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거뱅크에서의 전초전

1914년 말 2차례에 걸친 독일 해군의 기습 작전은 비록 전술적 효과는 보잘것없었지만 영국에서 당장 자존심 문제로 비화했다.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대영 해군이 있었음에도 본토에 포격을 가하고 도망가는 독일의 군함을 놓쳤다는 사실 자체가 망신이었다. 반대로 그동안의 연이은 패배로 위축되어 있었던 제국 해군에게는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쾌거였다. 당연히 다음 출격도 예정되어 있었다.

1915년 1월 23일, 3번째 포격 임무를 하달 받은 히페르는 수색전대를 이끌고 빌헬름스하펜을 다시 출발했다. 이번의 목표도 영국 동부 해안가의 여러 요충지였고 이전처럼 3척의 순양전함과 1척의 장갑순양함, 그리고 4척의 경순양함을 주축으로 하는 총 26척의 군함으로 공격 부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동안 당한 망신에 절치부심하던 영국의 첩보망이 독일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영국은 5척의 순양전함을 주축으로 7척의 경순양함, 35척의 구축함으로 이뤄진 총 47척의 대규모 영접사절단을 준비하여 히페르의 진출 방향으로 출동시켰다. 이번에 마주하게 된 양측 부대는 각각 영국 대함대(Grand Fleet)와 독일 대양함대에 속한 예하 전대였지만, 규모만 놓고 본다면 독립적인 함대라 칭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거대한 전력이었다. 이제 양측 합쳐 70여 척의 군함들이 북해의 도거뱅크(Dogger Bank)로 다가갔다.

1월 24일 오전 7시 14분, 독일 수색전대 우현을 담당하던 경순양함 콜베르크(SMS Kolberg)가 영국 순양전대의 경순양함 오로라(HMS Aurora)를 발견하고 교전에 들어갔다. 이렇게 제1차 대전 당시 벌어진 최초의 함대 간 격전인 도거뱅크 해전(Battle of Dogger Bank)이 시작되었다. 교전 보고를 받은 히페르는 오로라 혼자 인근 해역을 초계 중인 것으로 생각하고 간단히 밟아버리고자 전대를 변침¹⁾해 급속 전진하도록 명령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최전방에서 초계를 하던 경순양함 슈트랄준트(SMS Stralsund)로부터 대규모의 영국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타전되었다. 북북동 방향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영국 군함들의 엄청난 연기를 보는 순간 히페르는 정면충돌이 승산이 없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만용을 부려 무모하게 응전하기보다 함대의 보존이 우선이라 생각한 그는 지체 없이 독일 수색전대에 회항 명령을 하달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히페르는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영국의 추격자들은 고속을 자랑하는 순양전함들이었다. 비티(David Beatty)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순양전대는 과부하가 걸려 보일러가 터질 정도의 속도인 29노트의 쾌속으로 독일 수색전대를 맹렬하게 추격했다. 그런데 도주하는 독일의 맨 후위에는 구시대의 유물인 장갑순양함 블뤼허(SMS Blucher)가 있었다. 히페르는 속도가 느린 블뤼허를 보호하기 위해 수색전대 전체의 후퇴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양측 전대 간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거뱅크에서 대면한 지 약 한 시간 정도 지난 8시 50분경, 마침내 수색전대가 순양전대의 사정권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선두에서 바다를 가르며 고속으로 달려가던 영국의 순양전함 라이온(HMS Lion)이 독일 수색전대의 가장 후위에 처져 있던 블뤼허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고 9시 10분, 마침내 첫 명중탄이 작렬했다.

그러자 블뤼허를 보호하기 위해 인근에 있던 4척의 독일 경순양함들이 뒤로 돌아 라이온을 목표로 대응사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라이온을 뒤따라온 순양전함 타이거(HMS Tiger), 프린세스 로열(HMS Princess Royal), 뉴질랜드(HMS New Zealand), 인더미터블(HMS Indomitable)이 사정권에 속속 도착하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전력의 우위를 점했다. 비티는 공격이 편중되지 않도록 각 함마다 상대를 하나씩 맡아 포격하도록 명령했다.

어정쩡하게 막을 내린 싸움

1시간 정도의 포격전으로 독일의 순양전함 자이들리츠과 데플링게르(SMS Derfflinger)가 결정타를 얻어맞고 크게 파손당함과 동시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단 전열에서 이탈했다. 제일 먼저 영국의 타겟이 되어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은 블뤼허는 속도가 17노트까지 떨어져 대열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그러자 비티는 가장 뒤에 있던 인더미터블에게 블뤼허를 처단하도록 조치하고 나머지는 계속 수색전대를 추격하도록 했다.

사자 우리에 내동댕이쳐진 한 마리 사슴 같았던 블뤼허에게로 영국의 순양전함 뉴질랜드와 인더미터블, 경순양함 아레추사(HMS Aretusha), 미티어(HMS Meteor)가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격렬한 포격을 받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블뤼허에게 마지막으로 구축함들이 다가와 차례로 어뢰를 발사했고 결국 블뤼허는 뒤집혀 바닥을 하늘로 드러낸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블뤼허가 침몰한 바로 그 시각, 매복이 예상되는 독일 잠수함대의 반격을 우려한 비티가 추격을 포기하면서 영독 대규모 함대 간의 최초의 대결인 도거뱅크 해전은 화끈한 시작과 달리 어정쩡하게 막을 내렸다. 독일은 장갑순양함 1척 침몰, 순양전함 2척 반파의 손실을 입었고 영국은 순양전함과 구축함 각 1척 반파의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독일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기에 도거뱅크 해전은 영국의 판정승이었다.

그러나 도망만 다닌 수색전대를 끝까지 쫓아가 격멸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몇몇 제독들이 문책을 당했다. 사실 동원한 전력과 전투 결과만 놓고 본다면 영국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낯간지러운 면이 있었다. 반면 패전한 독일 쪽에서는 더욱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처음부터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부터 한 것에 대한 카이저의 분노가 극심해 대양함대 사령관 잉게놀이 면직되고 후임으로 폴(Hugo von Pohl)이 부임했다.

길어지는 해상 봉쇄

그런데 신임 대양함대 사령관 폴도 전임자 못지않게 상당히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그 또한 처음부터 영국과의 전력 격차를 인정해 잠수함대로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것 외에는 함대 간의 결전을 최대한 삼갔다. 덕분에 1월 초에 있었던 도거뱅크 해전 말고는 전쟁이 발발한 지 햇수로 3년째인 1916년 초까지도 양측 해군 간에 인상적인 교전이 없었다. 따라서 코로넬 해전을 제외한다면 독일은 전쟁 발발 후 일방적으로 영국에 밀리는 모양새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일이 소심하게 굴어 인상적인 교전이 벌어질 수 없었다. 이처럼 독일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영국은 안심하고 상당수의 해군 전력을 지중해로 보내 갈리폴리 전투(Battle of Gallipoli)를 치를 정도였다. 반면 해상이 봉쇄당한 상태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은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립국 네덜란드 등을 통해 외부에서 일부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지만 수요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국민들이 궁핍해지자 모든 비난은 해상 봉쇄를 뚫지 못하는 해군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취임한 지 불과 1년도 안 된 1916년 1월, 폴 제독이 면직되고 후임 대양함대 사령관으로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쉐어(Reinhard Scheer) 제독이 임명되었다. 빌헬름 2세나 티르피츠 해군성 장관이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과감한 공세를 펼쳐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독일은 영국의 대함대를 넘지 않고서는 결코 꽁꽁 막힌 바다 위의 봉쇄를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적인 쉐어라도 단지 의지만으로 대함대를 이기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턱대고 정면충돌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 전만 하더라도 치열한 건함 경쟁을 불사하며 세계 2위를 자부하던 제국 해군의 입장에서 영국 해군이 무서워 1년 넘게 항구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주석

1)

항로를 변경하는 것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