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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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방어전의 백미

데미얀스크 전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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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와 전투기의 보강


티모셴코의 계획은 단순 명료했다. 소련 북서전선군 예하 제11군이 북쪽에서, 제1충격군이 남쪽에서 동시에 폭 10여 킬로미터의 라무셰포 가도를 파고들어가 독일 제16군 본진과 제2군단의 연결을 끊은 후, 지난 봄에 실패한 포위 섬멸전을 완수하려는 것이었다. 데미얀스크 전선의 모습이 워낙 기묘해 누구나 예외 없이 이런 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다지 특별한 전술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 후의 일이었다.
통로의 끝을 관통하여 데미얀스크를 다시 포위하고자 했던 계획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사실 티모셴코가 아니더라도 이 방법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출처: (cc)VT1978 at Wikimedia.org>

티모셴코는 지난 전투에서 4배나 많은 전력을 동원하고도 소련이 패한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았다. 우선 전선을 신속히 가르고 들어가 타격할 수 있는 기갑 전력의 부족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보병만으로는 참호를 깊게 파놓고 방어에 돌입한 독일군을 제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제11군에 400여 대의 전차를, 반대쪽에서 작전을 벌일 제1충격군에 15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공수 작전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소련 전투기들이 나름대로 저지에 나서긴 했지만 독일의 수송기들이 휘젓고 다녔다는 것 자체가 해당 공역의 제공권을 상실했다는 의미다. 양국 조종사들의 기량 차이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소련이 사용한 주력 전투기들은 독일 공군의 주력인 Bf 109와 맞서기 힘들 만큼 성능 차이가 컸다.

전쟁 초기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소련 공군은 1942년부터 야크를 비롯한 다양한 신예기를 투입하면서 전력 격차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출처: (cc)RuthAS at Wikimedia.org>
하지만 1942년 여름 이후 본격 양산이 시작된 신예 야크(YAK) 전투기가 속속 일선에 대량 공급된데다, 독일 공군이 날로 격화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지원에 몰입하면서 데미얀스크 일대의 항공 전력은 10월 이후부터 오히려 소련이 우세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사실 여타 지역을 지원하느라 소련도 여념이 없었지만 이처럼 공세를 앞두고 일대의 전력을 대폭 강화할 수 있었던 데엔 티모셴코의 입김이 크게 한몫을 했다.


라욱스의 임기응변


소련 북서전선군은 11월 28일, 대대적인 포격으로 공세를 재개했다. 포성이 멈추자 곧바로 공군의 맹폭이 이어졌고 잠시 후 포연이 서서히 걷히면서 대규모 기갑부대가 라무셰포 가도 남북에서 동시에 진격에 나섰다. 대응할 전차는커녕 저지 수단도 거의 없었던 독일은 참호와 시설에 의지해 방어에 돌입했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만큼 이번 공세에 나선 소련군의 준비는 철저했다.
6개월 만에 북서전선군이 재개한 공세의 주역은 새롭게 투입된 550여 대의 전차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티모셴코는 이틀 정도면 라무셰포 가도를 절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하루에 겨우 1킬로미터 정도 밖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6개월 전의 전투와 달리 소련군은 멈추지 않고 공격을 지속했다. 결국 곳곳에서 전선이 돌파되었고 본진과 제2군단을 연결한 통로는 다시 차단될 위기에 빠졌다.

브로크도르프-알레펠트가 치명적인 병에 걸려 후송된 후 임시로 제2군단을 지휘하게 된 라욱스(Paul Laux)는 제16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번 공세는 데미얀스크뿐 아니라 스타라야루사를 비롯한 제16군 관할 지역 전체에서 동시에 벌어졌기에 본진도 여력이 없었다. 결국 라욱스는 발다이 구릉을 비롯한 돌출부 안을 사수하던 일부 부대들을 철수시켜 통로 방어에 투입했다.

제126사단장이던 파울 라욱스는 병에 걸린 브로크도르프-알레펠트의 후송으로 제2군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임시로 지휘를 담당하며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현지사수를 외치던 히틀러가 알면 대로할 일이었겠지만 이번에 다시 포위되면 제2군단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6군 지원에 전력을 다하고 있어서 6개월 전처럼 공수를 해줄 여력이 없었다. 당시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이 완전히 포위당한데다 르제프의 제9군이 맹공에 나선 소련군과 격전을 벌이던 중이어서 데미얀스크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경이적인 분투


제2군단으로선 당연히 통로 확보가 우선인 상황이었다. 만일 데미얀스크 돌출부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철군하더라도 안전하게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곳이었다. 결론적으로 제16군을 관할하는 북부집단군이 알아서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여타 병단에 비해 항상 지원 우선순위에서 밀렸음에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싸워왔던 북부집단군에게 이런 상황은 낯선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제2군단은 미리 구축된 진지로 옮겨 다니며 끈질기게 소련군을 막아냈다. <출처: Bundesarchiv>

제2군단은 돌출부를 축소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지원이 없다면 그대로 산화할 것은 명백했다. 엄밀히 말하면 위험한 돌출부를 오래전에 포기하는 것이 맞았지만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주도로 1942년 공세를 남쪽의 코카서스로 향하게 했으면서도, 일단 차지한 곳은 아무리 위치가 나빠도 포기할 줄 몰랐던 것이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퀴흘러는 레닌그라드 전투를 담당한 제18군 예하 부대 중 라도가 호 남측 연안을 경계하던 3개 사단을 차출해 라무셰포 가도에 전격 투입했다. 총통이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이제 레닌그라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당장 살려야 할 곳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열차와 트럭, 도보를 통해 서둘러 이동한 부대들이 가장 압박이 심한 통로 북쪽의 이반코보(Ivankovo) 일대에 투입되었다.

이동 전개에 들어가는 독일군. 퀴흘러는 레닌그라드 포위에 동원된 3개 사단을 데미얀스크 방어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는데 결과적으로 뛰어난 선택이었다. <출처: Bundesarchiv>
독일군은 전차는커녕 변변한 대전차 화기도 부족했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달려오는 소련군 기갑부대를 차례차례 요격하며 지연전을 펼쳤다. 한 달이 지난 12월 28일이 되었을 때 일부 부대는 해체에 준하는 소모를 입었음에도 150여 대의 소련군 전차를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소련의 공세 여력이 한계에 다다른 12월 말에도 통로는 여전히 독일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실패한 소련의 공세


분노한 티모셴코는 남아 있는 전차와 보병을 총동원해 방어선이 강화된 이반코보를 피해 동쪽의 로시노(Rosino)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득달같이 이동 전개한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좌절되었다. 독소전쟁사에서 티모셴코는 주로 스탈린의 엄명을 곧이곧대로 받들어 정면 공격만 하다가 패배를 거듭하는 졸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데미얀스크 전투는 그가 무능했다기보다 독일군이 경이적으로 잘 싸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소련군은 다른 곳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독일군의 반격에 막혀 좌절되었다.

병력은 4배나 많고 보유한 장비까지 계량화하면 약 6배 정도의 전력을 보유한 소련군을 상대로 제2군단이 보여준 방어전은 그야말로 경이적이었다. 예전과 달리 소련군도 중구난방으로 공격하지 않고 중요한 목지점(choke point)을 골라 전력을 집중시켰지만 제2군단은 얼마 되지 않는 예비대를 반드시 필요한 곳에 적시 투입해 위기를 극복해내곤 했다. 결국 1943년으로 넘어간 시점에서도 돌출부가 약간만 축소되었을 뿐 전선은 그대로였다.

티모셴코가 주도하여 1월 12일까지 46일간 벌인 동계 공세에서 소련은 1만여 명이 전사상당했고 무려 400여 대의 전차를 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군의 피해가 더 커서 약 1만 2천여 명 정도의 손실을 보았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병사들이어서 내상 정도는 그 이상이었다. 적어도 인적 손실 규모만 놓고 본다면 보기 드물게 소련군이 선전한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전선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었다.

매장 준비 중인 독일군 전사자 시신들. 독일군은 데미얀스크를 여전히 사수했지만 인적 피해가 커서 이후가 염려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암울한 상황 때문에 침울해하던 히틀러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제2군단이 데미얀스크에서 스스로 위기를 타개해내자 몹시 고무되었다. 전선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어려움에 빠진 제6군도 같은 방식으로 선전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작 참모총장 자이츨러(Kurt Zeitzler)를 비롯한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지휘부는 이제 데미얀스크를 포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