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물러가고 독일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애초에 브야즈마와 스몰렌스크 간의 철도와 도로를 점령할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소련 칼리닌 전선군 예하 제39군은 2월 5일, 올레니노(Olenino) 부근에서 독일군에게 좌측면을 강타당했다. 이로 인해 후속하고 있던 제29군과의 연결이 순식간에 끊어지면서 제39군은 르제프 서쪽의 넬리도보(Nelidovo)와 벨리(Bely)를 연결하는 좁은 회랑에 고스란히 갇혔다. 모델의 반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완전히 포위된 것은 아니었지만 독일군 수중에 고립된 상황이 되어버린 제39군은 방어 태세로 전환해야 했다. 사실 제39군만 놓고 본다면 빨리 후퇴해야 했지만 비텝스크까지 진격한 제3충격군과 제22군의 측면을 보호해야 했기에 단독 철군은 불가능했다. 이처럼 르제프와 브야즈마를 연결하는 돌출부는 전선의 요철이 심하다 보니 누가 누구를 포위하거나 압박을 가하는 것이 어색한 상황이었다.

거의 동시에 브야즈마를 향해 전진하던 소련 서부전선군 예하 제33군도 유흐노프(Yukhnov) 동측에서 독일군에게 좌우를 강타당하며 고립되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소련 제33, 39군은 독일 제9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좌우에서 함께 진군하던 선봉대였지만, 이제는 존망을 걱정해야 할 지경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 한때 영하 40도까지 추락하며 독일군을 굴복시켰던 북극의 한파는 어느덧 물러가고 없었다.

당황한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고립된 부대를 돕기 위해 2월 18일부터 5일 동안 유흐노프 일원에 7,300여 명으로 구성된 제4공수군단을 투입했다. 이들은 크루치(Kluchy), 티노프카(Tynovka), 노바야(Novaya) 등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잠시 독일을 긴장시켰지만 3월 말이 되자 적 후방에 고립된 파르티잔 정도의 위력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경무장에 보급이 제한된 공수부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애당초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소련군

장장 100여 일간의 공세에도 끄떡없이 현지를 사수하던 독일군이 반격을 시도해 일부 선봉 부대가 위기에 처하자 다급해진 건 소련 쪽이었다. 독일 제9군을 완전히 포위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즈음 시작된 해빙기 라스푸티차(Rasputitsa, 봄에 눈이 녹거나 가을에 눈이 왔을 때의 노면이 질척한 시기)는 양측 병사들에게 강제 휴식을 부여하며 전선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많은 독소전쟁사 자료에서 예외 없이 진흙장군은 동장군과 더불어 위기에 빠진 소련을 구원한 결정적인 구원자로 언급된다. 그런데 이는 엄밀히 말해 1941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오히려 전쟁 후반기에는 소련군의 진격을 방해하는 애물단지 역할을 했다. 단지 낯설지 않다 뿐 아무리 소련군이라도 엄청난 진흙 대지를 헤쳐나갈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강제 휴전에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4월이 되자 소련군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유흐노프 부근에서 배후가 끊어진 제33군이 완전히 포위된 것이었다. 좌우에 있던 제5군과 제43군도 눈앞의 독일군과 근근이 대치하는 중이어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이전처럼 스탈린이 무조건 현지사수를 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후퇴를 하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STAVKA는 제33군 사령관 예프레모프(Mikhail Yefremov)에게 항공편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예프레모프는 부대가 궤멸된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4월 19일 자결했다. 모스크바 수호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던 제33군은 브야즈마 동쪽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사라져 갔다. 지난 겨울에 혹독한 경험을 치렀지만 여전히 독일군은 소련군이 쉽게 압도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소련의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더 큰 위기가 브야즈마 서쪽에 고립되어 있던 제39군에게 닥쳐왔다.

모델은 고립된 소련군의 섬멸계획을 세웠다

제39군의 위기는 소련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당시의 전선은 독일이 르제프를 포기하든가, 소련이 홀름(Kholm)과 토로페츠(Toropets)까지 확대된 전선을 뒤로 물리지 않는 한 결코 직선으로 재편될 수 없는 구조였다. 문제는 히틀러나 스탈린 모두 자신들이 차지한 돌출부는 그대로 놔둔 채 다음 작전을 구사하려 들었다는 데 있었다. 특히 소련은 능력을 넘어서는 지나친 공세로 나오면서 화를 불렀다.

르제프에서 브야즈마에 이르는 돌출부 제거에만 골몰하여 선도 부대를 너무 깊숙이 남하시킨 탓에 독일의 반격이 시작되자 적진에 역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조바심과 달리, 정작 1942년 3월 들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열정은 식어갔다. 어느덧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소련 침공의 궁극적 목표였던 전선 남부의 코카서스로 향해 있었다.

4월이 되자 독일은 청색 계획(Fall Blau)으로 명명한 히틀러의 새로운 공세 준비에 한창 분주한 나머지 여타 지역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9군 사령관 모델은 한정된 자원으로 제한적인 방어 작전을 펼쳐야 했다. 그는 현지 사수 명령을 받고 부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했지만 장기간의 대치 끝에 오히려 소련군을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자 욕심이 생겼다.

지금까지의 진지를 중심으로 한 소극적 방어 대신 제한적인 공세를 벌여 적을 섬멸할 생각을 한 것이다. 목표는 두 달이 넘게 반포위 상태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 제39군이었다. 이들은 소련 제11기병군단이 개척한 통로를 이용해 칼리닌 전선군과 간신히 연결되고는 있었지만 모델은 충분히 궤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으로 명명한 공격 계획을 세웠다.

지옥의 전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작전은 이미 반 정도 포위된 소련 제39군을 크게 둘로 가른 후 따로따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독일 제23군단이 북쪽을 견제하는 동안 에제베크(Hans-Karl Freiherr von Esebeck) 제2전차사단장이 이끄는 별동대가 남쪽에서 벨리로 진격해 제39군 우익에 있는 소련 제22군과의 연결을 끊고, 동시에 제56장갑군단이 레니노(Lenino)로 파고들어가 남쪽으로 길게 늘어진 넬리도보 회랑을 둘로 쪼개 버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던 7월 2일, 마침내 독일군이 행동을 개시했다. 전선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에제베크 분견대의 역습에 소련군은 당황했다. 전방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측면의 몰락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 와중인 7월 6일, 제56장갑군단이 회랑 가운데를 관통해 버리자 제39군은 완벽하게 양단되어 버렸다. 이제 그들은 항복하든지, 격렬히 싸우다 산화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외곽에 있던 제3기갑군이 이곳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여타 소련군의 이동을 막아냈다. 결국 목구멍의 가시처럼 독일 제9군의 좌측을 압박하던 소련 제39군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7월 12일이 되었을 때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6개월 간 지속된 소련의 공세는 일단 막을 내렸다. 겉으로 인상적인 격렬함은 없어 보였지만 7월까지 소련은 약 60만, 독일은 약 20만의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르제프 전투는 종결된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과정에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정적일 뿐, 내적으로는 쉬지 않고 계속 피를 부르고 있었다. 훗날 사가들이 7월까지 이어진 소련의 역공과 독일의 반격을, 이후에 같은 곳에서 벌어진 전투들과 구분하여 르제프-브야즈마 공세전(Rzhev–Vyazma Offensive Operation)이라 불렀지만, 이후 벌어진 전투와 결코 별도의 싸움은 아니었다. ‘고기 분쇄기’라 불린 지옥의 전장은 겨우 절반을 지났을 뿐이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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