다


1940년 6월 14일, 영국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15만의 대륙원정군(BEF) 잔여 병력을 탈출시키기 위한 아리엘 작전(Operation Ariel)을 시작했다. 영국 공군의 필사적인 엄호하에 가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해군 함정들과 징발된 민간 선박들까지 총동원되어 셰르부르(Cherbourg), 브레스트(Brest)를 비롯한 프랑스 각지의 해안가까지 분산되어 밀려나 있던 병력과 장비의 철수에 들어갔다.
브레스트에서 탈출하는 영국 대륙원정군. 20만의 연합군이 탈출하면서 프랑스 전역은 막을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해상 철수작전은 콩피에뉴(Compiègne) 숲 속에 설치된 열차 안에서 프랑스가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고 난 지 3일이 지난 6월 25일까지도 계속되었다. 결국 영국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함께 싸우던 프랑스군, 폴란드군을 포함한 총 20만의 잔존 병력과 300여 문의 야포, 2,300여 대의 각종 차량을 포함한 물자들을 본국으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0여 일 전인 6월 4일 됭케르크(Dunkirk)에서 30만의 연합군 주력이 도망쳐 나왔을 때, 프랑스 전역의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 뒤에 철수한 병력은 후방 지원부대와 주력이 탈출하는 동안 후위를 엄호하던 잔여 부대들이어서 어차피 계속 프랑스에 남아 싸울 의향은 없었다. 그렇게 전 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벌어진 프랑스 전역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말이 났다.

출격 명령을 받고 애기를 향해 뛰어가는 영국 조종사들의 모습. 영국 본토 항공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이제 서유럽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었고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 덕에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잠시 동안의 평화일 뿐이었다. 곧바로 독일의 공격이 재개되었고 고립된 영국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영국은 굴복하지 않고 처절한 투쟁의 기록을 남기며 극적으로 살아났다. 바로 하늘에서의 전쟁으로 유명한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이다.


양측의 육군


영국은 지난 1939년 9월 3일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 직후, 30여 만의 대륙원정군을 편성해 프랑스에 파견했었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전통적으로 육군 전력이 크지 않았던 데다 그마저도 식민지 관리 등을 위해 전 세계에 분산 배치된 상태였다. 그래서 대륙원정군은 서부전선에 배치된 연합군 병력의 10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당시 영국 육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셰르부르 항에 도착한 영국군 최정예 콜드스트림 근위대 소속 장병들.

비록 수는 적었지만 유일하게 부대 전체가 기계화, 차량화되었을 만큼 정예였고 병사들의 전투 의지도 염전(厭戰) 사상에 물들어 있던 프랑스군보다 높은 편이었다. 이처럼 영국은 가동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을 총동원해 최대한 먼 곳에서부터 독일을 막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진격한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섬멸 위기에 처하자 대부분의 장비를 해안가에 내팽개치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

덕분에 프랑스 전역 종료 직후 영국 본토의 지상군은 공백 상태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병력은 쉽게 보충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무기, 특히 중화기가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프랑스의 몰락 후 그나마 독일 육군과 대결할 만한 전력을 갖춘 나라는 소련이었지만, 소련은 당시 독일과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눠 먹은 관계였다. 만일 이 상태에서 영국이 250만의 독일 육군과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패배 이외의 단어를 떠올리기란 어려웠다.

됭케르크 해변에 버려진 연합군의 각종 무기들. 이 때문에 영국 본토 방어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었다.
독일도 영국 육군을 쉽게 처단할 자신이 있었다. 프랑스를 정복하느라 한 달 가까이 싸웠지만 자신들도 놀랄 만큼 일방적으로 이기다 보니 소모가 적었고, 저항을 쉽게 포기한 프랑스군의 무기와 장비 대부분을 고스란히 노획하여 전력이 오히려 증강된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군이 본토로 후퇴한 이상 두 나라의 지상군이 곧바로 충돌할 가능성은 없었다. 싸움이 벌어지려면 독일 육군이 바다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양측의 해군


영국은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William I)에 의해 정복된 후, 1,000년 가까이 외침에 굴복하지 않았던 나라다. 가장 큰 이유는 외부와 바다로 단절된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영불 해협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작은 바다에 불과하다. 켈트, 로마, 앵글로색슨, 바이킹, 덴마크의 크누트(Cnut), 그리고 앞서 언급한 윌리엄 1세 모두가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가 영국을 정복한 이들이었다.
1066년 잉글랜드를 점령하여 노르만 왕조의 시조가 된 윌리엄 1세. 이후 무력으로 영국을 정복한 이는 없었다.

이처럼 영국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면 정복당할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16세기 말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통치기에 해상의 패권을 잡은 이후, 그 어떤 적대 세력의 접근도 완벽하게 물리쳤다. 아니, 본토 방어를 넘어 세계 최강의 해군을 앞세워 전 세계로의 진출을 가속화했다. 대륙을 통일한 나폴레옹도, 20년 전의 빌헬름 2세가 통치하던 독일 제국도 결국 영국 해군을 넘을 수는 없었다.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도 영국 해군은 세계 최강이었다. 비록 제1차 대전 이후 군축 협상을 통해 전력을 축소하며 미국에 공동 1위국의 자리를 허용했지만 여전히 독일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독일은 지난 전쟁 당시만 해도 세계 2위의 해군력을 보유했고 정면으로 영국에 도전도 해봤지만 모두 과거의 영화일 뿐이었다. 영국 함정을 만나면 싸워야 했지만 굳이 먼저 교전을 벌일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39년 4월 1일에 있었던 전함 티르피츠의 진수식. 유럽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지만 독일의 해군력은 영국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그래서 강력한 독일 육군이 곧바로 영국 본토를 침공할 수는 없었다. 맑은 날 프랑스 해안에서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영국이 위치했지만 해군력이 약한 독일에게 영불 해협은 너무 큰 바다였다. 프랑스 전역 바로 직전에 있었던 노르웨이 침공전 당시 독일은 상륙전에 성공했지만 너무 큰 손실을 입었던 경험이 있었다. 영국 상륙에서 예상되는 피해는 이보다 엄청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렇게 시작된 공백


이처럼 프랑스를 굴복시키며 당당히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육군을 보유한 독일과, 이미 오래전부터 자타가 세계 최고로 인정하는 해군을 보유한 영국의 대결은 요원해 보였다. 너무 당연하지만 서로 상대방이 강한 쪽에서는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간극으로 말미암아 강제적으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졌을 뿐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파리 점령 후 개선문 옆을 행진하는 독일군. 막강했던 프랑스를 전광석화 같이 무너뜨린 후 명실공히 최강을 자부한 독일 육군이었지만 바다를 건너야 영국과 싸울 수 있었다. <출처: Bundesarchiv>

프랑스의 항복 이후 벌어진 이러한 약간의 공백 때문에 영국 본토 항공전을 별개의 전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전역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대륙원정군이 본토로 도주한 후 비록 지상전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바다와 하늘에서 소소하게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만일 영국이 육지에 붙어 있었다면 당연히 어느 한쪽이 굴복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양측 육군과 해군의 현격한 전력 격차로 말미암아 발생한 잠시간의 정적은 양측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물론 독일 내에서도 공군 총감 밀히(Erhard Milch)처럼 프랑스 전역이 완료되기 전부터 곧바로 영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는 강경파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해군의 전력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먼저 상륙전에 적합하도록 육군을 재편해야 했기 때문이다.

칼레 해안에서 영불 해협 너머로 영국을 바라보는 독일군 지휘부. 프랑스 전역 종료 후 이제 남은 상대는 바다를 방패 삼아 독일의 추격을 뿌리친 영국뿐이었다.
프랑스를 굴복시켜 감격에 겨워하던 독일은 이제 어떻게 영국을 공략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히틀러는 영국이 겁을 먹고 있다고 판단해 외교적 공세를 강화했다. 그는 현재의 영국이 절망적인 고립무원이어서 설득만 잘하면 독일 편에 붙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제 영국을 이끄는 이는 만만했던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 아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