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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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방어전의 백미

데미얀스크 전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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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진 전선의 문제점


소련 북서전선군이 진출을 시도한 지역은 대부분 호수와 하천, 숲이 이어진 습지대였다. 아직은 북극 한파가 매서워 진창으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폭설 때문에 진격이 매우 힘들었다. 이런 환경은 1941년 가을 이후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낸 든든한 장애물이었지만 반격에 나섰을 때 소련군의 전진도 둔화시켰다. 이처럼 소련의 기후와 자연은 대체로 공격에 나선 측에 불리한 여건을 제공했다.
전형적인 데미얀스크 일대의 지형. 이처럼 습지와 숲이 연속된 지형은 방어에 나선 측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출처: (cc)Ilya Schurov at Wikimedia.org>

그러나 이처럼 전투 외적인 악조건은 당시 대공세에 들어간 소련군 전체가 겪던 공통적인 애로사항이어서 특별히 북서전선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북서전선군의 가장 큰 장애물은 강력하게 저항하던 독일 제16군이었다. 특히 돌파 예정지인 데미얀스크에서 발다이까지 연결하는 가도를 담당한 독일 제2군단의 철통 같은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며 결국 초전부터 제자리를 맴돌아야만 했다.

그런데 북서전선군의 남측에서 공세를 벌이던 칼리닌 전선군의 진격 속도는 당시 소련군 제 부대들 중에서 최고였다. 특히 예하 제22군은 비텝스크를 향해 무려 100여 킬로미터를 단숨에 내달렸다. 하지만 좌우에서 함께 진격해야 할 부대들의 속도가 지지부진하면서 곧바로 문제가 대두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 방향으로 전선이 돌출되었고 측면이 길게 노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텝스크와 스몰렌스크 일대로 급속히 남하하는 데 성공한 칼리닌 전선군의 선전으로 말미암아 기묘한 형태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출처: (cc)Gdr, Wikipedia (EN) user at Wikimedia.org>
이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칼리닌 전선군이 적진에 고립될 가능성도 있었고 실제로 독소전쟁 발발 이래 소련군이 역포위당해 궤멸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전과 다르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전진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STVKA(소련군 최고사령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좌우에 있던 다른 부대들이 앞으로 전진해 전선을 최대한 일직선으로 곧게 펴는 것이었다.


야심찬 계획


지지부진한 북서전선군에게 채근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고, 사령관 쿠로츠킨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데미얀스크의 남과 북으로 돌파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3충격군(Shock Army)이 남쪽에서 홀름으로 진격하고, 북쪽에서는 제11군과 제1충격군이 일멘 호수 남단의 스타라야루사(Staraya Russa)를 거쳐 역시 홀름으로 남하하도록 조치했다. 데미얀스크 일대를 크게 포위해 독일 제16군을 분쇄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모스크바 전투를 앞두고 창설된 충격군은 보병, 기병, 기갑, 포병이 결합된 새로운 개념의 기동부대였다. 쿠로츠킨은 이를 앞세워 독일 제16군을 격퇴하고자 했다.

1월 14일, 공격 방향을 외곽으로 바꾼 북서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악천후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다고 판단한 STVKA는 예비대로 준비해 두었던 제1, 2근위군단을 북서전선군 관할 지역으로 추가 투입하면서 힘을 보태주었다. 반면 독일은 당시 남쪽의 르제프에서 발생한 위기가 워낙 심각해 적극 지원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독일 제16군 사령관 부쉬는 데미얀스크의 포기를 신중히 고려했다. 전선이 소련 방향으로 너무 돌출되었다고 판단한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와 독일 북부집단군도 후퇴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추후 모스크바 재공략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사수를 명령했다. 그렇게 독일이 미적거리던 와중인 1월 23일, 소련 제3충격군이 전선에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홀름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3충격군 일부 부대가 발다이에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홀름에 도달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원래의 계획은 남과 북에서 전진한 소련군이 홀름에서 합류해 거대 포위망을 형성하려는 것이었지만 북쪽의 제1충격군이 독일 제2군단의 선전에 막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이곳까지 진격한 제3충격군은 도시 외곽을 포위해 5천여 명의 독일군을 고립시켰다. 이는 소련군이 독소전쟁 최초로 성공한 포위였지만 전쟁 전체로 본다면 규모가 미미한 수준이었고 승리로 연결되지도 못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진 싸움터가 되었다.



포위망이 완성되다


이후 홀름 포켓(Kholm Pocket)으로 명명된 작은 공성전에 투입된 소련군이 대략 3만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자료가 부실한 이유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포위해 놓고도 함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립된 독일군은 점령지 관리와 파르티잔 소탕을 전담하던 2선급 부대인 제281보안사단 예하 2개 연대였다. 절대 열세였지만 이들은 경찰 출신 사단장 쉐러(Theodor Scherer)의 지휘로 사수에 들어갔다.
홀름 외곽을 경계하는 독일군. 5천여 명의 독일군 제281보안사단은 절대 열세에도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데미얀스크 전투와 별개인 놀라운 방어전이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사실 이는 제2차 대전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히틀러의 강요에 의한 현지 사수라기보다, 항복을 제외하고 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정도 전력으로 5~6배의 소련군이 에워싼 포위망을 단독으로 돌파해 제16군 본진 쪽으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외부에서 구원군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올 때까지 현지를 사수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어쨌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독일은 당황했으나 이는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비록 대포위망의 형성은 좌절되었지만 2월 8일, 데미얀스크 남북에서 진격에 나섰던 북서전선군의 주력 부대들은 좀 더 안쪽인 잘루츠예(Zaluchye)에서 마침내 합류에 성공했다. 독일 제2군단 전부와 제10군단 일부를 포함한 약 10만의 대군이 소련군이 형성한 지름 20여 킬로미터 정도의 데미얀스크 포켓(Demyansk Pocket) 안에 고스란히 갇혔다.

남북에서 진격한 제11군과 제3충격군이 잘루츠예에서 합류하면서 10만의 독일 제2군단이 고립된 데미얀스크 포켓이 생겼다. 그 남쪽에는 먼저 포위된 홀름이 위치해 있다. <출처: (cc)Memnon335bc at Wikimedia.org>
북서전선군의 성과에 스탈린과 STAVKA는 흥분했고 OKH는 후속 대책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르제프 일대에서 벌어진 격전이 당장의 최우선 과제이기는 했지만 무려 10만 명의 병력이 완벽하게 포위당한 사실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독일이 이에 대처할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제2군단 스스로 탈출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외부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선택


북부집단군 사령관 퀴흘러(Georg von Küchler)는 그동안 제2군단이 보여준 역량을 고려할 때 단독 탈출이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히틀러는 현지 사수를 엄명했다. 사실 데미얀스크의 위기는 애당초 전략적 후퇴를 인정하지 않은 히틀러의 고집이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증원 부대가 포위망을 가르고 들어가 구원하는 방법을 써야 하는데 문제는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18군 사령관 시절의 게오르그 폰 퀴흘러. 데미얀스크 전투 직전인 1942년 1월 17일 북부집단군 사령관에 올랐다. 이후 엄청난 선전을 펼쳤지만 대부분 방어전이어서 전과는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1942년 2월 당시의 전황만 놓고 본다면 10만 명이 고립된 데미얀스크보다, 간신히 통로를 열어 놓고 르제프 일대에서 150만의 소련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던 50만의 제9군과 제4기갑군의 안위가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 엄밀히 말해 이때 독일이 르제프와 데미얀스크 모두를 포기하더라도 결코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전선의 길이를 무려 200여 킬로미터 이상 단축시키면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모스크바 재점령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않았기에 독일군은 동부전선 중앙에 굽이굽이 형성된 기묘한 전선의 형태를 감수해야 했다. 반면 정점으로 치닫다가 어느덧 전선이 고착된 레닌그라드나 아직은 정중동 상태인 크림 반도 같은 여타 전선은 소강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1942년 봄이 시작되기 전까지 독일과 소련 모두 모스크바 전투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후속 전투에만 매달리던 상황이었다.

데미얀스크 전투는 인근의 더 큰 격전들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싸웠던 홀름 전투보다는 그나마 관심도가 높았다. 사진은 홀름 시내를 순찰하는 독일 병사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그렇다면 당장 독일군이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구원부대로 데미얀스크 포켓을 뚫을 때까지, 고립된 제2군단이 현지를 사수할 수 있도록 보급을 유지해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남쪽으로 약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르제프에서 벌어진 전투의 빛이 워낙 강하여 데미얀스크 전투는 그늘 속에 가려지게 되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던 인근의 홀름 포위전에 비하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