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외로 고요했던 바다

1914년 7월 28일,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른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War to End Wars)’으로 알려진 제1차 대전이다. 전쟁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상대를 철저히 증오하고 있었기에 선전포고가 있자마자 모든 교전 당사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전부터 편을 갈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불씨가 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터로 달려갔다.

이처럼 시작부터 판이 컸기에 전쟁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나름대로 전방과 후방이 구분되어 있긴 했지만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와 군대를 지원하기 위한 후방의 노력이 19세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이른바 총력전이었다. 이기기 위해 군인의 생명을 포함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싸울 수 있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하늘에서도 공중전이 벌어질 정도였으니 바다에서의 전투는 너무나 당연했다. 사실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간은 바다를 전쟁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사의 살상과 파괴에 관한 모든 기록을 연일 경신하고 있었던 육지에서의 혈전과 달리 제1차 대전이 개시된 이후의 바다는 상대적으로 고요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교전 당사자들의 해군력이 보잘것없어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주적인 영국과 독일은 세계 제1, 2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두려워할 만큼 너무나 강력했기에 섣불리 바다에서 싸움을 벌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전쟁이 계속되는 한 언제까지 눈치를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제1차 대전이 발발한 지 2년 가까이 된 1916년 5월 31일, 당대 최강의 해군 간에 사상 최대의 해전이 벌어졌다. 바로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이다.

야심찬 황제의 등극

독일은 주변국에 비해 뒤늦은 1871년에서야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제2제국 창업의 일등공신인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철혈정책을 통해 역사적인 대업을 완수했지만, 이후부터는 내실을 든든히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보불전쟁 패배 이후 수모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 중인 제일 주적 프랑스를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완으로 고립시켜 놓고 국력 향상에 매진했다.

덕분에 1880년대 중반이 되었을 때, 독일은 본토의 산업 생산량만 놓고 보면 어느덧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1888년, 온건한 자유주의자인 2대 카이저(Kaiser)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가 재위 99일 만에 급서하고, 아들 빌헬름 2세(Wilhelm II)가 새롭게 보위에 오르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과 29살에 황제가 된 그는 아버지와 달리 상당히 야심만만하고 군국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빌헬름 2세는 국제 사회에서 독일이 국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통일 국가의 형성이 늦다 보니 식민지 경영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국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보다도 뒤져 있었던 것이다.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이른바 세계정책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제국주의적 침략을 시도하려 했지만 정작 독일이 차지할 곳이 그리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남이 차지하고 있는 곳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독일의 이러한 정책 변화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필연적인 마찰을 불러왔다. 같은 군국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조차 호전적인 젊은 황제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행동이 독일의 안위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고 보았을 정도였다. 만류가 되지 않는 카이저와 한때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헤게모니 다툼에서 패하며 그는 물러났고 그렇게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

바다의 패권을 노리다

거대한 장애물이 사라지자 독일은 노골적인 대외 팽창을 시도했고 결국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고립 정책에 발을 맞췄던 영국, 러시아와의 우호적 관계는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특히 빌헬름 2세의 외가인 영국은 독일이 패권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상대가 되었다. 그러려면 지난 400년간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있는 대영제국 해군(Royal Navy)과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으로 본토 수호를 넘어 일찍이 해외로의 진출을 가속화하면서 초강대국의 위치에 오른 나라였다. 따라서 아무리 독일의 힘이 강해졌다 해도 해군력의 확충 없이는 밖으로 나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도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제압하고 바다의 패권을 잡은 이후 세계 제국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토에 비해 인접한 바다가 너무 협소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독일은 구조적으로 해군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 제일의 영국에 맞설 수 있는 해군력을 구축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주력함은 가장 비싼 무기에 속하는데, 이는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889년 독일은 그동안 해군을 관리해 온 제독부(Kaiserliche Admiralität)가 대대적인 해군력 확충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효율적이지 않다고 보아 전격 해체하고, 대신 해군성(Reichsmarineamt)을 신설했다.

1897년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제3대 해군성 장관에 부임한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는 새롭게 제정된 함대법(Flottengesetze)을 바탕으로 해군력 확충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까지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던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의 전력을 대영 해군의 2/3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이처럼 독일이 모든 국력을 기울여 시작한 해군력 확충은 당연히 영국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과열된 해군력 경쟁

그동안 영국은 해군력 2위국과 3위국의 총합보다 큰 전력의 보유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1>2+3 정책’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견제 대상이던 미국과 프랑스 대신 새롭게 독일이 위험스러운 존재로 떠오르자 영국도 대대적인 해군력 확충에 나서야 했다. 이때부터 제1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독일과 영국이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으며 주력함 확보에 나선 건함 경쟁을 이른바 ‘영독 해군력 경쟁(Anglo-German naval arms race)’이라 한다.

이는 제1차 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치열했는데, 인류사에서 평시에 이보다 더 치열했던 군비경쟁 사례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확보에 혈안이 되었던 냉전시기 정도 밖에 없다. 결국 자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주면서 마주 보고 달려오는 기관차 같았던 양국의 경쟁은 1912년 영국이 프랑스와 해군 협정을 맺은 후, 독일이 더 이상 격차를 축소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경쟁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영국은 배수량 220만 톤의 함정을 보유해 전력 우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다시피 한 독일은 불과 10여 년 만에 100만 톤의 군함을 확보하며 일약 세계 2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비록 애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전 세기와 달리 이제는 영국 해군의 그림자에 놀라 경기를 일으키지는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당연히 이렇게 건설된 제국 해군은 빌헬름 2세에게 커다란 자부심이었다.

독일이 1905,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노골적으로 모로코 진출에 욕심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어느덧 프랑스 해군력을 압도한 독일은 군함을 파견해 모로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프랑스를 상대로 노골적인 해상 무력시위를 벌였다. 비록 영국이 간섭하며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이제 독일도 거함들을 앞세워 제국주의 침탈 경쟁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1914년에 제1차 대전이 발발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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