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나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정중동(靜中動)의 전투

1942년 7월 말, 폭염이 시작되면서 독소전쟁의 모든 시선은 불바다로 바뀐 스탈린그라드에 쏠렸다. 애초에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최종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히틀러와 스탈린의 자존심 싸움이 얽히면서 여타 전장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휴전이나 정전을 하고 오로지 스탈린그라드에서만 싸웠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여전히 전선 전체에서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인명이 비명 속에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세간의 이목이 온통 스탈린그라드에만 집중되다 보니 단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7월 중순에 넬리도보(Nelidovo) 회랑이 정리된 것을 제외하면 1월에 처음 형성된 전선에서 별다른 변동이 없었던 르제프 전투는 독소전쟁의 여러 격전들에 비해 유별나다고 할 만큼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외견상 전선의 모습이 정중동의 상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시기 북부에서 벌어진 레닌그라드 전투와 비교하면 얼마나 관심을 받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레닌그라드 전선도 큰 변동이 없는 것은 르제프와 비슷했지만 추축국에 완전히 봉쇄당한 국면이었기에 소련의 항전 모습이 선명히 부각될 수 있었고, 그런 내용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널리 기억되고 있다.

차라리 피해가 적더라도 전선의 변화가 극심했다면, 혹은 반대로 어느 한쪽이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로 전선이 형성되었다면 관심을 끌었을 텐데, 르제프 전투는 연일 쏟아부은 혈(血)과 철(鐵)의 양에 비해 외형상으로는 변동이 없다시피 하니 이처럼 관심 밖의 전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이 누군가의 시선을 끌거나 인기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1년 넘게 지속된 르제프 전투는 한마디로 잊혀진 싸움터라 할 수 있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재개된 공격

지난 6월 28일, 히틀러가 코카서스 점령을 목표로 청색 계획(Fall Blau)을 시작했을 때, 소련은 이것이 모스크바를 염두에 둔 독일의 양동작전이라 생각했다. 독일이 이쪽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속여 소련군을 남부로 몰려들게 만든 후, 모스크바를 노릴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키예프를 놓고 잠시 우회했지만 지난 1941년 내내 독일의 주공이 모스크바를 향해 달려왔고, 지난 겨울 엄청난 혈전을 치른 점 등을 생각할 때 이런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소련에게 모스크바를 향해 툭 튀어나온 르제프 돌출부는 눈엣가시였다. 독일이 모스크바 공략을 재개한다면 이곳이 발판이 될 것임은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남쪽의 스탈린그라드를 주시하면서도 이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전쟁 중 혹은 이후 제작된 선전물에서 연출된 현지 지도의 모습과 달리 스탈린은 크렘린에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기에 모스크바의 안위는 그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스탈린은 모스크바가 직면한 위험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자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엄밀히 말해 이는 새로운 지시가 아니라 지난 1월에 발생한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채근이었다. 이번에도 돌출부 좌우에 있는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이 나서야 했다. 사실 이곳을 제거하는 작전은 돌출부의 좌우로 파고들어가 배후를 절단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안도 없었다.

그런데 소련은 몰랐지만 이 당시 독일은 주력을 셋으로 나누어 쾌속 돌파하던 지난해와 달리 동시에 여러 곳에서 공세를 벌일 여력이 없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격전과 별개로 독일이 모스크바를 다시 노릴 것이라 우려했지만 정작 독일 제9군 사령관 모델은 르제프 돌출부 일대의 방어선을 2중으로 더욱 촘촘하게 구축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처럼 독일이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를 선택한 상황에서 7월 30일 마침내 소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잠깐의 승리와 이어진 반격

이번에는 소련군의 공격 방향이 브야즈마를 목표로 했던 지난 상반기의 공세 때와 조금 달랐다. 칼리닌 전선군이 르제프 전면을 견제하며 시선을 끄는 동안 서부전선군이 돌출부의 중간 지점인 시쵸프카로 파고들어가 독일군을 양단하려 했던 것이다. 독일 제9군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한 번에 먹으려다 탈이 났던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칼리닌 전선군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한 후 르제프를 향해 남진을 개시했다.

공격 당일의 모습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칼리닌 전선군 예하 소련 제30군은 독일 제6사단이 관할하는 전면 방어선을 일거에 돌파해 르제프 중심가에서 불과 5km 북쪽에 위치한 폴루니노(Polunino)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동안 충분한 대비를 해놓았던 독일군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다음 후방 진지로 후퇴해 소련군의 진격을 순차적으로 저지해 나가자 소련의 공격은 곧바로 둔화되었다.

더구나 작전 개시 직전의 폭우로 인해 전선이 진흙 구덩이가 되면서 선봉과 후속 본대의 간격이 벌어졌다. 독일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파구를 연 소련 제16근위사단, 제111, 379사단은 자연스럽게 독일이 친 그물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하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들 소련군 부대는 좌우 측면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렸고 이곳으로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공세를 먼저 시작한 여력이 있었기에 독일과 대등하게 맞서고는 있었지만 소련군에게 결코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독일은 내선 방어의 이점을 살려 예비대를 즉각 투입해 돌파구를 막아낸 반면, 측면을 노출당한 소련군은 좌우에서 가해진 독일군의 공격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8월 3일이 되었을 때 더 이상의 희생을 방치할 수 없었던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칼리닌 전선군의 공격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초전의 상황은 소련이 유리해 보였다

칼리닌 전선군이 수세에 몰리던 8월 2일, 서부전선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7월 31일에 작전을 펼칠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이틀 연기되면서 상황이 몹시 이상하게 바뀌었다. 먼저 작전을 펼치다가 고전 중인 칼리닌 전선군을 시급히 도와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라스푸티차¹⁾는 아니었지만 건조기에 갑자기 닥친 폭우로 인한 진흙 구덩이는 이처럼 주코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지체할 수는 없었다. 반나절 동안의 대대적인 포격 후, 포고레로예 고로디쉬체(Pogoreloye Gorodishche)에 전진 배치된 3개 전차군단과 1개 기병군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주코프가 돌파의 중핵으로 준비한 이들 기동부대가 독일 제46장갑군단을 격파하고 바주자(Vazuza) 강 동쪽의 줍초프(Zubtsov)와 카르마노포(Karmanovo) 선까지 진격해 교두보를 확보하면 좌우에 배치된 제20군과 제31군이 남북으로 돌파구를 넓혀 시쵸프카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충분히 준비를 했던 만큼 소련의 공격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8월 5일이 되었을 때 약 10km 정도를 진격할 수 있었다. 브야즈마에서 르제프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시쵸프카가 차단되면 독일은 당연히 돌파구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덕분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칼리닌 전선군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가 상당히 심각한 국면으로 받아들였을 만큼 초전의 모습은 소련이 일방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이때 히틀러의 즉각적인 결단이 이루어졌다. 당시 동부전선의 중앙부를 담당하고 있던 독일 제4군 방향으로 툭 튀어나온 수히니치(Suchinici)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준비해 놓았던 금쪽같은 3개 전차 사단을 포함한 5개 사단을 즉각 150km 북상시켜 르제프 방어전에 투입한 것이었다. 회오리 작전(Operation Whirlwind)으로 명명되었던 수히니치 공략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했을 만큼 르제프는 히틀러에게 중요한 곳이었다.

▌주석

1) 봄에 눈이 녹거나 가을에 눈이 왔을 때의 길이 질퍽질퍽한 시기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