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25일, 프랑스의 항복을 받은 독일의 다음 목표는 영국이었다. 독일이 본토로 퇴각한 영국과 싸우려면 400년간 세계 최강을 자랑해온 해군이 지키는 해협을 건너야 했다. 이런 상황이 20년 전의 제1차 대전 당시에 벌어졌다면 마땅한 대안이 없었겠지만, 독일은 핸디캡을 극복할 또 다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공군이었다.

독일은 공군이 앞장서서 영국의 주요 거점과 해군을 격멸한 후 강력한 육군이 바다를 건너가 본토를 점령한다는 ‘바다사자 작전’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7월 10일, 폭격기들이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바다를 건너 영국 본토 공격에 나섰고 이를 막기 위해 영국의 요격기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유일무이한 공군 간의 전투인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약 넉 달간의 혈전 끝에 독일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독일의 신예기에 능히 맞섰던 스피트파이어의 존재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수량이 절대 부족했던 스피트파이어만으로 독일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영국은 위기의 시절에 수적 열세를 메워준 훌륭한 동반자를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영국 공군의 또 다른 전설인 허리케인(Hurricane) 전투기다.

최고의 전투기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

제1차 대전 이후 어느덧 공군력의 뒷받침 없이는 전쟁에서 이기기 어려운 시대가 되면서 열강들은 속도가 빠른 최고의 전투기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다 보니 자고 나면 이전에 개발된 전투기들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 만큼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엔진의 성능이 좋아지고 비행에 적합한 기체 구조에 대한 각종 연구 성과들이 쌓이면서 1930년대 초반부터는 단엽기가 전투기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31년, 영국 항공성은 최고 시속 400km로 비행할 수 있는 신예 전투기 도입 사업을 공표했다. 이때만 해도 기존의 노후기를 적시에 대체함으로써 군사 강국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스런 수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33년에 호전적인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자 상황은 급변했다. 그동안 공군력 보유 자체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던 독일의 대대적인 군비 확충이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더구나 독일이 개발에 나선 신예 전투기들에 관한 각종 정보는 상당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즉시 영국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전투기의 개발을 끝내고 양산에 나서야 할 상황이었다. 1936년 최종적으로 남은 후보작은 슈퍼마린(Supermarine)의 K5054와 호커(Hawker)가 제안한 K5083이었다. 만일 당시 유럽에 전운이 감돌지 않았다면 객관적으로 성능이 앞섰던 영국 최초의 전 금속제 전투기 K5054가 즉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고심 끝에 내린 초유의 결정

K5054가 바로 스피트파이어인데, 단점이라면 당대를 선도할 만큼 혁신적인 기술들을 접목하다 보니 제작 단가가 비쌌고 아직 일부 기술이 개발 중이어서 양산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평시라면 이런 문제는 기종 선정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겠지만, 독일이 재군비를 선언한 상황이어서 사정이 달랐다. 독일의 공군력이 대대적으로 확충되면서, 양국 간의 전력 격차가 급속히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작 정치권은 나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군비 확충에 소극적이어서 군부는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스피트파이어만으로 전력을 구축할 경우 전투기의 수적인 공백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영국 공군은 경쟁작인 K5083에도 미련을 둘 수밖에 없었다. 스피트파이어가 워낙 출중해서 그렇지 K5083의 성능도 최고 속도가 공군의 요구를 훨씬 초과하는 시속 507km에 이를 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신예기 개발 상황을 고려할 때 K5083으로는 전력의 우위를 장담하기 곤란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영국 공군은 결국 두 기종 모두를 주력 전투기로 채택하는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일단 제작이 쉬운 K5083으로 양적 격차를 어느 정도 메우면서 스피트파이어의 양산 체계를 완성해 도입을 순차적으로 늘리려는 의도였다. 한정된 예산과 다급한 상황을 고려한 고육책이었다.

복엽기에서 단엽기로 가는 과도기적 구조

호커의 엔지니어인 캠(Sydney Camm)이 설계한 K5083은 복엽기에서 단엽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구조였다. 복엽기인 퓨리(Fury)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엔진룸처럼 각종 핵심 장비가 탑재되는 곳을 제외한 기체의 상당 부분이 목재로 만든 뼈대에 방수천을 씌운 형태였다. 그러다 보니 개발이 아직 완료되지 않고 기술력도 축적되지 않아 양산에 어려움이 많았던 스피트파이어보다 제작이 쉬웠고 그만큼 단가도 저렴했다.

이런 단순한 구식 구조는 역설적으로 피탄 시 생존율을 높여 주었고 야전에서의 유지 보수도 쉬웠으며 조종도 간편했다. 이는 전투기 가동률을 높여야 했고 경험이 부족한 신참 조종사도 즉시 투입할 만큼 급박했던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상당한 이점이 되었다. 캠은 강력한 멀린(Merlin) 엔진을 탑재하려면 기체의 골격을 좀 더 보강해야 한다고 보고 스피트파이어를 벤치마킹해 주익 전체를 금속제로 업그레이드했다.

호커는 상업적으로는 슈퍼마린의 경쟁자였지만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함께 발을 맞춰가야 할 동반자이기도 했다. 최고 시속이 528km로 향상된 K5083에 허리케인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고 스피트파이어보다 1년 빠른 1937년부터 일선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아직은 평시였지만 나치의 호전성에 위협을 느낀 당국이 600기를 주문했을 만큼 허리케인에 대한 영국 공군의 기대는 컸다.

성능의 한계가 드러나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30여만의 대륙원정군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이때 허리케인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고 10월 30일 국경 지대를 정찰 중이던 독일 공군의 Do 17P를 요격해 격추시켰다. 이는 영국 공군이 제2차 대전에서 올린 최초의 전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서부전선에서의 확전을 자제해, 이듬해 봄까지 그다지 의미 있는 교전은 없다시피 했다.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이때부터 허리케인은 독일 공군 전투기들과 정면 승부를 펼쳤지만 Bf 109에게 모든 면에서 압도당했다. 전쟁 전부터 우려한 대로 과도기적 구조로 인한 성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Bf 109를 제외한 여타 독일 작전기들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기본 방어전략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독일이 영국 상륙전을 펼치기 전에 공군으로 사전 정지를 하리라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지만 이들을 막아낼 영국의 전투기 전력은 너무 부족했다. 생산에 전력을 기울여 7월까지 독일의 1,200여 기에 그나마 맞설 수 있는 800여 기를 보유하게 되지만 총 61개 전투기 중대 중에 스피트파이어로 무장한 부대는 20개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한정된 자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용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었다.

긴박했던 4개월 동안의 눈부신 활약

영국은 독일의 폭격기를 호위하는 Bf 109를 스피트파이어가 유인하면 허리케인이 폭격기를 공략하는 전략을 세웠다. 레이더를 이용해 독일의 접근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고, 홈코트여서 독일보다 월등히 유리한 비행시간을 확보하고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장점이었다. 이러한 계획과 여건을 발판으로 독일의 폭격기들은 허리케인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며 하염없이 소모되어 갔다.

이처럼 영국 침공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독일의 폭격기들은 제대로 공격도 못 해본 채 허리케인의 표적물이 되고 있었다. 항공전사에서는 이때 주력 전투기로 활약한 Bf 109와 스피트파이어의 명성이 높지만 당시에 격추당한 독일기의 70퍼센트가 허리케인의 전과였다. 너무 날렵한 보검의 그늘 속에서 활약하다 보니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처럼 허리케인은 또 하나의 당당한 주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영국이 가장 위험했던 시절에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허리케인은 곧바로 주력 전투기의 지위를 내려놓았다. 가장 큰 이유는 1941년이 되자 독일이 영국 본토 침공을 단념하면서 위험이 감소되었고, 그 사이에 스피트파이어의 공급량이 충분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폭격기 요격이 주 임무였을 만큼 Bf 109와 공대공 전투를 벌이기에는 성능의 차이가 컸다.

허리케인은 1944년까지 총 14,583기가 제작되어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 대부분 대지공격기, 해상초계기 등으로 임무를 전환했고 북아프리카 같은 2선급 전선에 투입되거나 대외 공여용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전쟁 내내 꾸준히 사용되기는 했지만 전투기로서 가장 멋진 활약을 펼친 전성기는 불과 넉 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 남긴 활약상이 너무 커서 허리케인은 항공전사의 당당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제원(Mk IIC)

전장 9.84m / 전폭 12.19m / 전고 4.0m / 최대이륙중량 3,950kg / 최고속도 547km/h / 전투행동반경 965km / 상승한도 10,970m / 무장 20mm 히스파노 기관포 4문, 500파운드 폭탄 2발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