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1.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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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막다른 곳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혈전

1942년 크리미아 전역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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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갑상어를 낚는 방법

케르치 반도 전투가 한창일 때 만슈타인은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세바스토폴을 공략할 준비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지난 1941년 10월, 12월에 연이어 벌인 두 차례의 공세에 실패하며 정면 공격이 옳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희생을 감내하며 요새를 하나하나 점령할 것이 아니라 일거에 초토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기안된 철갑상어낚시(Störfang) 작전의 핵심은 점령이 아닌 파괴였다.

파괴된 세바스토폴 항구의 외곽 포대. 철갑상어낚시 작전의 목표는 이러한 파괴를 통한 소련군의 분쇄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오늘날의 벙커버스터(Bunker Buster)처럼 요새를 무력화시킬 수단이 필요했다. 만일 해군이 강하다면 비스마르크 같은 전함이 흑해로 와서 함포 사격을 가하면 되겠지만 이는 불가능했고, 공군도 요새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폭탄을 장착한 폭격기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육군이 스스로 난관을 해결해야 했고 결국 포병이 해결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2월에 동원된 1,200여 문의 야포들만으론 부족하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에 요청하여 공성(攻城)을 위해 특별 제작된 거포들을 추가로 동원했다. 거포들은 화력이 강하지만 이동에 제약이 많아 기갑부대를 앞세운 기동전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제2차 대전의 독일군과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후방에 방치되어 있던 거포들이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진 예상 밖의 혈전 덕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1차 대전 당시 포격 중인 구경 280mm 브루노 열차포. 이러한 다양한 거포들이 세바스토폴 공략을 위해 투입되었다.

구경 280mm의 브루노(Bruno) 열차포 3문을 위시해 구경이 420mm인 하우비체(Haubitze) 공성포처럼 공성을 위해 특별 제작된 약 50여 문의 다양한 거포들이 1942년 2월 말부터 세바스토폴 인근에 속속 도착했다. 이들 대부분은 제1차 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구식 포였으나 화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이 정도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지금까지 독일군의 돌파를 막아낸 막심 고르키 포대의 해안포를 압도할 정도의 화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상 최대의 거포

그렇게 해서 구경 600mm의 칼 자주포(Karl-Gerät)가 세바스토폴로 달려왔다. 흔히 박격포로 소개되는 칼 자주포는 마지노선 파괴를 목적으로 1940년에 제작된 신무기였지만 정작 프랑스를 너무 빨리 제압하는 바람에 아직 실전에 데뷔하지 못한 공성용 구포(臼砲)였다. 당시 독일은 7문의 칼 자주포를 보유했는데, 토르(Thor)와 오딘(Odin)으로 명명된 2문이 동원되어 처음으로 실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2문이 동원된 600mm 구경의 칼 자주포. 흔히 박격포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공성용 구포다.

그런데도 만슈타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괴물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4월, 앞서 언급한 모든 거포들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릴 괴물 중의 괴물이 크리미아에 모습을 드러냈다. 800mm 구경을 자랑하는 역사상 최대의 거포 슈베러 구스타프(Schwerer Gustav, 이하 구스타프)였다. 1940년에 제작된 구스타프는 4.8톤의 장약을 이용, 7.1톤의 포탄을 최대 38km까지 날려 30m 두께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파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거포는 운용 병력이 1,500여 명, 지원 병력이 4,500여 명이나 필요하고 무게만도 1,350톤에 달했다. 분해 후 수십 량의 전용 열차에 실어 목적지까지 이동한 뒤 약 1개월에 걸쳐 별도의 반원형 복선 철도를 깔고 포를 조립해 방렬했을 만큼 사용에 어려움이 많은 무기였다. 1942년 3월 초, 독일을 출발한 구스타프는 총 1.6km에 이르는 열차에 실려 4월 초 심페로폴에 도착해 설치 작업에 들어갔다.

사상 최대의 거포인 구스타프의 800mm 포탄. 옆에 전시된 T-34 전차와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독일이 크리미아 동쪽 케르치 반도에서 제11군을 위협하던 소련의 크림 전선군을 경이적인 기동전으로 격파하는 동안, 이동을 마친 거포들은 세바스토폴을 향해 포탄을 날리기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 이후 수적으로 더 많은 야포들이 동원된 전투는 있었지만 화력까지 감안한다면 당시 세바스토폴에 포진한 독일 포병은 재현이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세바스토폴 전투를 끝낼 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모두가 무서워했던 포격

드디어 6월 2일, 제8항공군단 소속 폭격기들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독일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거의 동시에 독일군 역사상 최강의 포병 전력이 세바스토폴의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정된 목표로 일제히 포를 발사하면서 방어 진지 곳곳에서 거대한 화염과 먼지가 피어올랐다. 마치 세바스토폴을 지도 위에서 지워버리려고 작정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철갑상어를 낚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포격을 받고 불타오르는 세바스토폴 도심의 모습.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밤낮을 가리지 않고 5일간 계속된 포격이 끝난 후 북동쪽을 담당하던 제54군단이 시험 삼아 진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저항이 있자 만슈타인은 즉시 진격을 멈추고 포격을 재개했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전술을 사용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병사들의 사상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독일군은 6월 12일까지 쉬지 않고 불벼락을 세바스토폴 곳곳에 날렸고 동시에 제8항공군단이 세바스토폴의 해상 통로를 차단했다.

포격의 백미는 6월 5일, 스탈린 요새를 향하여 초탄을 발사한 구스타프였다. 포성이 800km 떨어진 흑해 너머의 오데사에서도 들릴 정도로 컸다. 엄청난 발사음에 귀마개를 한 많은 포병들의 고막이 터져 나갔다. 공격에 나선 독일군 병사들조차 무서움에 몸서리칠 정도였으니 자신들의 머리 위로 상상도 못한 엄청난 포탄이 쏟아져 내린 소련군에게는 지옥이 현실에 등장한 셈이었다.

세바스토폴 포격전을 자세히 묘사한 독일의 선전 영상.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엿볼 수 있다.

45분마다 한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구스타프는 첫날 막심 고르키 포대에 8발, 스탈린 요새에 6발을 퍼부었다. 정확도가 떨어져 명중탄을 작렬시키지는 못했지만 스탈린 요새 곳곳이 격파당하면서 방어선으로서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비록 첫날의 전과는 기대 이하였지만 무시무시한 위력은 다음 날부터 여실히 입증되었다. 세베르나야(Severnaya) 만 인근의 해수면 30m 아래에 깊숙이 위치한 탄약 저장고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지옥

이때의 충격과 후속 폭발로 인해 무려 150m의 연기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고 주변에 있던 소련 해군의 많은 선박들이 후폭풍에 휘말려 침몰했다. 동시에 독일의 폭격기들이 흑해를 통해 세바스토폴로 접근하는 소련 함대의 지원 물자와 보충 병력을 맹렬히 공격함으로써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기 시작했다. 세바스토폴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살육장이 되어 버렸다.

초토화된 세바스토폴의 해군 조병창. 세바스토폴 수비대가 백기를 들 때까지 독일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인 구스타프는 매일 목표물을 돌아가면서 7월 4일까지 총 48발을 사격했다. 이후 포신 교환을 위해 불가피하게 철수했지만 수명이 다할 때까지 세바스토폴을 굳건히 사수하던 난공불락의 요새들과 진지에 지옥불을 날리며 파괴해 나갔다. 워낙 인상적이어서 구스타프가 세바스토폴 포격전의 상징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것은 칼 자주포였다.

여타 거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좋은 칼 자주포는 목표물에서 3.5km까지 근접하여 포격을 가했기에 명중률이 상당히 높았다. 6월 6일부터 14일까지 무려 200여 발의 고폭탄과 철갑탄을 쉴 새 없이 날렸다. 불발탄이 4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불량률이 생각보다 높았으나 포탄이 워낙 크고 무거워 중세의 사석포(射石砲)처럼 운동 에너지만으로 일부 방어물을 파괴하는 위력을 보이기도 했다.

파괴된 막심 고르키 포대의 모습. 굳건히 세바스토폴을 방어하다가 결국 자폭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지금까지 독일군의 돌격을 저지했던 막심 고르키 포대에 여러 차례 결정타를 날린 것도 칼 자주포였다. 비록 일부 포신이 작동했지만 칼 자주포의 연이은 공격을 받아 기능이 대폭 떨어진 상황에서 독일 보병들이 외곽을 포위하자 결국 막심 고르키 포대는 자폭으로 장렬히 생을 마감했다. 포대를 파괴한 후 생존 포대원들이 필사의 탈출에 나섰지만 사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