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어가 구상한 복수전

대양함대 사령관 쉐어는 궁리 끝에 지난 도거뱅크 해전의 굴욕을 되갚는 것으로 공세를 시작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선정한 복수극의 대상도 당시 승리한 비티의 순양전대였다. 쉐어는 로사이스(Rosyth)에 위치한 비티의 전대를 격멸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대양함대 전체의 동원까지도 고려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확실하게 승리해 바닥까지 떨어진 독일 해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카이저와 국민 앞에서 체면을 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비티의 순양전대를 유리한 위치로 유인해 낼 적당한 미끼가 필요했던 쉐어는 지난 해전에서 패한 히페르에게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줬다. 히페르의 수색전대가 로사이스에서 가까운 잉글랜드 동부의 최북단 해안도시인 선덜랜드(Sunderland) 일대를 기습 포격하면 비티의 순양전대가 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들이 출동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양함대 본진이 매복한 도거뱅크까지 유인해 격멸시킨다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비티의 순양전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국 해안을 포격한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성공한 작전이 될 수 있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그전의 포격 작전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선덜랜드가 이전의 야머스나 스카버러보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북쪽에 위치해 있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즉 유인하든, 유인하지 못하든 성공인 작전이었다.

쉐어는 지난 도거뱅크 해전에서 속도가 느린 블뤼허와 보조를 맞추느라 수색전대 전체가 영국의 함포 사정권에 들어가면서 불가피하게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티를 유인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실제로 걱정한 부분은 비티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영국 해군의 대함대였다. 대양함대가 비티의 순양전대를 예상대로 유인해 포위 공격하면 이들을 구하기 위해 대함대가 출동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의도

전투의 예정지였던 도거뱅크에서 대함대의 주력이 정박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스캐퍼플로(Scapa Flow)와 머리 만(Moray Firth)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자칫하면 한창 교전 중에 대양함대의 뒤로 대함대가 다가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만일 대양함대가 대함대와 진검 승부를 펼쳐야 할 순간이 온다면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있었지만 전력이 분명 열세이므로 정면충돌할 여건을 먼저 제공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고심 끝에 쉐어는 차선책을 택했다. 대함대가 신속하게 달려올 수 있는 영국 동부의 해안 대신 독일 본토에서 가까운 덴마크 서쪽 해역을 결전 장소로 지목한 것이다. 히페르가 이곳에서 활발하게 초계 활동을 벌이고 있는 영국의 경순양함들을 제거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비티의 순양전대가 대응하고 나올 것이 틀림없고 그러면 처음 계획처럼 대양함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이들을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쉐어는 비티의 부대를 구하러 대함대가 나서더라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형을 완전히 형성한 후 출동하기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아무리 대함대라도 예하 부대들이 축차 투입된다면 대양함대로 충분히 겨루어볼 만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만일 있을지도 모를 대함대의 출동을 방해하기 위해 5월 23일부터 잠수함대를 은밀히 전진 배치시켜 안전장치를 하나 더 마련한 쉐어는 5월 30일, 마침내 출동 명령을 하달했다.

미끼 역할을 맡은 히페르의 수색전대를 시작으로 대양함대 소속 함정들이 차례차례 빌헬름스하펜 군항을 빠져나와 집결지로 향했다. 16척의 전함을 필두로 5척의 순양전함, 6척의 전노급(前弩級) 전함, 11척의 경순양함을 포함해 총 99척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함대였다. 한마디로 대양함대, 즉 제국 해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독일 해군 역사상 앞으로도 재현하기 힘든 엄청난 전력이었다.

영국의 의도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대함대 사령관 젤리코(John Jelico) 제독도 대대적인 공세 작전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도거뱅크 해전 이후로 더 이상 독일 해군이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자 이번 기회에 북해에서 발트해에 이르는 해역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러시아와의 바닷길을 보다 안전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독일의 해상 출입구를 공고하게 막아버리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6월 2일을 작전 개시일로 정하고 한창 준비 중이었다.

바로 그때 ‘40호실(Room 40)’로 통칭되는 영국 해군 정보부대가 통신 암호를 해독해 독일 해군이 대대적으로 출동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젤리코는 1년이 넘게 잠잠하던 독일 해군이 마침내 움직인다는 정보를 보고받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격멸시키겠노라고 다짐했다. 최강을 자부하던 영국은 항상 독일 해군과 정면으로 결전을 벌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이었다.

젤리코는 예정된 공세 계획을 취소하고 대양함대의 출동과 거의 동시인 5월 30일 밤, 대함대에 긴급 출동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바다로 나올 독일 해군의 규모도, 작전 목적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대어가 출동한다는 정보에 근거해 영국 본토 인근에 있는 모든 전력을 최대한 동원했다. 이처럼 처음부터 쉐어는 허를 찔린 셈이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면 로사이스에 있던 비티의 순양전대가 제일 먼저 출동했다는 것이었다.

이전부터 공세를 대비해 준비 중이었기에 신속히 출동할 수 있었던 젤리코의 부대들은 독일이 진출할 유틀란트(Jutland) 반도 서쪽으로 속도를 내서 다가갔다. 독일의 전력도 무시무시했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영국이 동원한 전력은 가히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대함대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28척의 전함, 9척의 순양전함, 8척의 장갑순양함, 26척의 경순양함을 위시한 총 151척이었다.

양쪽이 취한 대형

양측 모두 철저하게 무선 침묵을 유지하고 심야에 은밀히 출동했기에 아직까지 상대의 정확한 위치나 규모는 모르고 있었다. 특히 사전에 대략적인 정보를 확보한 젤리코에 비해 쉐어는 전진 배치한 잠수함대로부터 보고받은 간헐적인 정보를 제외하고는 영국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토록 회피하고 싶은 대함대가 자신들을 향해 맹렬히 다가오고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기함인 프리드리히 대왕(SMS Friedrich Der Grosse)에서 작전을 지휘한 쉐어는 함대의 가장 앞에 정찰 및 미끼 역할을 수행할 히페르의 수색전대를 세운 후, 약 50마일 후방에 대양함대 본진을 배치시켰다. 그는 구축함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는 22척의 주력함들을 3개 전함전대로 나누어 단종진(單從陣) 형태로 길게 배치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행렬의 외곽을 기동력 있는 경순양함들이 호위하도록 조치했다.

반면 기함 아이언 듀크(HMS Iron Duke)에서 작전을 지휘한 젤리코는 50마일 전방에 비티의 순양전대를 필두로 총 4개의 순양전대를 순차적으로 배치하고 24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본진은 6개의 전함전대로 나누어 종렬진(縱列陣) 형태로 넓게 퍼져 항진하도록 했다. 어느덧 날이 바뀌어 5월 31일이 되었을 때, 전투 공역으로 향하고 있던 두 국가의 전력은 당시 지구 상에 존재하던 해군력의 6할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전대 단위로 싸우던 지금까지의 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양측 모두 선도부대와 본진의 거리가 대략 50마일 정도일 만큼 함대의 규모가 워낙 거대해 대함대와 대양함대가 처음부터 일거에 부딪히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웠다. 당연히 가장 앞장서서 전진하던 히페르의 수색전대와 비티의 순양전대가 가장 먼저 교전을 벌여야 할 운명이었다. 이들은 이미 지난 도거뱅크 해전에서 구원(舊怨)이 맺힌 상대였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